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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Dec 12. 2024

손과 마음

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어릴 때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면 언제나 집 뒤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그곳엔 아버지가 집을 구석구석 손질할 때 쓰시던 각종 공구와 나무, 모래 더미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모래와 자투리 목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TV에서 본 모래시계도 만들어 보고, 물을 부어 작은 성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놀다 보면 걱정도 시간도 잊을 수 있었다. 밥 먹으라는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서야 날이 이미 어둑해졌다는 걸 알았다. 그때는 창고 안의 공간과 시간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유도 모른 채 환경에 따라 반사적으로 적응하며 살던 어린 나이었다.


   우리 집 딸이 그때의 내 나이가 되어서야 창고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라는 거울로 내 모습을 조금씩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어느 날, 거실은 아이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모아 놓은 택배 박스를 버린 것이 문제였다. 내 어린 시절엔 그런 박스도 귀했을뿐더러, 집안에서 그걸로 뭘 만들어 볼 생각도 못 했다. 더욱이 요즘은 마당에 창고까지 있는 집이 귀하다 보니, 커가는 아이들의 공간에 대해 더 무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아이는 택배 박스를 이용해 거실에 집을 만들었다. 테이프를 누덕누덕 뜯어 붙인 집은 누가 봐도 조악했지만, 아이가 그곳으로 들어가자 인형들과 장난감들도 같이 기어들어 갔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는 그곳에서 꼼지락거리다가 고개를 내밀며 배시시 웃는다. 레고 블록으로 만든 멋진 소방차와, 도화지를 오려 만든 종이 인형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버려진 목재가 다시 눈에 들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도 만들기를 다시 해 보고 싶었다. 자투리 목재를 모아다 작은 신발장과 소품 상자, 욕실에서 쓸 의자를 만들어 놓고 보니, 우리 집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칭찬이란 걸 해 주었다. 그런 칭찬은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다. 흥이 났는지 목재상에 들락거렸고, 반나절 내내 공구상에서 공구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세상에,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다니.’ 볼수록 신기한 공구를 만지작거리며 감탄하다 보면 어느새 아내에게 전화가 온다.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어요?’


   우연한 기회에 경험한 도자기 체험도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취미이자 재미가 되었다. 구경하러 갔다가 그냥 한 번만 해 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찻잔을 만들었는데, 도자기 선생님은 칭찬을 연발하시며 나를 구름 위로 붕 띄워주셨다. 말도 안 되는 칭찬이라 괜히 그러는지 뻔히 알면서도, 칭찬 한 번 더 듣고 싶은 아이 같은 마음에 한 번만 더 찾아가 보기로 했다. 울퉁불퉁, 못생긴 컵이 나왔는데도 애초에 도예를 전공했어야 했다며 있는 칭찬 없는 칭찬을 해 주셨다. 선생님은 평생 도자기를 빚더니 이제는 사람 마음마저 빚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할 때는 설렘과 긴장이 안개처럼 가득하여 나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었다. 차츰 안개가 걷힐 때가 되어서야 손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으로 뭔가 만들면 그 움직임이 마음으로 전해지고, 손을 따라 마음도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손을 움직이면 조용한 음악을 들을 때처럼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린 시절 불안한 마음이 들면, 늘 모래놀이를 하러 창고에 간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놀이를 한다고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그로 인해 일어난 잡념과 고민의 먼지가 걷히는 것 같다. 시야가 맑아지면 실마리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어제, 오늘 심란한 마음이 들어 뭐라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를 열고 며칠 전 사둔 생강을 꺼냈다. 흙을 털고 물로 깨끗하게 씻어내니 생강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최대한 얇게 썰어보려고 칼날을 조심스럽게 생강 위에 올린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인데도 슬라이스로 얇게 썰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갔다. 팔에 힘을 빼고 천천히 칼질을 하니 시간도 잘 가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사실 그렇게 생강을 썰기로 한 건 며칠 전 TV에서 본 요리 경연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첫 번째 미션이 양파 썰기였다. 참가자들에게 평가 기준을 알려주지도 않고 무조건 양파를 썰어보라고 한다. 능숙한 사람은 눈으로 보지도 않고 칼질을 하는데 기계보다 더 빠른 것 같다. 어떤 이는 처음 해 보는지 서툴기 그지없었고, 어떤 이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는지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다행히 더 빨리, 더 많이 썬 사람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는 않았다. 평가자로 나온 선배 요리사들은 재료를 손질할 때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그 태도를 보고 있었다. 요리의 시작이라 그럴까? 재료를 써는 일은 솔직히 귀찮다. 후딱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정성을 다해 보려고 했다. 평소보다 더 깨끗이 씻고, 껍질도 잘 다듬고, 즙이 잘 우러나기를 바라며 칼날을 부드럽게 대고 천천히 잘랐다. 생강 슬라이스가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어린 시절 모래놀이의 추억, 대패로 나무를 깎을 때 나는 향기, 물레를 돌리며 느끼는 흙의 부드러운 감촉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역시, 12월 바람은 매섭다. 톱밥을 풀풀 날리며 톱질을 하려니 환기하기가 무섭고, 이 날씨에 그릇을 만든다고 공방까지 가서 도예 용품들을 꺼내기도 번잡스럽다. 이럴 땐 그저 식재료 써는 일이나 해야겠다. 오늘은 생강이라도 있었으니 다행이다. 그게 없었으면 나도 양파를 썰뻔했다. 유리병 속에 생강을 담고, 올봄에 사둔 아카시아 꿀을 부었다. 생강 슬라이스 사이에 있던 공기가 꿀 위로 뽀글뽀글 올라온다. 꿀과 생강, 이제부터는 너희들의 시간이야. 사이좋게 지내. 어느 추운 겨울밤, 생강 꿀차를 마시는 상상을 하며 병을 냉장고에 넣었다. 어디선가 레몬 생강차를 맛본 기억이 나는데, 내일은 레몬을 사다가 썰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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