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을 읽고
‘경애의 마음’을 읽고 작가 김금희에게 홀딱 반했다. 느리지만 깊이 있고 진정성 있는 등장인물 - 상수, 경애, 조 선생, E, 경애 엄마 -, 곳곳에서 감성을 건드리는 문장, 진지한 문체, 그리고 인물들이 그들에게 맞게 만들어가는 이야기까지도 정말 마음에 든다. 읽는 사람의 궁금증을 끌어내면서, 인물 간의 접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그들의 만남에 이해가 깊어지기까지 따라가는 독서 여정이 즐겁다. 그리고 그 끝에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참 좋다. 경애가, 상수가, 그들의 이야기가.
‘경애’의 마음이 가는 곳
경애의 마음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잔잔하게, 그러나 깊게.
사람에 대한 마음이 크니 아픔도 많다.
그럼에도 경애는 늘 사람에게로 마음을 보낸다.
자신의 중심을 지키며, 옆에서 자신의 마음을 얹어주는. 그래서 경애는 이렇게 말한다.
ㅡ“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ㅡ
이런 경애의 마음씀이 나는 좋다.
하나, E-은총에게 가는 마음
고등학교 때 영화동호회에서 만난 아이, 인천을 오가며 만나던 E, 아마도 둘 사이에는 풋풋한 사랑이 피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E는 자신이 찍은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학교 축제에 초대한 영화동아리 친구들과 뒤풀이를 하는 자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죽고 만다. 때마침 전화를 하러 나온 경애는 살아남았지만 경애는 한동안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망적인 삶을 산다.
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그의 죽음을 만든 맥줏집 사장의 욕심에 대한 분노, 그리고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에 경애는 마음을 둘 곳이 없다. 경애는 E의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기며 세월을 견딘다.
ㅡ“미안해, 나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그래서 눈을 네가 있는 곳에 먼저 보낼게.”ㅡ
E는, 죽은 E는 경애의 마음속에서 늘 살아있다. 상수와 그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는 마음속에서만.
둘, 산주에게 가는 마음
대학교 2학년 때 만나 오랫동안 연인이었던 산주는 경애를 떠나 부유한 경애의 선배와 결혼을 한 다. 정이 깊은 경애는 다시 절망적인 삶을 산다.
“경애는 인턴으로 일하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한 계절 동안 집에 틀어박혔다. 아주 긴 여름이었다. 9평 원룸에 누워 있으면 매미들이 마치 파도처럼 연이어서 쎄 - 하고 울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 겨우 고립감을 덜 수 있는, 설거지도 빨래도 요리도 하지 않는 일상에서는 오로지 오늘만 있는 것 같았다. 산주가 있었던 어제도 없고 산주가 없는 내일도 없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사이에서 되도록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경애의 마음만 있었다.(96쪽)
“그런 여름날 속에서 경애를 집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맥주와 옥수수뿐이었다. 옥수수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애는 이삼일에 한 번씩 나가서 옥수수를 사 왔다. 옥수수의 힘센 잎들, 동물의 것처럼 부드러운 수염, 그리고 아주 꽉 차 오른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으로 문득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듯 어떤 환기가 들면서 ‘산다’라는 말이 생각나곤 했다. 경애가 이방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저 밖에는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생장하고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다행히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여름의 낮을 보내다 슬리퍼를 끌고 시장으로 나가면 그 살고 있는 것들을 두 손 무겁게 사들고 어쨌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경애도 아무튼 살고 있다는 것. 그런 마음이 들면 경애는 불현듯 약속을 잡아보다가도 낮이 되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외출을 취소하곤 했다.(97쪽)”
그러면서 마음을 접고자 하나 산주가 다시 찾아오고 경애는 그 마음을 폐기하지 못하고 만남을 이어간다. 사람에게 미련이 많은 경애.
“그렇게 산주가 결혼하고 삼 년이 지나는 동안 경애는 언제든 아, 이런 것이 끝이구나, 정말 끝이다, 끝, 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로맨스가 종료됐다는 것은 느껴도 마음이 멈춰지지는 않았다.(61쪽)”
“경애는 그런 마음에 대해서 꽤 잘 알았다. 그러니까 현실의 효용가치로 본다면 애저녁에 버렸어야 했을 물건들을 단지 마음의 부피를 채우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을 말이다. 경애가 산주 선배와의 연애가 끝난 뒤에도 그와 관련한 물건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58쪽)
마음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경애, 많이 상처 입지만 그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경애
그 사람에게 진심이었기에 아파도 쉽게 그에게서 빠져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에게 미련이 많은 나와 비슷하다. 이런 경애를 계속 흔들어 놓는 산주가 밉다.
셋, 상수에게 가는 마음
상수는 회사에서 만난 팀장이다. 아니, 팀장 대리이다. 무언가 부족하지만 아버지의 백으로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낙하산, 회사에서 아웃사이더인 그에게 배정된 아웃사이더 경애, 둘은 비숫한 점이 많고 접점도 많다.
상수의 삶의 방향도 사람을 향한다. 사람에게 정이 많아서 상실의 아픔이 많고,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며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할 줄 안다. 오랫동안 연애상담 사이트인 ‘언니는 죄가 없다’를 운영하는 이유다. 그리고 어설퍼 보이지만 자기 삶의 중심을 지키며 살아간다.
“상수의 영업 전략 역시 그런 감정적 접근이었다. 상수는 '실'이야말로 기계와 거리가 멀고 아날로그적이라서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이때 움직이는 건 구입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따지고 계산하는 영역이 아니라 온갖 기억과 향수 같은 것을 건드려 얻는 감정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상수는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가 감아올릴 실을 보여줌으로써 사장들이 공장을 돌려 마침내 손에 쥘 실물의 세계 - 티셔츠일 수도, 삼각팬티일 수도, 등산복일 수도, 베갯잇일 수도 있는 ㅡ 를 환기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10쪽)”
"우리가 왜 옷을 입느냐는 것인데, 우리가 혼자 살면 옷 안 입어도 됩니다. 그런데 옷을 입는다는 건 어딜 나간다는 거고 누굴 만난다는 거고 그렇게 해서 인간이 된다는 거잖습니까, 인간다워지라고 미싱을 돌린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상수씨, 그거 안 잊어야 합니다.”
다른 사원들과 달리 상수는 조 선생의 그런 말들을 아주 귀담아 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듣기 좋은 소리였다. 마음 어딘가에 쌓인 만년설 같은 것을 녹이는 소리였다. 본인은 극구 인정하지 않지만 아버지 덕분에 회사에 들어와 대강 시간을 뭉개며 살아보려 하던 상수를 깨우는 소리였다. 하물며 기계라는 것, 미싱이라는 것,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도 그런 의미'랄까, '본질'이랄까 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 그것이 상수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상수가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와 연애소설들에서만 이야기되던 것을 현실에서 말해준 사람이었으니까.(83쪽)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해온 시간이 있다. E의 친구였던 시간, 상수가 운영하는 ‘언니는 죄가 없다’ 사이트에서 함께 한 시간, 그리고 현재는 회사에서 시간을 함께 지내며 그들은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다.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끼지만 무리해서 접근하지도 적극적으로 고백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느리게 그들의 마음을 이어간다.
“어느 한 번의 일요일에는 경애가 올 거라고.
그렇지 않아도 늘 뭔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으니까 상수에게는 그리 힘든 기다림도 아니었다. 경애는 세상을 떠난 사람도 아니고 19세기 브론테 자매의 소설 속 인물도 아니며 브로마이드 속에만 존재하는 히로인들도 아니었다. 경애는 지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아주 복합적인 실감으로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경애와 상수에게는 추억이 있고 대화가, 어긋났던 감정들의 순간과 실패의 경험과 자주 있었던 낙담과 서로를 서툴게 위로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적어도 상수에게는 너무나 뚜렷했으므로 상수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전히 "언니들의 마음을 보듬는 진짜 언니가 될래요.” 하는 낯간지러운 제목 아래 기사가 실리면 순식간에 달리는 그럴 바에는 X 없애라' '변태일 듯' 같은 댓글 속에서도 늘 기다리는 마음을 유지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349쪽)”
“상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10월의 어느 깊은 가을날 우리가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와의 이별에 관한 회상이었지만 그래도 그 밤 내내 여러 번 반복된 이야기는 오래전 겨울, 미안해, 내가 좀 늦을 것 같아 눈을 먼저 보낼게,라는 경애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며 같이 울었던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352쪽)”
이 둘의 만남이, 그들이 함께 하는 엔딩이 좋다.
넷.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가는 마음
경애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주변 시선에 굴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다. 회사에서 직원을 대량해고했을 때도 그렇고, 베트남에서의 부정을 이야기한 대가로 부당한 발령을 받았을 때에도 그렇다. 함께 또는 홀로 시위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힘들고 힘들어도. 그렇게 차분하면서도 강단 있게 살아가는 경애의 모습이 멋지다. 그래서 경애는 아픔도 많았지만, 시련도 많았지만, 자신의 삶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변화시키며 살고 있다.
하지만 경애의 엄마는 언제나 경애가 일어서는 아이라고 믿었고, 꽃처럼 예쁘게 보내야 할 경애의 시간들이 오래되어 퀴퀴해진 빨래처럼 방치된 채 흐르고 있어도 슬프거나 경애에게 뭐라고 한 소리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순간이 왔을 때 말 그대로 힘들어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자기 딸은 아플 때 아파야 하는 사람이라서 그렇겠거니 여기면서 속상해하거나 마음 부대껴야 할 필요가 없었다.(102쪽)
“또다시 봄이 오고 있다는 건 다른 어떤 것보다 공기가 먼저 말해 주었다. 숨을 쉴 때마다 봄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갓 태어나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아기에게도 숨 쉬는 능력은 주어지니까.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오면서 인간이 가장 먼저 익히는 능력이니까, 공기의 미세한 변화를 아는 것, 무엇이 가까이 있고 무엇이 여기에 있지 않은지 숨을 쉬며 아는 것. 어쩌면 미유의 아기가 시계도 보지 않고 매번 같은 시각에 울 수 있는 건 그런 공기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자 안도감이 몰려왔다. 경애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305쪽)”
소설 끝에 수록된 간단한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이 간다. ‘마음을 다 해 썼다.’는 작가의 말이 소설을 다 읽은 후 내게 먹먹한 감동으로 왔으니까. 그 마음이 내게 닿았으니까.
“작가의 말,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마음을 다해 썼다.
2018년의 초여름
김금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