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나라 고등학생들은 정말 그렇게 잠을 못 자냐?” 미국인 친구가 궁금하다며 물어본 적이 있다. 처음부터 물어보는 의도를 대충 알 것 같았다. <믿거나 말거나>라는 오래된 미국 TV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한국 고등학생들은 새벽에 학교에 가서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다는데 그게 사실이냐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럴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이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나 보다. 왜 그래야 하느냐, 너도 그랬냐 등등 질문이 쏟아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교문을 나오며 내 평생에 그쪽은 쳐다도 안 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후련함이 군대 전역하는 날보다 더 큰 것 같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보다는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자조 섞인 말을 주고받던 때였다. 요즘은 강제로 야간자율학습을 시키는 학교가 없지만, 그때는 ‘야자’가 필수였고, 밤마다 감독 선생님 몰래 이른바 개구멍이라는 곳으로 도망 나갔다가 라면 한 그릇을 사 먹고 들어오는 게 최소한의 반항이라면 반항이었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척하며 무협 소설을 쓰고 있던 친구는 매일 몇 명씩 구독자 수를 늘려갔고, 연재 번호가 붙은 종이 한 장을 이 반 저 반 돌리며 킥킥거리며 웃는 것도 작은 반항 축에 들어갔다. 미국인 친구는 구구절절 내 얘기를 듣더니 “와우”, “언빌리버블”, “리얼리”를 외치며 미국인 특유의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상황이 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속이 숯덩이처럼 타들어 가는 수험생들의 이야기는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믿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100미터 앞에 의자는 하나인데 출발선에 있는 사람들은 100명이다. 그런데 모두 같은 출발선에 있는 게 아니다. 말이 100미터 전이지, 어떤 사람은 그 보다 훨씬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은 200미터쯤 뒤에 서있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밤낮없는 경쟁이 시작된다. 주최 측에서는 퀴즈를 내고 사람들은 답을 맞춰야 의자를 향해 한 발짝 나갈 수 있다. 밤에 충분히 잠이라도 자면 이미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 있다. 초반에 너무 많은 사람을 떨어뜨리면 재미가 떨어질까 봐 주최 측은 적절히 수를 조정하면서 퀴즈를 준비한다. 막바지에 가면 너무 많은 사람이 답을 맞힐까 봐 아예 선착순 줄 세우기를 하고 2등부터는 모두 떨어뜨린다. 떨어진 사람들은 흩어졌다가 내년이 되면 다시 모인다. 사람들은 가끔 항의를 하지만, 주최 측에서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으니 안타깝긴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할 뿐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각종 경연대회 프로그램을 닮았다.
『돈키호테』가 생각났다. 자신이 진정한 기사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중년의 한 귀족이 펼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읽다 보면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어느날 돈키호테는 비단을 거래하는 한 무리의 상인들을 만난다. 옳거니. 그는 이제 자신의 용기를 자랑할 기회가 왔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여봐라. 모두 지금 있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마라. 만약에 이 세상에 라 만차의 여제, 둘시네아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어리둥절한 사람들은 남자가 미쳤다고 단번에 알아보고 원하는 말을 다 해주겠다며 둘시네아를 조롱한다. 화가 난 돈키호테가 조롱한 사람에게 달려들려고 할 때 그의 말 로시난테는 비틀거리며 넘어졌고, 그는 말에서 굴러떨어져 일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도망치지 마라! 이 비겁한 자들아!” 그는 세상을 향해 외친다.
돈키호테의 내적 세계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외부 세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이다. 그의 내면은 온통 비극이고, 구경꾼들의 입장에서는 희극이다. 독자는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교차하는 감정을 느끼며 잠시 씁쓸해하지만, 곧 웃기 시작한다. 독자도 여전히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믿거나 말거나>의 얘기를 들으며 “언빌리버블”이라고 말하는 순간과 비슷하다면 비약일까?
고등학교 수험생이었을 시절, 나는 내 자신을 돈키호테라고 상상하며 지냈다. 보통은 무모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을 빗대어 돈키호테 같다고 하지만, 나를 장터의 웃음거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 상황이 코미디고, 나는 그저 코미디 같은 연극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새벽 별 보며 등교하고, 온종일 감옥 같은 학교에서 경쟁하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이런 지옥 같은 생활을 견디려면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월터 커(Walter Kerr)는 『비극과 희극』에서 희극이란 “즐겁게 만든 신음”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첫 번째 충동은 울음이고, 그다음이 웃음이므로 희극이 있으려면 비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걸 거부하고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산다면 비극으로 끝날 수 있겠지만, 100등이 되더라도 나는 내 인생을 희극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거기, 뭐 하는 거야? 그 종이 이리 가져와.”
몽둥이를 든 자습 감독 선생님은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책상을 치며 무서운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주인공은 10년간 스승님께 갖은 고초를 겪으며 무술과 권법을 배웠고, 어느날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서 적국의 소굴로 들어갔다.
“이거 누가 썼어? 다음 편도 좀 가져와 봐.”
적막한 교실은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다. 얼굴이 세모처럼 생겼다고 세모작가라고 불렸던 친구. 그 친구야말로 진정한 돈키호테였다. 그 무협 소설을 끝내지도 않고 졸업하였는데, 지금은 다 썼겠지? 요즘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때 미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금쯤 무협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