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흔드는 사람들 - 페데리고와 조반나
나중에 누구와 결혼하고 싶냐는 물음에 친구는 별 고민 없이 자기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여러 사람을 놓고 사랑을 테스트해서 가장 우수한 사람을 뽑겠다는 말일까? 그건 좀 이상하지 않냐고 옆에 있는 또 다른 친구에게 물었더니,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 오히려 그 말을 두둔하였다. 나는 반박하였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나보거나, 한 사람씩 만나더라도 길게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하였다. 더군다나 숫자로 계량화할 수도 없는 사랑을 무슨 기준으로 측정할수 있다는 말인가.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해서 나에게 가장 유리한 사람을 택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나의 말에 친구도 가만있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해야 하는 건데,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비교하는 게 뭐가 잘못됐냐. 그리고 기왕이면 나를 가장 아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게 더 좋은 거 아니냐. 대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연애에 관심이 많았던 20대 초,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어느 날,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이 없던 우리들의 대화는 그렇게 겉돌고 있었다.
14세기 중반, 중세가 저물어가는 이탈리아의 20대 젊은이들은 사랑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 보카치오의『데카메론』은 열 명의 젊은 남녀가 열흘 동안 하루에 하나씩 소개하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가 모두 백 가지다. 흑사병이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가던 때, 일곱 명의 여성과 세 명의 남성은 전염병을 피해 시골 별장으로 간다. 그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참으로 인간적이다. 탐욕과 갈등, 모험과 방탕, 비극과 행복, 속임수와 어리석음,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역시 사랑이 있다.
그중 다섯 번째 날에 펼쳐진 아홉 번째 이야기. 페데리고와 조반나의 이야기다. 무예나 예의에서 칭송을 받고 있던 귀족 청년 페데리고는 피렌체에서 가장 우아하다고 이름난 조반나 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각종 무술 대회를 열고 연회를 베풀었으나 결국 모든 재산을 헛되이 써버리고, 시골의 작은 농장 하나와 매 한 마리가 남게 된다. 조반나는 남편이 병으로 죽고 나서 아들과 함께 시골로 여름휴가를 떠나게 되는데, 그곳이 마침 페데리고의 농장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페데리고와 친한 친구가 되고, 그의 매로 사냥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은 병에 걸린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다 해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에 아들은 페데리고의 매를 갖고 싶다고 말한다. 페데리고가 자신을 위해 모든 재산을 탕진한 걸 알고 있는 조반나는 아들을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에게 찾아가 함께 식사를 하자고 청한다. 그는 매우 기뻤지만, 너무 가난해서 대접할 만한 것이 매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매를 그렇게 식탁에 올린다. 식사를 하면서 조반나는 방문의 진짜 목적을 말했지만, 매는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페데리고는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게 되고, 조반나의 아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조반나는 페데리고의 고귀함에 마음이 움직여 그와 결혼한다.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지만, 이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많이 남는 이유는 남녀 간의 사랑과 동시에 자식에 대한 사랑이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종류는 다르지만 두 사랑은 많이 닮았다. 페데리고가 모든 재산을 썼다는 건 인생 경험이 부족한 청년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초점이 오로지 물질적인 것에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질 정도로 온 마음과 정성 다했다는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한 남자에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지막 남은 매를 달라고 청할 수 있는 용기는 또 어떨까. 아픈 아들이 굳이 매를 갖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의 구성이 다소 억지스럽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자식을 위한 부모의 사랑이 상상을 넘어 현실이 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백 가지나 되는 『데카메론』 속 이야기 중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고, 갈등하고,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등장인물들은 조금이라도 손해보려 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 더 받아내려 하고, 자기 것을 다 먹고도 남의 것을 먹고 싶어 한다. 그러니 페데리고와 조반나의 이야기는 유독 돋보인다. 사랑이란 내 것을, 그것이 아무리 귀하더라도, 기꺼이 떼어 줄 수 있는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더욱 빛나 보인다.
관계가 어지럽게 헝클어져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던 때, 늘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학창 시절 스승님이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항상 두 개 사서 하나는 그 사람에게 줘. 싫다고 하면 좀 뒀다가 다시 주고. 그래도 싫다고 하면 네가 먹으면 돼.”
이렇게 쉽고 명쾌한 설명이 또 있을까. 그 말씀을 듣자마자 나는 아차 싶었다. 그때 나는 상대에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상대방이 원망스럽고 나는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고귀한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관계는 받으려 할 때 보다 주려고 할 때 잘 풀린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먹을 것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수고로움을 기꺼이 나누는 것, 그것이 배려이고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 그러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제일 사랑해 주는 사람 사이에서 우스운 논쟁을 하던 20대의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빼놓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요즘 TV에서 데이팅 프로그램이 인기다. 출연자들은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상대방을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느라 마음이 늘 분주하다. 저는 이런 사람인데 이것에 맞출 수 있나요? 이건 좋은데 저건 좀 그러네요. 처음엔 마음에 들었는데 갈수록 아닌 것 같아요. 저분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포기할 수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분이 다른 분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 미묘한 마음이 얽히고설켜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기쁨과 슬픔이 시시각각 교차한다. 그들이 던진 한 마디에 내 마음도 찌릿한 것은 TV 속 그곳이 우리 삶의 축소판 같기 때문이다. 『데카메론』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복잡하게 뒤얽힌 운명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나 보다. 그것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거부할 수 없는 평범한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