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서 샤워를 하려 하는데 샤워부스에 샴푸 하나가 놓여 있다. 누가 자리를 맡아 놓았나 생각하다 샴푸병을 들어보니 비어 있는 것 같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샤워를 하는데 왠지 뒤통수가 당긴다.
'다 쓴 샴푸인 것 같아서 휴지통에 버렸어요. 샤워부스는 선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누군가 와서 따질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변명거리 ㅡ 반박거리를 찾고 있는 내가 보인다. 결국은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아파트 앞에서 복숭아를 샀다. 지난번에 샀던 말랑복숭아가 가격도 좋고 맛도 있어서 다시 구매한 것인데 이번에는 딱딱 복숭아이고 가격도 지난번의 두 배였다. 그래도 딱복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크기도 커서 흔쾌히 구매했다.
"하루 숙성시켰다가 김치냉장고 아닌 그냥 냉장고에, 지퍼백에 넣어서 보관하세요. 그럼 오래 먹을 수 있어요."
제법 전문가스러운 그 말투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복숭아를 냉장고에 넣으려고 비닐봉지에서 꺼내 보니 13개 구입했는데 5개나 썩어 있었다. 어제 구매할 때는 말짱했는데 오늘 이상태인걸 보니 아저씨가 파지를 가져다 정품인양 팔았나 하는 의심이 들면서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가져가서 따져야 하나 했는데 길거리장사니 오늘 나왔는지 모르겠고 바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라 가지고 나갔다가 낭패 볼 수도 있어서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다듬어 일부는 먹고 일부는 통에 보관하였다.
짐을 다 실어 놓고 차에서 마실 커피를 사러 가는데 마침 아저씨가 나와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5개나 썩었다고 하면 믿을까? 사진이라도 찍어놨어야 하는데 그것도 생각 못했네. 안 들어주더라도 좋지 않은 물건을 팔았다는 것은 알리는 게 맞지.
거절당할 게 뻔하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사장님에게 다가갔다.
"혹시 아셨는가 모르겠는데요, 어제 사간 복숭아가 상태가 안 좋더라고요. 하루 지났는데 13개 중 5개가 썩었어요."
"아뇨. 몰랐어요. 그럼 4개 정도 다시 드리면 될까요? 화내지 마세요."
네? 당연히 자신을 옹호할 것이라는 생각에 잔뜩 긴장했는데 쉽게 인정하고 나의 감정까지 살펴주는 아저씨의 태도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황스러워할 말을 잊었다. 담아주는 복숭아를 받아 들고 고맙다는 인사만 남기고 어정쩡하게 돌아섰다.
화내지 마세요.
돌아오는 길에 아저씨의 이 말이 자꾸 떠오르면서 스멀스멀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아저씨의 부정적인 반응을 만들어놓고 경계를 하며 잔뜩 날을 세웠던 나의 모습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소소한 걸로 서운함을 느껴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친구였다. 친구의 잘못이라고 곱씹으며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을 합리화하면서도 머리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게 계속 화를 내고 있는 상황.
그런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그것 또한 내가 만들어낸 나의 감정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질 마음조차 없었던 복숭아장수 아저씨를 지레 경계한 것처럼.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의 근황을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와글거리던 머릿속이 정리되며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진작 할걸......
화내지 마세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자주 올라오는 요즘,
방어태세는 내 마음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