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흔드는 사람들 - 월트 휘트먼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항상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비가 살짝 오는 날, 카페 창가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는 것. 이런 대답을 하면 어이없다는 반응이 많다. 그게 아니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다시 물어온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고 싶냐는 물음이든, 취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든 관계없이, 나는 그저 그런 날씨를 좋아하고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고 창밖으로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알 수가 없지만,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좋아하는 걸 가까이 두고 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을까.
카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누군가는 말하고 누군가는 듣는다. 함께 웃고, 함께 고민한다. 하나의 주제로 결말까지 이어지는 긴 줄기의 이야기도 있고, 두서없이 나뉜 이야기가 긴 멈춤의 시간 속에 짤막하게 이어지기도 한다. 책장을 넘길 수도 있다.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불규칙한 종이 소리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닮았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릴 수도 있다. 빠른 속도로 연타를 하다가도 부드러워지고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의 속도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시간이다. 창밖을 멍하니 볼 수도 있다. 뛰거나 걷는 사람, 멈추어 있는 사람.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며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아이를 업은 사람, 손을 잡은 사람, 때로는 마주 보고 아무 말 없이 눈싸움을 하는 사람들…. 창밖에는 모든 장르의 이야기가 있다. 나에게는 그곳이 책이고 노트북이다.
풀잎의 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 「크로싱 브루클린 페리」(Crossing Brooklyn Ferry)는 그런 이유로 나에게 소중하다. 시에서 그는 배를 타고 뉴욕 맨해튼과 브루클린 사이를 흐르는 강을 건너고 있다. 태양은 서쪽 하늘에서 뉘엿뉘엿 질 준비를 하고, 배에 탄 사람들은 평소처럼 집으로 혹은 일터로 간다. 어떤 사람은 문을 열고 배 안으로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난간에 기대어 흐르는 물결을 구경하고, 어떤 사람은 맨해튼을, 어떤 사람은 브루클린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오가는 배들의 돛을 바라보는 사람들, 하늘에 떠 있는 갈매기를 보는 사람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브루클린에 살았던 시인은 이 배를 수없이 탔을 것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을 해야 했다. 인쇄소, 출판사, 언론사를 드나들며 뉴욕 일대에서 살아갔다.
누군가 그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해 질 무렵 브루클린 페리를 타고 강을 건너며 세상을 바라보는 것.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어릴 때 아버지의 사업은 실패했고, 일하는 인쇄공장은 불이 났고, 경제 불황과 남북전쟁의 고통이 가족의 삶을 쓸고 지나갔다. 인쇄공, 기자, 교사, 출판업자, 언론인, 시인, 소설가, 간호사, 하급 공무원…. 19세 중반 격변의 시대만큼이나 다양한 일을 했지만, 하루를 마칠 무렵, 붉은 노을 아래 브루클린으로 향하는 배를 탄 시간이 가장 행복하지 않았을까.
나는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삶은 분명 특별하리라 생각하곤 했다. 나와 다른 곳을 가고, 나와 다른 일을 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그들은 분명 특별했다. 그들이 가진 삶의 작은 조각을 관찰하며 퍼즐을 맞추어 보는 것은 또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하지만 시인 휘트먼은 이런 나를 흔들어 깨운다. 시인은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지만, 거꾸로 그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듯이, 저들도 카페 안의 나를 보며 내 삶을 상상하고 있음을 나는 왜 알지 못했을까. 시인은 이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대들도 내게 호기심이 있을 터인데, 나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네.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을 나도 똑같이 보고 있어. 하늘과 햇빛, 안개와 증기, 배와 돛, 갈매기와 물결. 나도 그대들처럼 길을 걷다가, 혹은 침대에 누웠다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한다네.
당신들처럼 나도 인색하고, 교활하고, 탐욕과 허영심에 얽매여 살고 있어. 유명한 배우들이 지나가면 나도 뒤돌아 보고 말이야. 나는 그대들의 삶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대들도 나의 삶이 궁금하겠지만, 사실 나와 당신, 그리고 나머지 모든 이들도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야. 아마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이런 모습들은 변하지 않을 거야. 우리가 없어져도 수백 년 뒤,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살면 돼. 힘차게 강을 건너고, 질문과 답을 던지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영원을 향해 우리 각자의 역할을 하면 되는 거야.
시인의 시에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없다. 부러움도 갈망도 없다. 모두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저 자신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고 외치는 듯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거라며 세대를 초월해 이야기한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리고 저 멀리 어느 곳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똑같이 흘러갈 거라며 나를 가둔 테두리를 뛰어넘는다. 두 세대를 훌쩍 넘어, 미국과 한국이라는 먼 거리를 넘어, 그와 나 사이에 있는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 그는 내 옆에서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제 하루, 친구와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출반 전에 부지런히 커피를 내려서 텀블러 두 개에 담았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차창 밖은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축제를 벌이는 듯하다. 눈 덮인 논밭 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 좁은 국도 옆에 수북이 쌓인 눈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 도로 위 찬 공기를 가르는 바람 소리, 물웅덩이 위를 지나는 자동차 바퀴 소리. 특별한 목적이 없는 여행은 차창 밖 풍경과 소리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이렇게 움직이는 카페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창밖의 설경과 함께 흘러갔다.
국도변 전봇대에 걸려 있는 사과 농장 현수막도 이야기를 거들었다. 그 옆으로 펼쳐진 드넓은 사과밭보다 몇십 배는 큰 땅을 가진 어느 부자의 이야기, 부자이긴 하지만 상속과 소송 문제로 걱정 속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 사과 농사가 너무 힘들어서 사과 대신 콩을 심었다는 어느 과수원 아주머니 이야기,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자락 아래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삼촌의 이야기, 그리고 다시 지난여름 복숭아를 함께 나누어 먹었던 우리들의 이야기…. 그들과 우리의 이야기는 물결이 퍼지듯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그렇게 나의 하루에 그들의 하루가 하나씩 담겼다. 때로는 생각한 대로,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렇게 모두의 삶은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휘트먼의 시가 생각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