작가의 꿈을 품은 과학자입니다

독특한 인생의 궤적(軌跡)은 언제나 좋은 글감이 된다

by 박주영


논문으로 말하는 사람

“박 박사, 논문 참 잘 썼더라.”
가방을 들고 퇴근하던 스승님이 다시 연구실로 올라와 내게 말했다.
“바로 투고해도 되겠어.”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이 내겐 세상의 어떤 상보다 더 뿌듯했다.
한국 과학계의 거장에게서 ‘논문을 잘 쓴다’는 칭찬을 듣는 일.
그건 곧 내 언어가 과학의 세계 안에서 통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논문을 잘 쓴다는 건 무엇일까?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내가 찾아낸 빙산의 일각을
가장 정교한 과학의 언어로 조각해 세상에 내놓는 일.


의과학 논문이란 결국 ‘논증의 예술’이다.
데이터는 탄탄해야 하고, 스토리는 명확해야 하며,
연구자는 자신의 발견이 얼마나 새로운지를 설득력 있게 엮어야 한다.
배경에서 시작해 타깃 탐색, 기전 연구, 그리고 임상적 가치로 이어지는
하나의 완결된 서사 — 그것이 곧 과학자의 문학이다.


과학자의 글쓰기 생존법

연세대 의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스승님과 함께 3년 동안 후속 연구를 이어갔다.
나는 논문을 타고난 천재처럼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없이 퇴고하며 실험과 문장을 동시에 다듬은 ‘수련자’였다.


실험실에서 얻은 교훈은 명확했다.
논문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95%의 시간은 데이터를 쌓는 데,
단 5%의 시간만 글쓰기에 사용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5%의 문장은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논문은 비즈니스와 닮아 있다.
연구자는 ‘투자자’(국가연구재단, 복지부, 제약사 등)를 설득해야 하고,
논문이라는 산출물로 그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
연구비를 따내고, 실험을 수행하고, 논문을 게재하고,
다시 다음 연구비를 신청하는 무한 루프.
그 안에서 연구자는 과학의 글로 생존한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과학 연구는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돈을 쓰는 예술이다.
하지만 그 안에 나의 생계와 자존이 함께 들어 있다.
과학 글쓰기는 내 직업이자, 생존의 방식이다.


과학자의 언어, 작가의 언어

언젠가부터 한국어가 그리워졌다.
영문 논문으로 하루를 보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늘 한국어 문장이 흘렀다.


학창 시절, 교내 신문에 글을 기고하던 때가 있었다.
대학 시절엔 수필로 상도 받았다.
연구로 바쁜 지금도 다이어리 한편에는
연구 아이디어와 감정 일기가 나란히 적혀 있다.


논문은 잘 쓰지만,
나는 사실 ‘생활의 언어’로 삶을 풀어내는 글을 더 좋아한다.
다만 내 글에는 언제나 약간의 ‘의약품 냄새’가 밴다.
직업의 흔적이니까, 이젠 그것마저 나다운 매력으로 받아들인다.


과학자의 글쓰기는 곧 생존의 기술이다

대학 교수로서,
내 하루는 거의 ‘글쓰기’로 채워진다.
연구 논문을 작성하고, 연구비 신청서를 쓰고,
강의 자료와 발표 대본을 준비하는 일.


과학자의 글은 단어 하나하나가 책임과 연결되어 있다.
모든 문장은 증거를 가져야 하고,
모든 주장은 근거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문장을 쓸 때마다 내 이름을 함께 걸고 쓴다.


두 번째 인생을 위한 준비

전 부장판사 출신 문유석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전문직의 삶 속에서도, 그 경험을 언어로 남기는 일.
그건 또 하나의 사회적 책임이자, 아름다운 귀결이라는 것을.


나는 서른 즈음부터 노후를 준비했다.
재테크나 연금 같은 숫자의 언어로만이 아니라,
이제는 문장의 언어로 나의 두 번째 생을 설계하고 있다.


정년 이후에도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
글로 세상과 연결되고, 젊은 세대의 고민에 귀 기울이는 일.
그게 내가 그리고 싶은 은퇴 후의 삶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꼭 은퇴하고 나서야 작가가 되어야 할까?”
아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꾸준히,
삶의 기록을 글로 남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독자로서, 소비자로서 독서를 '좋아하는 것'과,

작가로서, '업으로 삼는 것'의 차이는 -

'평가'라는 필연적인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 가을, 나는 브런치 작가로 첫 발을 내디뎠다.
작가 신청서를 올리고 하루 만에 합격 알림이 도착했을 때,
그건 예기치 못한 작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는 매주, 글을 통해 나 자신을 실험한다.
과학자가 논문으로 세상과 대화하듯,
작가로서 삶의 언어로 세상과 연대한다.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나의 두 번째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연구실 밖에서도, 나는 여전히 이야기를 쓴다

한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늘 아쉽다.
법정물, 의학물, 범죄수사물은 많은데
왜 연구소나 대학원생의 세계를 담은 드라마는 없을까?


이공계 대학원 생활은

화려하지 않다. 낭만도 거의 없다.
아침 8시 출근, 새벽 2시 퇴근.

나의 대학원 시절은 그랬다.
논문 한 편을 위해 청춘을 ‘갈아 넣는’ 세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쓴다.
과학자들의 현실과 희로애락,
그 안에 숨어 있는 인간의 이야기들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연구자의 문장으로, 그리고 작가의 마음으로.


나는, 과학자로 살며 작가로 성장한다

나는 한국에서 자라
한국, 미국과 중국의 명문대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다.
이 세 나라의 실험실을 모두 경험하며 깨달았다.
세상 어떤 경험도, 글감이 되지 못할 것은 없다.


한국의 연구자는 성실하고, 동시에 독창적이다.
한정된 자원 속에서도 끝내 해답을 찾아내려는 끈기가 있다.
실험실의 밤이 길수록, 그들의 아이디어는 더욱 단단해진다.


중국의 연구자는 속도가 빠르다.
성과를 향해 달리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로서,
방대한 자본과 인력의 힘으로 변화를 밀어붙인다.
그들의 경쟁은 치열하지만, 때로는 본질보다 결과가 앞설 때도 있다.


미국의 연구자는 자유롭고 실속 있다.
불필요한 형식보다 본질을,
완벽한 정답보다 새로운 질문을 더 중시한다.
그들의 연구실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연함이 흐른다.


세 나라의 실험실을 모두 경험하며 나는 깨달았다.
연구의 방식은 달라도, 진실을 향한 열망만큼은 같다는 것을.
그 차이를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과학자로서의 내 언어를 확장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실험실에서, 동시에 노트북 앞에서 글을 쓴다.
실험 데이터 속에선 진리를 찾고, 문장 속에선 인간을 찾는다.
하나는 세포의 언어로, 다른 하나는 마음의 언어로 세계를 기록한다.


과학자의 연구노트와 작가의 원고지 사이,
그 경계 위에서 나는 여전히 나를 실험하고 있다.
그리고 믿는다.
삶을 탐구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한 편의 논문이자 한 편의 문학이 된다는 것을.


✨ 에필로그


연구는 늘 미완성의 문장 같다.
하나의 실험이 끝나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기고,
하나의 답을 찾으면 그만큼의 의문이 다시 열린다.


글도 그렇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과정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만약 내 인생의 논문 제목을 붙인다면,
이렇게 쓰지 않을까.

“관찰과 기록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한 인간의 여정.”


실험과 글쓰기,
두 세계를 오가며 나는 오늘도 배우고 있다.
과학이 사실을 증명한다면, 글쓰기는 그 사실의 온도를 전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논문을 쓰는 과학자이자
이야기를 기록하는 작가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두 세계의 경계 위에서,
조용히 다음 문장을 준비한다.


궤적(軌跡).jpg 궤적(軌跡) ⓒ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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