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이전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드라마 ‘도깨비’에서-
5월에 다녀온 올레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 길 위에서 내가 받은 느낌과 떠오른 생각은 날씨이면서 어떤 것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올레길은 시작이 있고, 경로가 있으며 그리고 끝이 있다. 길은 정해져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 닮았다. 그래서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처럼, 운명과 닮은 길-코스는 질문으로 가득 찬 질문지가, 올레는 질문지를 만든 질문하는 자가 되었다. 이런 길에서 나는 다양한 질문과 마주했던 것이다. 질문은 묻는 형식이 아니라 풍경으로 드러내 보여줄 뿐이었다. 먹구름으로 드리운 해안 길, 오름 정상에서 본 풍경들, 갑갑한 숲으로 된 길, 영화의 장면을 연상시킨 풍경들. 이런 풍경이 내면에 닿아 느낌으로, 생각으로 변환되어 질문이면서 대답이 되었다. 이번 올레에서는 공사로 파내어진 길의 속살, 성난 파도, 두려운 암흑 등을 보여주며 느낌과 생각을 이끌어 냈다. 느낌과 생각은 질문이면서 대답이었지만 결국은 대답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대답에는 정답도 옳고 그름도 없었다. 반추와 숙고만 있었을 뿐이다.
이번 글에는 부제가 필요했고 ‘올레의 질문’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떠남은 떠나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준비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타는 순간도 아니고, 도착한 제주공항을 나서는 순간도 아니다. 이번에 걸을 올레의 코스를 정하는 순간부터, 아니면 새벽 6시 2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 방법을 고민하는 순간부터 떠남은 시작되었다.
올레에 다시 가겠다고 생각한 순간, 걸어야 할 코스를 정하는 것부터 고민되었다. 저번 올레의 시작인 21코스를 이어 20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을지, 아니면 끝이었던 3코스 종점의 표선 해수욕장을 시작으로 4코스를 순방향을 걸을지, 이도 저도 아니면 저번 올레와 관계없는 다른 코스를 선택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회사에 비치된 노동조합 잡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제주도 그림이 있었고, 그림 안에는 제주 북쪽에 하나의 긴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은 철길이었다. 제주의 철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제주에도 철길이 있었다? O, X
정답은 O, 제주에도 철길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자원 수탈을 위해 지금의 협제~김녕 구간 55.5 Km을 개통해 영업했다고 합니다. ‘제주도 순환궤도(주)’라고 불린 철도는 1928년 11월에 착공해 1929년 9월에 완공됐으며, 총 75만 원의 건설비용이 들었습니다. 다만 안전에 문제가 있고 사고가 자주 일어나자 개통 2년 만인 1931년 9월에 폐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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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철길은 단선이었습니다. 자갈은 없었던 것 같고요. 궤간은 610mm, 사람의 힘으로 밀어 화물과 여객을 운송했습니다.’ -철도노조 80년사 역사편찬위원회-
과거에 있었던 철길이 내 선택을 결정했고, 그것을 운명이라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 잡지는 테이블에 놓여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날 무의적으로 손이 갔고, 우연히 그냥 펼쳤을 뿐이다. 그리고 펼친 페이지, 거기에 때마침 제주도 그림이 있었고 그림의 북쪽에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을 뿐이다. ‘협제에서 김녕까지’ 이어진 철길이었다. 이곳은 내가 내심 가려고 했으나 결정을 미루고 있던 길(15~20코스)과 거의 같은 곳을 지나고 있었다. 결정을 미루고 있었던 이유는 3일 동안, 6코스, 총길이 103.8Km(실제는 거의 110Km를 걸었다)를 걸어야 하는데, 50대 중반의 체력으로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 든 잡지에 그 코스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우연은 겹쳤고 그래서 필연처럼 느껴졌다. 필연은 세화(김녕 다음 마을)에서 한림(협제 다음 마을)까지 걷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운명에 따르기로 했다.
김포공항은 1993년부터 커퓨 타임 Curfew Time(Night flying restrictions)이 적용되는 공항이다. 커퓨 타임은 항공기 소음으로 공항 주변의 주민들이 받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야간에 항공기 이착륙을 금지시킨 제도이다. 김포공항의 커퓨 타임은 23시에서 6시까지이고, 공항은 자정부터 04시 30분까지 불을 끄고 문을 닫는다. 즉 00시부터 04시 30분까지 이용객은 공항에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새벽 비행기를 타야 하는 이들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새벽 시간에 대중교통은 운행되지 않기 때문에 새벽에 공항까지 가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물론 자가용이나 택시를 이용하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전날 밤 공항 근처에서 숙박을 해결해야 한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검색해 보니, 이런 이들을 위해 저렴하게 밤을 보낼 수 있는 5호선에 위치한 두 개의 성지가 소개되어 있었다. 하나는 송정역 근처에 있는 24시간 운영되는 패스트푸드인 맥도널드이고, 다른 하나는 개화산역 근처에 있는 24시간 찜질방인 개화산랜드였다. 나는 잠도 자고 샤워도 할 수 있는 개화산랜드를 선택했다. 다음날 새벽에는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 김포공항역까지 따릉이로 가면 된다.
개화산랜드는 지하에 있었다. 프런트 앞에는 여행 캐리어들이 놓여 있어 이곳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등산 배낭을 사물함에 넣고 간단한 샤워를 한 후 수면실에서 잠을 청했다. 건물이 지하철 경로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지하철이 지나면 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기다 코를 고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또한 수면을 방해했다. 그래도 견디며 잠을 살짝 잤다. 전번 올레에서 만난 룸메이트가 골았던 데시벨만큼은 아니어서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새벽 4시 30분에 선잠으로 조금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샤워하고 개화산랜드를 나와 따릉이를 찾았다.
공항의 보안검색대를 통과한 후,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서서히 움직일 때 도시의 스카이라인 부근에서 엷은 주황색이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가속하여 이륙할 때 동이 터오고 있었고, 완전히 이륙하자 해는 솟아 밝은 주황으로 빛나며 공간을 깨우고 있었다. 감귤색이었다. (202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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