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코스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벌러진동산과 서우봉이다. 이들은 김녕, 동북, 북촌, 함덕, 조천 등의 마을과 밭들 사이에 자리하며 매듭을 지어 길의 마디가 된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같아서 어떤 강한 인상을 남겼던 이전의 코스들과는 다르게, 마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9코스는 풍경에서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풍경은 선이 얇은 평범한 얼굴 같았다. 주로 숲과 밭으로 구성된 길이어서 그런 것 같다. 김녕에서 함덕까지는 이런 비슷한 길의 연속이다. 마을이나 포구는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서우봉을 넘어 함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커다란 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다. 숲과 밭의 길이기에 19코스는 초록의 길이기도 했다. 물론 2코스도 초록길이었다. 그러나 달랐다. 2코스의 초록은 두터웠으나 19코스는 엷었다. 아마 2코스처럼 숲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들이 마을이 나타나 초록을 풀어버려서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에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내 개인적 취향까지 더해져 19코스는 더 엷은 얼굴이 되었다. 바다를 볼 수 없어 내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조천에서 너무도 강렬한 인상의 풍경을 받았다. 그 길은 두려움을 넘어서 공포였다.
<19코스 종점이자 20코스 시작점 스탬프>
20코스를 마무리고 물을 마시며 10분 정도 쉬었다. 19코스를 걷기 위해 일어섰을 때 몸은 뻣뻣해져 있었다. 거친 바람 때문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걸어서 그런 것 같았다.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특히 하체를 집중적으로 했다. 20코스는 평지여서 그런지 무릎은 아직 잘 견디고 있었다. 걷기 전에 착용한 무릎보호대의 효과일 수도 있다. 배낭을 다시 멨다. 오후 3시였다.
마을 길은 짧았다. 그리고 밭길이 이어졌다. 밭길로 빠지기 전에 올레길을 걷고 있던 두 명의 여성이 “수고하시네요. 힘내세요”라는 짧은 인사말을 하며 나를 지나쳐 내려갔다. 나는 19코스 시작이었고 그녀들은 끝이었다. 시작이기에 내가 걸어야 할 고됨에 대한 위로의 인사였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라는 나의 인사말에는 끝에 다다른 그녀들에 대한 부러움이 스며있었다. 올레를 걸으며 처음으로 주고받은 인사말이었다. 혼자 걷는 길이기에 올레는 나에게 긴 침묵의 길이기도 했다. 올레에서 여러 사람이 나를 지나쳤고, 나도 다른 이들을 지나쳤다. 그들과 나, 우리는 말이 없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각자의 길이고, 그래서 길은 달랐다. 아주 다른 길이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말은 같은 방향을 보고 곁에서 보조를 맞추며 걸을 때만 가능하다. 말이 오가면 길도 섞여서 같은 길이 된다. 곁에서 걷지 않고 있기에 말을 할 수 없었다. 간혹 예외가 있다. 지나며 주고받는 짧은 인사말이다. 비록 인사말이 짧아서 길은 서로 섞이진 못하지만, 길은 잠시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 그 순간 얼마간의 온기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런 것이 먼 길인 나에게는 ‘자신들도 해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라는 격려와 위로가 되었다. 그러니 그 짧은 인사말은 나에게 고마운 것이다.
<이 길 어디쯤에서 그녀들과 짧은 인사말을 나눴다>
밭길은 숲길로 이어졌다. 나무들이 아치를 만들어 조금 어두운 숲길을 걸을 때 한 발자국 앞에서 무엇인가가 스르륵 빠르게 지나갔다. 뱀임을 직감했다. 얼른 지나간 곳을 보았다. 30cm 정도의 작고 얇은 뱀이었다. 안도는 했지만, 몸은 잔뜩 긴장했다. 언제고 큰 뱀이 나올 수 있다는 상상 때문이었다. 지금은 낮이지만 그래도 이곳은 산이고 숲이었다. 뱀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루도 만났다. 노루는 길 한가운데에서 움직이지 않고 계속을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천천히 다가가도 그대로 있었다. 놀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를 무시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3m 정도까지 다가가자, 마법이 풀린 듯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숲으로 달렸다. 달아났다고 해야 할지, 제 갈 길을 갔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겁 없는 노루>
뱀과 노루를 만난 곳인 숲길이 벌러진동산이다. 정보를 알려주는 간세는 ‘벌러진동산’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두 마을이 갈라지는 곳, 혹은 넓은 바위가 번개에 맞아 벌어진 곳이라고 하여 벌러진동산이라 불린다. 나무가 우거져 있고,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넓은 공터가 있으며, 아름다운 옛길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특징적인 것이 두 개 있다. 하나는 20코스에서 잠깐 언급된 박노해 시인의 글이 있는 작은 안내판이다. 이번 숲길에서 본 것은 13개였다.
키 큰 나무 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 너와 나, 이 만남을 위해 우리는 오랜 시간 서로를 향해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 자주, 그리고 환히 웃어요. 가끔, 그리고 깊이 울어요 / 비울수록 새 힘이 차오른다 / 꽃은 달려가지 않는다 / 마음아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 내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 좋은 동행자가 함께하면 그 어떤 길도 멀지 않은 법이다 /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 가장 어려운 때가 도약의 지점이다 / 나는 나를 지나쳐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왔다 / 그냥 걸어라. 첫걸음마 하는 아이처럼 내 영혼이 부르는 길을 그냥 걸어라 / 중단하지 않는 한 실패가 아니다 /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마음에 들어온 굴귀>
보이면 하나하나 읽었다. 읽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이지만 조금 쉴 수 있었다. 순방향으로 걸었다면, 글귀들은 긴 길의 지루함을 조금 덜어 내며 지친 맘들을 어루만져 주었을 것이다. 글귀 중에서 하나가 계속 머리에 남았다. ‘마음아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 내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이 글귀는 인디언의 어느 행동을 생각나게 했다. 인디언은 말을 타고 가다 가끔 말을 세우고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다. 영혼이 몸을 못 쫓아오는 것이 걱정되어 영혼이 쫓아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걸음이 느린 영혼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여유가 보인다. 왜 여유를 가져야 하는지 우화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여유가 없다면 우리는 영혼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 그 여유는 사뭇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잠시 기다려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기다림은 낭만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모든 것을 효율로 판단하는 오늘, 오히려 기다림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풍력발전기이다. 이곳에는 풍력발전기 15기가 몰려있다. 밭길을 걸으면 어느 순간 여러 개의 풍력발전기가 나무들 뒤에 우뚝 솟아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동북·북촌 풍력발전단지였다. 이번 올레에서는 풍력발전기를 많이 보았다. 대부분은 바다에 있었다. 간혹 육지에 있었지만 이렇게 몰려있는 곳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번 2코스 대수산봉의 전망대에서 한라산 방향에 있는 여러 기의 풍력발전기를 본 것 같았다. 사진을 찾아보니 있었다. 카카오맵의 항공사진을 보니 '제주자연생태공원' 근처였다. 제주는 바다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바람이 많았다. 내륙에 있는 풍력발전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동북·북촌 풍력발전단지의 풍력발전기>
<2코스 대수산봉에서 본 풍력발전기(원안)>
숲길에서 나오면 중간스탬프가 있는 동북리마을운동장을 만난다. 스탬프를 찍고 잠시 앉아 에너지바를 먹으며 운동장을 봤다. 초록의 잔디로 깔려있어야 할 운동장엔 관리를 안 해서인지 잔디는 잡초로 자라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축구 골대가 있지만, 축구는 더 이상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다음 길을 보기 위해 카카오맵의 항공사진을 보니 근처에 새로 만들어진 축구장과 야구장이 있었다. 운동장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이곳은 관리가 안되면서 버려진 것 같았다. 근처에 있는 화장실에 갔을 때도 그것을 확인했다. 볼 일을 조금 망설여지게 하는 그런 상태였다. 그러나 화장실이 보이고 어느 정도 느낌이 온다면 그곳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한다. 올레길에서 화장실은 띄엄띄엄 있다. 한번 지나치면 많은 시간을 참아야 한다. 그건 곤욕이고 노상 방뇨 같은 작은 윤리적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여전히 망설여졌지만, 여러 곤란한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들어가 볼일을 봤다.
<버려진 것 같은 동북리마을운동장>
숲길은 조금씩 엷어지고 집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쯤에서 몸이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몸은 전보다 뻣뻣해져 나무토막 같았고, 무릎이 통증의 시작되었다.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 속도로 해질 때까지 19코스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해가 져도 가로등이나 집과 상가의 불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큰 오산이었다. 해가 진 후의 올레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