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책숲서점> 사장님과의 인터뷰
인터뷰 초본을 보여드리자, 책방지기 님이 딱 한 가지를 수정요청해 주셨다.
"작가님. 저는 '사장님'보다는 '책방지기'라는 표현이 좋아요."
호칭 하나 수정했을 뿐인데, 다소 딱딱했던 인터뷰 톤이 친근해졌다. 실제로도 책방지기 님은 사장님보다는 '책방지기'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멀리서 달려온 나를 인자한 미소로 반겨주시며, 나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셨다. 덕분에 나도 마음을 활짝 열고 내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었다. 문경에서 운영 중인 '책숲서점'은 책방지기 님의 손길을 고스란히 느껴지는 재밌는 공간이었다. 작은 공간에서 초면인 책방지기 님과 3시간을 내리 떠들 수 있었던 건, 아마도 3가지 덕분이다.
여행, 서점, 그림.
책방지기 님만의 3가지 이야기를 인터뷰로 알아보자.
책방지기
(물을 내어주시며) 옛 제주도민이 내어주는 제주물. 삼다수.(웃음)
지은심
제주도민이셨어요?
책방지기
제주도에서 33년을 살다가 문경으로 왔어요.
지은심
문경으로 와보니 어떠셨어요?
책방지기
백수니깐 어디에 살아도 편안해요.
지은심
근데 제주도에서의 생활이 더 여행 같지 않나요?
책방지기
제주도 살 때도 주로 혼자 걷는 걸 좋아해서 올레길을 매일 걸었어요. 한라산도 혼자 올라갔어요. 우리 아저씨 별로 안 좋아해서. 제주도 여행 33년 차라고 해요. 33년을 살아도 늘 이방인처럼 여행객처럼 살았어요.
지금도 일상을 여행처럼 새롭게 느끼려고 노력해요. 우리가 여행 가는 이유가 그거잖아요.
여행 갔다가 새로워진 눈으로 다시 와서 내 일상을 보면 또 새롭게 보여요.
한동안은 무뎌지다가 또 어디론가 가고 싶으면 떠나고 그래요.
지은심
한라산이요? 저는 한라산 다 같이 가도 엄청 힘들었어요.
책방지기
사람들이 많이 가잖아요. 옆에 등산객들이 많으니까 무섭지는 않았어요.
지은심
근데 한라산 혼자 가셨으면 제주도에선 안 가본 데가 없겠어요.
책방지기
주로 올레길만 다녔어요. 문경으로 이사 온 이후에는 여행자의 입장으로 한번 올레를 한 바퀴 다 돌아보고 싶어서 다시 제주도로 여행 갔어요. 다르더라고요. 전에는 늘 종점에 갔다가 다시 집에 왔다가 그다음 주에 또다시 지난번 주에 갔던 시작점에 가서 다시 걷고 그랬잖아요. 이번에는 배낭을 메고 가서 걷고 그 끝에 숙소를 구해서 자고 그 다음날 아침에 또 걷고 진짜 여행객이 된 거죠.
지은심
원정 글방을 신청해 주신 계기가 있을까요? 낯선 사람인데 이렇게 선뜻 초대하기가 조심스러울 것 같은데 신기해요.
책방지기
작가님이 올린 게시글에서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어요.
쓰기 위해서 쓰면 일기고 읽히기 위해 쓰는 글이 수필이고 산문이라는 문장이요. 그래서 믿을 만하다 싶었어요. 기대되어요.
지은심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식은땀)
먼저 고백하자면, 첫 책은 운이 너무 좋았어요. 브런치에 글 쓴 지 한 달도 안 됐을 무렵에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다들 책을 이렇게 쉽게 내는구나 싶어서 자만했어요. 지금이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더 있는 편이지만 출판 기회가 쉽게 오지 않더라고요.
책방지기
그런데도 계속하시는 이유는요?
지은심
글쓰기로 이어지는 새로운 인연이 재밌더라고요. 제가 문경 시골에 와서 이렇게 사장님과 대화할 줄은 예상 못 했어요. 어제도 사장님과 대화할 생각 하니깐 신나서 잠이 잘 안 왔어요.
책방지기
그렇네. 문경 가서 어떤 백발의 할머니와 대화했다고 하면 재밌잖아요. 저도 오늘 이렇게 젊은 작가님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예뻐서.
지은심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공간도 독특해요.
책방지기
옛날에 흙을 막 즙 넣고 짓이겨서 쌓아 올린 집이에요. 벽에 각이 없어서 동글동글해요. 동네 아저씨 말로는 이 집 지은 게 150년 됐다고 하더라고요.
지은심
책을 많이 좋아하셨나 봐요.
책방지기
그런 마음은 항상 있었죠. 문학소녀. 옛날에는 책이 별로 없는 환경에서 컸기 때문에 신문 쪼가리라도 있으면 보고 그랬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막살기 바쁘고 이러니까 드문드문 읽은 게 전부예요.
대신, 서점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항상 품고 있어요. 그러다 도시재생 지원 사업의 좋은 기회로 점촌 시내에서 공간을 열 수 있었어요. 이제 그 지원 기간이 끝나고 굳이 시내에 있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서 시골로 옮기게 되었어요. 오히려 좋더라고요. 마당도 있고 텃밭도 있고.
지은심
저도 이런 분위기를 굉장히 좋아해요.
책방지기
아마 전국에서 제일 작은 책방이지 않을까 싶어요. 옮기면서 책방 이름도 바꿨어요. 시내에 있을 때는 가게 이름이 ‘여행’이었거든요. 옛날에 ‘국제 서점’이라는 자주 가는 책방이 있었는데 한자로는 글 서(書)에 수풀 림(林)이거든요. 그걸 한글로 바꾼 이름이 지금 ‘책숲서점’이에요. 10분 만에 후다닥 지었어요.
지은심
고민은 최대한 가볍게, 추진력은 최대한 빠르게 하시네요.
책방지기
머릿속에 생각을 여러 방면으로 굴리는 건 똑같아요. 근데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은 잠깐이잖아요. 그럴 때는 입에서 나오면 그냥 끝인 거지.
지은심
저는 그 결정하기까지가 진짜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 시간을 빨리 줄이는 게 덜 피곤하잖아요. 쉽지 않더라고요. 제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고민해 보겠습니다.’에요.
책방지기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마음이 가는 쪽이 있잖아요. 이렇게 하면 어려움도 있을 것 같고 저것 때문에 안 될 것 같은데 그런데도 자꾸 한쪽으로 마음이 기운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해보는 거야. 마음이 가는 쪽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손해만큼 상쇄해 줄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지은심
동네에서 ‘책숲서점’은 어떤 곳이에요?
책방지기
그냥 지나가다가 여기가 뭐지 하고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은 아직은 아니에요. 입구에 안내판도 없어요. 이사하고 택배로 책을 주문하니까 기사님에게 전화가 왔어요. ‘이 시골에 무슨 서점이 있어요?’ 다들 잘못 쓴 거로 생각하더라고요.
지은심
책방 열기를 잘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을까요?
책방지기
손님이 앉아서 고요하게 혼자 책 읽는 걸 볼 때 그렇게 뿌듯하더라고요.
지은심
책방 사장님들이 모두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꾸린 공간 안에 누군가 책을 읽고 있으면 그것만큼 뿌듯한 게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책방지기
이제 사람들이 생각만큼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게 좀 안타까워요.
지은심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공책을 가리키며) 저 공책들도 갑자기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책방지기
아 그림일기요? ‘어반스케치’라고도 해요. 당뇨가 생기면서 운동 삼아 올레길을 걷는데 앉아서 쉴 때 멍하니 그냥 있기가 심심했어요. 누가 한번 권해보길래 시작했는데 재밌어요.
2018년에 그린 첫 그림을 이렇게 모셔놓았어요. 제일 애착이 가서. 언덕 위에서 바라본 바닷가 마을이에요. 이 그림을 보면 그날 아침의 모든 것들이 기억이 되살아나요. 풍경뿐만이 아니라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아침 햇살 바람결 이런 것들이 다 생각나요. 그림을 매개로 해서 그날이 소환되는 거지.
지은심
한번 해보고 싶은데 똥손이라서...
책방지기
다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림은 이걸 누구한테 보여줄 그게 아니고 그냥 내 일기처럼 생각하면 되어요. 잘못 그린 그림은 없어요. 백지에 뭐부터 그려야 될지 모를 때는 일단 선을 하나 과감하게 그어요. 그 선이 땅일 수도 있고 수평선일 수도 있고 내 앞에 있는 의자 뒤꿈치일 수도 있고 거기서부터 밑으로 한번 그어볼까 위로 가볼까 나아가는 거예요.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나를 기차역에 데려다주시는 길에 전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떠올랐다.
"책방지기 님 연령대의 어른들을 볼 때면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 같아요. 한 가지는 얼른 책방지기 님처럼 인자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갖고 싶어 조바심도 나고요. 동시에 안도감도 들어요. 소소하고 고요하게 살아도 행복하고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어요."
책방지기 님은 내 등을 살짝 쓰다듬어 주셨다.
"그럼요. 무엇보다 조바심 가질 필요 없어요.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