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면 옷깃을 여미듯이...

이상한 나라의 팀장 20, 외부에서 괴롭히면 똘똘 뭉칩니다.

이솝 우화 '바람과 해님'을 아시나요?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실 것 같아서 잠시 적어봤습니다.

이솝 우화 중 하나로 원제는 보레아스와 헬리오스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북풍의 신과 태양의 신의 이름을 모티브로 지어졌으나 각색을 거쳐서 오늘날의 '북풍과 태양(바람과 해님)'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북풍의 신 보레아스와 태양의 신 헬리오스가 서로 자신이 강하다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길을 걸어가는 한 나그네를 본 이 들은 누가 먼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지 내기를 걸었습니다. 먼저 보레아스(북풍)가 힘껏 센 북풍을 불어서 외투를 날려버리려 했으나, 나그네는 오히려 외투가 날아갈까 봐 옷을 꽁꽁 여몄습니다. 보레아스는 점점 바람의 강도를 높였으나 나그네는 더 옷을 꽁꽁 여몄고 기운이 빠진 보레아스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헬리오스(해님)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따뜻한 손길로 나그네의 등을 어루만졌고, 나그네는 바람으로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폈습니다. 헬리오스가 조금씩 조금씩 뜨거운 햇빛을 나그네에게 쨍쨍 내리쬐니 결국 나그네는 더위를 참지 못하고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벗어던진 뒤 근처 강으로 뛰어들어 멱을 감았고, 결국 태양이 북풍을 이겼다는 내용입니다.


외부의 수많은 적들

이 처럼 팀 외부에서 강한 북풍이 불면, 추위를 견디기 위해 똘똘 뭉쳐서 서로의 채온으로 추위를 이기기도 합니다. 마치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이 허들링(Huddling) ¹ 대열을 만들어 추운 바람으로부터 열의 손실을 막듯이 말입니다.

¹ 황제펭귄들이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동그랗게 한데 모여서 겹겹이 몸을 밀착시킴으로써 서로의 체온으로 -50℃ 이하로 떨어지는 추위를 견디는 독특한 방법을 말합니다.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최고경영층을 이름 대신 숫자를 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희 팀은 2-1로부터 오더를 받아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야 새로운 시스템이지 이미 미국에서는 실제 적용하고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고, 현지에서 벤치마킹도 한 후에야 시작된 프로젝트이니 나름 검증은 된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의 땅덩어리가 워낙 크게 차이(미국이 한국의 약 44.5배가 큼)가 나다 보니, 일부에서는 미국식 교육 시스템의 도입을 크게 반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팀에 새롭게 합류한 팀의 일원으로서 봐도, 좁은 한국에 도입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살짝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2-1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으신 저희 부사장님은 적극적인 추진을 계속 독려하셨고, 반대쪽인 사장님은 대놓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뒤에서 딴지를 거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반대쪽인 사장님 휘하에는 우리의 손발을 옭아맬 수 있는 '재경/총무/인사/관제/IT' 등 거의 모든 부문이 포진하고 있어, 매 순간이 마치 알래스카 베링해의 폭풍 속을 헤쳐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폭탄 돌리기

그런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보고하는 과정에서 보니, 실제 업무를 수행할 인원이 필요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장 본부 내에서는 인원 확보가 어렵다 보니, 타 본부 및 그룹사에 까지 인원 지원을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팀장 입장에서는 팀의 에이스는 전출 대상에서 당연히 제외하고, 없어도 될만한 직원을 보내려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타 본부 및 그룹사에서는 쓸모없는 직원이나 문제가 있는 직원의 명단만 잔뜩 오더군요.

이곳저곳 알음알음 해당 직원들에 대해 물어보니, 절대 받으면 안 된다는 직원들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인사에서는 이 명단에 있는 사람 외에는 줄 수가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하네요. 안 받을 수도 없고 받자니 뻔한 인물인데 참 답답하더군요.

결국 최악은 피하는 수준에서 10명을 선정하여 받기로 했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업무에 대한 열의나 성의가 없는 직원들이었습니다. 회사를 관둘 거냐 아니면 다른 곳이라도 갈 것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온 직원도 있었고, 그냥 서울이라고 하니 지방을 떠나 올라온 직원도 있었습니다.


바쁘긴 한데 도무지 업무에는 도움이 안 되니, 이 또한 스트레스가 되더군요.

어느 날 외부의 무수한 적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현실에 대해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간의 어려웠던 일과 지지부진한 진척사항, 풍전등화와 같은 팀의 위상, 헤쳐나갈 험난한 앞으로의 상황 등을 좀 과장도 섞어서 이야기를 했지요. 이런 술자리가 여러 번 이어지면서 일부 직원들은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공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이 거셀수록 옷깃을 여밉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무려 6개월 만에 2-1로부터 최종 결재를 받았습니다.

이제 어려운 관문 중 하나를 겨우 넘었을 뿐이고, 앞에는 더 큰 어려움이 상존하고 있더군요.

결재를 받았지만 실제 진행을 위해서는 반대 진영들로부터 금전적 물질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계속 지연을 시키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내 감사를 통해 프로젝트 전반에 대한 검토를 다시 하는 등 전방위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외부로부터 괴롭힘이 커질수록, 팀 내부는 더 똘똘 뭉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의와 성의도 없었던 직원들이었지만, 차츰 북풍이 거세어질수록 옷깃을 여미고 있습니다.

하나로 똘똘 뭉치니 비록 강한 북풍이 불어도 헤치고 나갈 힘과 용기가 생기더군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교육 시스템과 관련된 장소의 선정 및 공사가 진행이 되기 시작했으니 다행이었지요.


어느 날 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업체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직원 한 명이 작업현장에 상주하면서 공사진척사항을 확인하여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누구를 보낼지 고민하다가 사람은 착하기는 한데, 영 업무에는 도움이 안 되는 직원을 불러 이런저런 사유로 공사현장에 가서 일할 수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흔쾌히 본인이 가겠노라고 하니, 좀 의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더군요.


놀라운 반전

공사가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업체 사장님과 진척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도중, 파견 나간 직원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보내준 직원이 너무 열심히 해서 업체 사장님과 현장 작업반장님이 놀랐다는 것입니다.

늦은 시간은 물론이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공사가 있으면 나온다고 하는데, 그냥 와서 도면만 체크하는 게 아니라 같이 일도 한다고 하네요.

제 생각과 너무 달라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토요일 오후에 한번 공사현장을 조용히 방문하였습니다.


한창 작업을 하는 작업자 사이에 저희 직원이 쭈그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도면을 보면서 체크하기 위해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케이블 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음속에서 미안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너무나도 미안한 생각에 한참을 뒤에서 지켜보고 또 지켜봤습니다.


어찌 이리도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저만의 잣대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확정을 지었는지에 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조용히 가서 어깨를 툭치니 돌아보면서 깜짝 놀라더군요.

"형님이 토요일에 어인 일로 여기를 오셨나요?"라고 하네요.

이 직원은 나이가 많은 사람은 무조건 형님이라고 호칭합니다.

잠시 커피를 마시면서 힘들지는 않은지, 공사하는데 문제는 없는지와 같은 것을 물어봤습니다.


그때 이 직원이 저에게 했던 말은 아직도 마음속 깊이 남아있습니다.

"형님이 저를 이곳에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무시하고 관심도 안 가져주었는데, 이런 기회를 줘서 너무 좋았습니다."

"저 자신조차 제가 싫었는데 이번 일을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어서 행복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사소하다고 생각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일생의 중요한 변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경험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이 직원과 다른 팀에서 일하지만, 아직도 만나면 "형님"하면서 반가워합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







keyword
이전 19화내부 반목과 시기가 팀을 망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