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길을 나섰다. 정말 오랜만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하루 종일 비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바람도 잔잔했다.
순례자용 어플에 따르면 목적지 마을 Sarria(사리아)로 가는 경로는 두 가지다. 17km의 짧은 길을 택할 경우 산을 넘어야 한다. 아내가 힘들어하는 내리막과 울퉁불퉁한 돌길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다른 코스는 산을 넘는 대신 우회해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평지 위주이긴 하나 거리가 25km로 더 길다고 안내되어 있었다.협의를 통해 두 번째 길을 골랐다.
결과는 실패였다. 꽤나 가파른 언덕을 여러 개 넘어야 했다. 대부분 포장도로로 되어 있다는 설명이 무색하게 진흙과 자갈로 덮인 길이 자주 나왔다. 무엇보다 중간에 쉴 곳이 드물었다. 제법 많은 마을들을 지났으나 영업 중인 바르나 알베르게가 거의 없었다. 11월 비수기에 접어들기도 했고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짧은 경로로 향하기 때문에 잠재적 고객이 적어서 그런가 보다. 실제로 하루 종일 길에서 만난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영업 중인바르를 겨우 찾아짧은 휴식을 취했다. 마침 점심시간에 가까워져 근처 벤치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었다.
쉼 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으로 인해 코스 막판 몸과 마음이 상당히 지쳐 있었다. 며칠 전부터 아내는 그런 상황에서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90년대 댄스 가요의 빠른 비트와 시원하게 내지르는 고음으로 힘듦을 극복한다고 했다.나도 순례 첫날부터 전역한 부대의 중대가를 속으로 읊조려왔다. 오늘은 그걸로 부족했다. 전우, 최후의 5분, 전선을 간다, 팔도 사나이 등 군가들을 목청껏 내질렀다. 주변에 다른 순례자가 없고 주민 거주 지역이 아니라 아무 눈치도 보지 않았다. 결연한 가사와 비장한 멜로디 덕분에 에너지가 차올랐다. 제대 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알베르게에 체크인 후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숙소에 주방이 없어 외식이 불가피했다. 1차 저녁으로 케밥을 먹었다. 지도 어플에 따르면 브레이크 타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식사가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주인은 우리를 반겨주었다. 2차 저녁 메뉴는 마트에서 산 와인과 피자 전문점에서 포장한 피자였다. 다른 순례자들이 모두 식사를 하러 나가 아무도 없는 공용 거실에서 아내와 조용히 먹을 수 있었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