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은 왜 ‘행복한가’를 물으셨을까

성취의 끝에서, 다시 행복을 묻다

by 박주영

스승님은 10년 동안 늘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지금, 행복한가?”

24살 대학원 새내기였던 때에도,
28살 박사 졸업 후에도,
33살 전임교수 임용에 성공했을 때에도.


그분은 창문 너머 먼 산을 바라보며 자주 사색에 잠기셨다.
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과학계의 거장이,
왜 제자에게 매번 ‘행복’을 물으셨을까.


그건 어쩌면,
과학의 냉정한 현실 속에서도
열정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한 스승의 간절한 기도였을 것이다.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나는 한국을 사랑하지만, 하고 싶은 연구를 위해 떠났다.
독립적인 연구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서.


한국의 이공계 박사는 명문대를 나와도
정규직 연구자로 남기 어렵다.
교수직이 아니면 평생의 학문을 이어가기 힘들고,
산업계나 정부출연연구소로 진로를 틀어도
기회는 좁고 경쟁은 치열하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적인 과학인재를 길러냈지만,
동시에 해외로 유출되는 인재의 수도 늘고 있다.
BRIC(생물학연구정보센터)의 ‘한빛사’ 논문 통계를 보면,
한국인 과학자의 국외 소속기관 게재 논문이 국내보다 많아지는 추세다.

한국인 의생명과학자 국외 소속기관 게재 한빛사(우수논문) 통계 (2002년~현재) ⓒ www.ibric.org


한국의 과학 인프라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인재는 떠난다.
처우, 인정, 그리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보람이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한국에 남았다면 행복했을까?’
‘다른 나라로 갔다면 지금보다 덜 외로웠을까?’
‘과학자가 아닌 다른 길을 걸었다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평온했을까?’


명예를 얻었지만, 내 마음은 ‘감옥에 갇혔다’

“박 교수님, 제 동기 교수가 식당에서 우연히 박 교수님 뵙고 마음에 들었다네요. 연락처 드려도 될까요?”

며칠 전, 친한 여자 교수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순간 나는 미소 지었지만, 속으로는 복잡했다.


“감사해요. 그런데 아직 성과를 쌓아야 해서요. 지금은 연구에 집중하고 싶어요.”

그렇게 에둘러 거절했지만, 진심은 조금 달랐다.


나는 중국 사람과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그건 편견이 아니라, 현실적인 감정이었다.
현지 동료들과의 관계는 원만하고 따뜻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로 나 자신을 이곳에 묶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잠시 머무는 사람, 그리고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이다.


중국에 온 첫해, 모든 게 새로웠다.
비자 서류를 준비하고, 연구실 세팅을 하고, 첫 논문을 투고하던 시절엔
이곳의 거대한 에너지와 속도감에 나도 흥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고요한 감옥 속에 갇혀가는 기분이 들었다.


성과는 쌓여갔지만, 마음은 더 비좁아졌다.
나는 매일같이 연구실과 집만 오갔다.
간판의 중국어 조차 눈에 거슬리고, 낯선 억양의 언어는 마음을 더 멀게 했다.

한국이 그리울 때면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를 찾아봤다.
서울 골목의 온기, 오래된 식당의 국밥 한 그릇,
그 모든 장면들이 나의 심장을 천천히 덥혔다.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해외에서 교수로 임용되다니, 대단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화려한 이름 뒤엔, 자유를 잃은 한 인간이 있다.
명예는 얻었지만, 내 마음은 내가 만든 감옥에 갇혀 있었다.
욕심이 만든 철창 속에서, 나는 나의 행복을 가두고 있었다.



과학의 즐거움도 결국 ‘연대’에서 온다

외국 생활의 고독을 견디게 해주는 건 결국 ‘사람’이었다.
동료 교수들은 내 연구 인사이트를 존중해 주었다.
어느 날 한 교수님이 내게 말했다.

“당신의 연구 방향이 참 독특해요.
혹시 우리 프로젝트에도 자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말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여러 교수들의 연구에 ‘학술 고문’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들의 논문 설계와 데이터 해석에 내 경험을 보탰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과학의 본질은 ‘발견’의 ‘연결’에 있다는 것을.


나의 기술과 지식이 누군가의 연구를 돕고,
그들의 통찰이 다시 나의 시야를 넓혀준다.
이 교차와 순환의 감정이야말로, 연구가 주는 진짜 행복이었다.


중국의 동료 교수들은 따뜻하고 의리가 있다.
이방인인 나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교육자로서의 고민을 나누며 마음을 열었다.
그들이 한국 교육을 ‘선진적’이라고 칭찬할 때면,
나는 그 말 뒤의 진심을 느꼈다 —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도 ‘더 나은 연구’를 꿈꾸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


결국 과학의 즐거움은 데이터나 성과가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와의 연대 (連帶)에서 온다.
그 연대의 한가운데서, 나는 다시 스승님의 질문을 떠올린다.

“지금, 행복한가?”


연대 (連帶)의 힘ⓒ강남구청 칼럼


행복이란, 결국 ‘의미를 이어가는 일’

중국 의대 임용 절차를 마치고 모교를 떠나기 전,
스승님은 마지막 식사를 함께하자고 하셨다.
봄볕이 은은하던 점심, 식탁 위에는 제자 사랑이 깃든 반찬들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여쭈었다.

“교수님, 교수님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스승님은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으시더니,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내 꿈은 나의 학파를 만드는 거야.”


그 말의 의미를, 그땐 다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학파란 결국 지식의 연대이고,
그 속에 스승의 철학과 제자의 열정이 함께 숨 쉰다.
그건 ‘이름을 남기려는 야망’이 아니라,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은 바람’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 역시 그 큰 바다의 한 물줄기다.
지금은 타국의 낯선 연구실에서 홀로 실험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 모든 여정의 끝은 결국 한국으로의 귀환에 닿아 있다.
스승님이 그러하셨듯, 나도 언젠가 내 제자들에게 묻고 싶다.
“너는 행복하니?”


행복은 거창한 성취의 끝에서 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명예를 좇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방인의 삶 속에서 비로소 선명해졌다.
결국 나를 지탱해 온 건 논문도, 성과도 아닌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과의 연대, 그리고 한국이라는 뿌리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실험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하나의 질문으로 하루를 정리한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이 질문에 언제나 ‘예’라고 답할 수 있는 날.
그날이 바로, 내가 진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일 것이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 - 하구(河口, estuary)

에필로그

‘행복’이란 결국,
자신의 성취가 누군가에게 의미로 이어질 때 찾아오는 것 아닐까.


나는 오늘도 실험실에서, 글 위에서,
한 사람의 과학자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그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스승님께 다시 묻고 싶다.

“교수님, 이번엔 제가 여쭤볼게요.
이제, 교수님은 행복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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