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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Jun 07. 2024

음악의 힘으로 힘겹게 오른 정상

28일 차 : 비야프랑까 델 비에르소에서 라 라구나 데 까스띠야까지

2023.11.7 화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28일 차


Villafranca del Bierzo 비야프랑까 델 비에르소 ~ La Laguna de Castilla 라 라구나 데 까스띠야

27.22km / 8시간 17분 / 맑음 ↔ 흐림  ↔ 비





지난 이틀간 60km라는 먼 거리를 걸었던 탓에 육체적·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나 보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날씨라도 맑으면 위안이 되었을 텐데 또다시 하늘은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 반복됐다. 어제 습득한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비옷 벗기/입기' 기술을 질리도록 써먹었다.



중간쯤 나타난 마을의 성당에서 추위와 비를 피해 짧은 휴식을 취했다. 마을의 규모만큼이나 작고 아담했지만 지쳐있던 심신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했다. 얼마간 쉰 후 문을 나서는데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사이 하늘이 개었나 보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근처 벤치에 앉아 도시락으로 준비해 샌드위치를 먹었다. 언제 또 먹구름이 해를 가릴지 알 수 없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오랜만에 따스한 햇살을 맞으니 쳐졌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구간 막판쯤 2시간 가까이 오르막을 걸어야 했다. 낮게 깔린 안개구름의 습한 공기 때문에 숨이 가빠와 무척 고되었다. 아내는 나름의 대비책을 찾았다. 이어폰을 꽂고 노래따라 부르다 보면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힘듦을 잊게 된단다. 주로 재생하는 음악 장르는 90년대 댄스 가요다. 곡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평소 걸음으로는 따라잡을 없을 정도로 이동 속도가 빨라진다. 보통은 안내를 위해 내가 앞장서는 편인데 아내가 이어폰을 장착하면 선두를 양보한다. 아내의 템포에 맞추기 위해 고개를 처박고 나름 최선을 다해 따라가는데도 앞을 보면 어느새 멀리 달아나 있다. 그만큼 효과가 확실하다. 만약 음악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도 최소 한 시간은 더 걸렸을 것이다. 과거 선조들이 힘든 밭일을 하며 노동요를 부르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음악의 힘을 빌려 가파른 오르막을 빠르게 오르는 아내의 모습




힘겹게 목적지 La Laguna de Castilla(라 라구나 데 까스띠야)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를 지나 알베르게로 가고 있는데 뒤에서 택시 한 대가 지나갔다. 우리가 묵을 숙소 앞에 차량이 멈추더니 손님 한 무리가 내렸다. 복장을 보아하니 순례자는 아닌 듯했다. 한산하던 알베르게 앞은 순식간에 북적였다.


인파에 섞여 숙소로 들어가는데 미국 출신 순례자 Jarrett(재렛)이 2층 객실에서 내려오다 우리와 마주쳤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꽤 여러 날 동안 같은 일정을 소화하며 제법 친해진 동료 중 한 명이었다. 반가움에 악수를 건넨 재렛은 숙소 앞에 세워진 택시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를 타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 순간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다. 8시간 넘게 추위와 비를 뚫고 여기까지 올라왔건만 던지는 첫마디가 의심 가득한 질문이라니. 화가 났지만 기력이 없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당연히 아니라고 답했다. 녀석도 미안했는지 그제야 고생했다며 로비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첫날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아니 그 앞으로도 나는 택시나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일명 점프를 할 생각이 없다. 도저히 못 갈 상황이 발생하면 같은 숙소에서 연박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오롯이 나의 힘으로 순례를 완주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세운 목표이자 꿈이다. 굳은 의지를 재렛이 알리가 없거니와 우리의 도착 시점에 맞춰 때마침 차량이 오는 바람에 충분히 오해할 수 있겠다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우리를 마치 속임수나 쓰는 거짓말쟁이인 마냥 대하는 무례한 태도 때문에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상처가 남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순례의 일부라고는 하지만 매번 새로운 시련을 마주할 때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녹록지 않다. 아직도 수련이 부족한가 보다.





레온 한식 파티 멤버들과 우연히 같은 숙소에 묵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며 산티아고에서의 2차 파티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규님과 조님의 참가 확정 소식이 공유되었다. 다들 들떠 있는 게 느껴졌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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