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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May 25. 2024

한국 역사에 관심이 과한 불청객

23일 차 : 레온에서 비야당고스 델 빠라모까지

2023.11.2 목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23일 차


Leon 레온 ~ Villadangos del Paramo 비야당고스 델 빠라모

22.02km / 7시간 09분 / 비 > 바람 > 흐림 > 맑음





아침으로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고 배를 든든히 채웠다. 아내가 음식을 차리느라 준비가 늦어져 다른 멤버들이 떠나고 2시간 뒤인 10시 20분쯤 출발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레온 대성당 앞에서 만난 현지인이 추천해 준 추로스 가게에 들렀다. 꾸덕하고 진한 초콜릿에 바삭하고 쫀득한 추로스를 찍어 먹는 단순한 조합인데 중독성 강한 맛이었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빗줄기가 굵어져 있었다. 차가운 바람까지 더해져 얼굴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아내가 너무 힘들었는지 레온에서 연박을 하자고 제안했다. 상황이 좋지 않을 경우 일정에 여유를 갖기로 한국에서부터 약속하고 왔다. 비를 맞지 않는 처마 밑에 잠시 멈춰서 일기 예보 어플을 열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매일 비 소식이 있었다. 기온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린다. 하루 늦춰봐야 비를 피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날씨만 추워진다. 그럼에도 연박을 하고 싶냐고 물어보니 체념한 듯 앞장서기 시작했다. 토라진 듯한 뒷모습을 보니 선뜻 아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은 것에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어리고 조그마한 것이 괜히 나를 따라와서는 고생만 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7일간 비를 맞으며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고 걱정되었다. 어플에는 8일 이후의 관측이 나오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훨씬 긴 기간 악천후가 계속될 수 도 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ahagun(사아군)에서 만난 순례자가 생각났다. 원래는 이맘때쯤 날씨가 좋다는데 굳이 악조건을 견뎌야 하나 싶었다. 이번에는 내가 아내를 불러 세웠다.


"우리 일단 올해는 여기까지만 걷는 걸로 하고 어디 따듯한 나라에 가서 좀 쉬다가 내년 봄 되면 레온부터 다시 이어서 걷는 게 어때?"


아내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거야말로 의미가 없고 현실적으로 더 어렵단다.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저만치 달아난 아내 뒤를 쫓았다.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비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다행이다. 처음 계획했던 마을까지 가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포기했을 것이다. 작고 어리지만 나 보다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내 반려자라서 듬직하다.


해가 비치는 와중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궂은 날씨에도 어느새 300km 남았다.


아내는 어제 한국인 순례자들과의 파티 때 다양한 음식들을 요리했다. 다들 맛있다며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는 모습을 보며 몸은 힘들지만 그 보다 훨씬 큰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순례길 경로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투숙객들에게 한식을 차려주는 숙박시설을 운영해보고 싶단다. 우리 둘 다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선택인 듯하여 찬성표를 던졌다. 한국에 돌아가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San Miguel del Camino(산 미겔 델 까미노)라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메누 델 디아를 시키니 와인 한 병을 통째로 줄 정도로 인심도 후하고 음식도 전부 맛있었다. 후식을 먹을 때쯤 옆 테이블에 현지인으로 보이는 손님이 앉았다. 주문을 하고 얼마 후 뜨겁게 달군 무쇠 팬과 커다란 고기 한 덩어리가 나왔다. 초벌 된 고기를 한입 크기로 썰어 팬에 올리자 연기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식당에 퍼졌다. 알고 보니 이곳은 질 좋은 돼지고기 바비큐 전문점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제야 주방에 왜 화덕이 있는지 이해되었다. 다시 순례길을 걷게 되면 꼭 방문해서 먹어볼 음식 리스트에 추가했다.





출발이 늦었던 탓에 18시가 다 되어 숙소에 도착했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자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근처 식료품점에서 간단한 재료들을 사 와 조개죽을 만들어 먹었다. 알베르게 공용 식당에 있던 순례자들에게 조금 나눠 주었더니 맛있다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재료와 레시피를 물어보며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몇몇 덕에 아내는 신이 났나 보다.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요리해 주는 것이 행복하다며 한식 제공 숙박업에 대한 소망을 되짚는다. 다른 순례자들이 보답으로 음식을 조금 나눠 준 덕에 풍족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 있는데 핀란드에서 온 순례자 한 명이 다가왔다. 평소 한국의 역사에 흥미를 갖고 있다며 5.18 민주화 운동을 시작으로 근현대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우리나라에 큰 관심을 보인 탓에 자긍심마저 들었다. 모르는 내용은 검색까지 해가며 열심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새 질문을 던지고 나면 나의 답변보다는 본인의 지식을 자랑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관심도 없는 핀란드 역사에 대해서도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금방 끝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경청해주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 넘게 지나 있었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다른 프랑스 출신 순례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어서 도망가라는 손짓을 몰래 보내왔다. 과하게 늘어지는 일방적인 소통이 정도를 넘었음을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느끼고 있던 것이다. 평소 대화 중 말을 자르는 것이 굉장히 무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상대방이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이번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저녁 식사 후 개인 휴식 시간을 서로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는 것이 이곳에서의 보편적인 불문율이다. 나를 붙잡아 놓고 소중한 시간을 뺏은 것부터가 먼저 결례를 범한 것이다. 굳이 나의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피곤해서 가봐야겠다고 통보함과 동시에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며 일어났다. 주방 한쪽 구석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와 설거지를 하는데 아까 손짓을 보낸 순례자가 다가왔다.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도 얼마 전 당했다며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알고 보니 핀란드 출신 순례자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얘기만 주구장창 하는 것으로 이미 악명이 높단다. 나는 오늘 처음 그를 만난 탓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 들 중에는 나와 잘 맞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다. 극히 일부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이기적인데 그런 사람들은 금방 소문이 퍼진다. 혹시라도 누군가 나의 여행기를 읽고 순례길을 걷게 된다면 부디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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