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작가인 가와이치 아리오가 선천성 전맹인 시라토리와 미술관을 탐방하며 예술을 감상한 기록이다. 처음에는 많이 의심쩍었다. 보지 못하는데 미술을 감상한다? 색깔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가 미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제대로 감상은 할까? 그런데 그들은 나의 염려를 깨뜨리고 새로운 감상법을 보여 주었다.
하나. 생각의 전환
‘눈이 보이지 않으니 큰일이구나’라는 염려는 누구나 하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기에 비장애인들에게 시각장애인은 약자이며 돌봐주어야 할 대상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이러한 우리의 생각은 달라진다.
ㅡ (119쪽) 워크숍에서는 참가자와 진행자가 그날의 감상 경험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에는 참가자들이 “색에 관해 설명해도 괜찮나요?" 같은 질문을 많이 했다. 모리야마 씨는 시라토리 씨와 참가자들의 대화를 들으며 확신했다고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미술 감상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장애인 혹은 타인과 하는 소통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그래서 워크숍을 마친 다음 모리야마 씨는 “저희가 진행하는 자원봉사자 연수에 와주시지 않겠어요?"라고 시라토리 씨에게 제안했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시 제안의 목적이다. “눈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줄이려는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과 함께 작품을 보면 미술관 학예사, 그리고 눈이 보이는 감상자도 무언가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작품을 보는 방식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눈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일치하지는 않아요. 그런 인식의 엇갈림을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서로 대화하면서 보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것은 도움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이라는 관계를 뒤집는 새로운 발상이었다. ㅡ
ㅡ (405-406쪽) 영상 속의 호시노 씨는 예전에 참가했던 시각장애 관련 연수의 이야기를 했다. 그 연수에서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 안대를 쓰고 시각장애 모의 체험을 했다는데, 호시노 씨는 그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안대를 쓰면 일단 시각장애인처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연수가 끝나고 안대를 벗으면 다들 이렇게 말해. 와, 보인다, 보여. 보이는 건 역시 대단해! 그러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무슨 게임이라도 하면서 논 거냐고.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안대를 쓰는 건 정말이지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따지고 보면, 나는 겐의 머릿속에 억지로 들어가지 않아. 감각에도 개입하지 않아. 그저 가까이 다가갈 뿐이에요. 그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시각장애인의 마음이 되어본다는 시점에서 이미 틀려먹은 거야. 그 틀려먹은 생각이 세계를 뒤덮고 있어요.
그때 화면 바깥에 있는 나는 화면 속의 호시노 씨에게 반론을 하고 싶었다.
그래도 호시노 씨, 눈이 보이는 사람이 안대를 쓰고 지내보는 건 상상력을 발휘할 계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상상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니까 무언가 도와주는 방법이나 도구가 있어도 좋지 않아요? 그처럼 타인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힘이야말로 지금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엠퍼시 empathy' (공감력)라는 게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다른 사람이 직면한 어려움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지만. 화면 속의 호시노 씨는 이어서 내 반론을 강하게 부정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어. 심신이 피폐해져서 방 안에 틀어박힌 우울증 환자로도, ADHD인 사람으로도 될 수 없어. 시각장애인도 될 수 없고, 그 외에 누구도 우리는 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되어볼 수 없다고요! 될 수 없는데, 되자고 생각하는 천박한 생각만이 얄팍하게 폼을 잡는 그런 사회인 거예요. 지금의 사회는. 그래서 불쾌해!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나서서 되는대로 “와아아아!” 하고 싶은 거예요. 이 세계에서 웃고 싶어요.
우리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다.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다가 이해했다. 호시노 씨가 말한 것은 진실이었다. 그렇다, 필사적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상상해도, 우리는 결코 다른 누군가의 인생과 감각까지 체험할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볼 필요도 없었다. 괴로움도 기쁨도 모두 그 사람만의 것이다. 그러니 호시노 씨가 말하고 싶어 한 것은 상상력보다도 가까이 있는 부분이었다. 다가가는 것밖에 못할까? 아니, 그야 그렇지만, 다가간 다음에는?
이 세계에서 웃고 싶어요.
이 말이었다. 나는 어째서 시라토리 씨, 마이티와 함께 작품들을 보았을까. 최근 2년 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보면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 너머에 있었던 것은 작품이 잘 보인다든지, 새로운 발견을 한다든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감각과 머릿속을 상상하고 싶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으면서 웃는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끝까지 파고들면 모두 그 한마디로 집약된다.
화면 속의 호시노 씨는 싱글거리며 찹쌀떡을 또 한입 가득 물고 "알리오, 있잖아.”라고 나를 불렀다. 그 발음은 알리오 올리오와 같아서 내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림을 보는 활동 말이야. 확실히 하기 쉬워요.
하지만 그런 활동으로 그림을 보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해, 나도 겐지도. 그냥, 거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거죠.
나는 영상을 멈췄다. 응, 그 말대로다. ㅡ
둘. 새로운 미술감상법 – 대화
시라토리의 그림 감상법은 함께 간 사람들의 대화이다. 그들은 눈앞의 예술작품을 설명하고 그림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시라토리에게 그림을 보여준다. 그들의 대화는 때때로 길을 잃기도 하지만 시라토리와 ‘함께’ 한 미술 감상은 그들에게도 많은 깨달음의 시간이 되었다.
ㅡ(140쪽) 미토 예술관에서 워크숍을 기획한 모리야마 씨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길 바란다. 워크숍의 목적은 "눈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줄이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했는데,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이 함께 작품을 보는 행위의 목적은 작품의 이미지를 서로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이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실마리로 삼으면서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감상과 해석이 같지 않다고 해서 상대방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고, 그 덕에 내 내면의 바다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도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것을 다시 이야기하게 될지 모른다. 그날 우리가 그랬듯이. 이해하는 것, 모르는 것, 그 전부를 한데 아우르는 '대화'라는 여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ㅡ
ㅡ (399쪽) 돌아가는 신칸센에서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는 어째서 시라토리 씨와 함께 계속 작품을 보았을까? 처음에는 작품의 구석구석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내 눈의 '해상도'가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와 내가 '서로가 서로를 위한 보조장치가 된 것 같아서 재미있다.'라고 생각했다. 좀처럼 없는 기회이니 함께 더 작품을 보면 새로운 발견이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많은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시라토리 씨의 보이지 않는 눈을 통해 평소에는 안 보이는 것,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많은 것을 발견했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끊임없이 흔들리는 기억, 죽음의 순간, 차별과 우생 사상, 역사에서 지워진 목소리, 불상의 시선, 망각되는 꿈....
그 느긋한 여행의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시라토리 씨와 함께하는 미술 감상이라는 버스에 올라타 흘러가는 풍경을 같이 지켜보았다.ㅡ
셋. 예술을 감상하는 즐거움
이 책은 시라토리의 이야기이면서 예술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작품을 감상하면서 예술가의 창의성을 발견하고 그들의 철학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예술을 매개로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가 꽤나 진지하고 깊이가 있어서 읽는 맛이 난다. 특별한 인물인 시라토리가 함께 해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도 편견이겠지?
ㅡ(204쪽) 그러고 보니 붉은 귀신의 이마에서 찾은 세 번째 눈. 그 눈은 대체 무얼 보기 위해서 있을까? 혹시 우리가 세 번째 눈을 처음으로 발견한 걸까?
그럴 리 있겠느냐고 생각하며 집에 돌아와서 책을 찾아보니 "천 등귀 입상에는 두 개의 뿔과 세 개의 눈이 있으며"라고 쓰여 있었다. 역시 세기의 발견은 아니었다(실망). 하지만 세 번째 눈의 의미까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뭔가 불교적인 배경이 있을까 싶어 검색해보려 했지만, 바로 손을 멈췄다.
뭐, 답을 몰라도 상관없어.
다 함께 작품을 보는 목적은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시라토리 씨에게 답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아도 똑같이 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러면서 항상 '악'으로 치부해 왔던 귀신이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고 상상해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함께 작품을 보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한 걸음씩 뛰어넘으면, 우리는 새로운 '시선'을 획득한다. 그 결과 세계를 '두루두루 보는' 따뜻한 시선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316쪽) “가자마 작가의 '콘크리트 모음곡'은 개발과 경제 성장을 계속하는 것에 의문을 던졌어. 예를 들어 댐 건설은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쳤지만, 그 이면에서 잃어버린 것도 많아, 마을, 공동체, 생명. 그런데도 사회, 국가, 인간은 계속 성장해야 하는 걸까? 인생은 좋은 집에서 살거나 물건을 잔뜩 구입하는 게 전부가 아닐 텐데." 내 말에 시라토리 씨는 “맞아.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데.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어. 그래도 상관없잖아."라고 맞장구쳤다.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든지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건전한 바람이다. 하지만 거기서 나아가 더욱 ㅇㅇ해야 한다.' '나는 노력했으니까 당신도 노력해라.' '이게 상식이다.'라며 '자기만의 지론'을 타인과 사회 전체에 강요하면 차별과 단절이 일어나고 삶이 괴로워진다. 모든 사람은 다르게 마련이고, 달라도 상관없다. 서로 다른 타인, 타인과 다른 자신을 받아들이면 세계에는 '무지갯빛 눈'이 더욱 빨리 내릴 것이다.
"시라토리 씨는 그걸 깨닫고 무언가 변했어?"
“별로 극적으로 바뀐 건 없는데, 점점 시야가 넓어졌어. 사람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시라토리 씨의 시야가 넓어졌다는 말에 나는 고후쿠지에서 보았던 천수관음상을 떠올렸다.
8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천수관음은 현대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두루두루 본다.
넷. 에필로그 – 시라토리도 아리오도 지금, 행복하다!
(414쪽) (찻집에서 촬영한 장면)
(아리오) 있지, 시라토리 씨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야?
(시라토리) 행복하다고 느낄 때라 이야기가 통할 때지. 가령 처음 만난 사람들이 대화하다가 '나도 알아.'라든가 '맞아, 맞아!'라면서 서로 이해하고 사이가 무척 좋아지는 경우가 있잖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가치관 같은 게 통하면 저 사람이랑 이야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동시에 저 사람이 있어주어서 다행이라고, 나도 여기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아리오) 그럼 좀 추상적인 질문인데, 행복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경험 속에 있는지, 내 마음속인지.
(시라토리) 으음, 내게는 시간이네. 응, 시간 속에 있어.
(아리오) 시간 속에서 행복이 흐르는 거야?
(시라토리) 응, 시간 속에 있으니까 잡아둘 수는 없어. 그 뒤로는 그 경험을 내가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떠올렸을 때 확실한 일이라고 믿을 수 있는지가 문제일까.
행복을 느낀 시간을 그 뒤에도 믿을 수 있느냐.
인생은 황야다. 보름달이 환하게 어둠을 밝혀주는 날이 있는가 하면, 길에 버려진 자전거에 발이 걸려 흙탕물 웅덩이에 넘어지는 바람에 홀딱 젖어서 돌멩이를 걷어차고 싶은 날도 있다. 행복이 절정일 때는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생각하지만, 아름다움이란 대체로 오래가지 않는다. 나중에 이어지는 현실에서는 진저리 나는 일이 계속되며, 때로는 방문을 쾅 닫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발밑에 고인 흙탕물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고,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길바닥의 돌멩이 따위가 아니라고 믿을 것이다. 사람은 '시간'이라는 것에 저항할 수 없지만, '시간'을 보물로 삼을 수는 있으니까.
(생각해 볼거리)
1.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나 내용은?
2. 우리도 시라토리에게 그림을 보여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