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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 Jan 04. 2024

키신저, 위대한 외교관인가 아니면 전범에 불과한가

하루한권독후감 20240102 <키신저 재판>

[20240102] 크리스토퍼 히친스, 안철흥 역, <키신저 재판>, 아침이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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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29일 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가 10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애도 성명에서 "그와 나는 자주 의견이 달랐고, 때로는 강하게 대립했다"며 고인과 방향성이 달랐음을 명시했다.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에서 "비판자들은 그를 위선자로 봤으며, 다른 누군가는 '전범'으로 봤다"고 보도했고 <롤링스톤>은 "미국 지배층이 사랑한 전범 헨리 키신저, 마침내 죽다"라며 아예 고인을 전범으로 명명했다.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키신저를 향한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과 미국 언론의 박한 평가는 사뭇 이상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1일 조전에 따르면 "일평생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해 기울인 노력을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할 인물인데, 키신저는 왜 자국에서조차 비난을 받고 있을까.


20여년 전에 출판된 <키신저 재판>은 이러한 물음에 약간의 해답을 준다. 저자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키신저는 전범이라며 정치적인 잘못을 떠나 당장 재판장에 세운 뒤 공소장에 나열할 수 있는 죄목만 6가지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히친스가 제시한 죄목 6가지는 �인도차이나 민중에 대한 대량 학살 계획 입안 �방글라데시에서의 대량 학살 공모 �칠레의 민주적이고 합법적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 지원 �키프로스의 민주적이고 합법적 대통령에 대한 살해 계획 관여 �동티모르 학살 선동 및 유도 �반독재 언론인 납치·살해 계획 관여 등이다.


이러한 히친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키신저는 범죄자임이 틀림없다. 저자 히친스는 자신의 주장을 다양한 문서와 인물의 증언을 통해 거짓이 아님을 책에서 샅샅이 파헤친다.


그에 따르면, 키신저는 그 시작부터 수많은 이들의 피를 묻힌 사람이었다. 키신저가 미국 정부의 외교 실세로 등극한 건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고 나서부터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북베트남과의 평화협상을 준비한 민주당의 린든 B. 존슨 행정부의 선거 전략을 키신저가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닉슨에게 누설했다.


이 사실을 안 공화당은 남베트남에게 평화협상을 거절하면 더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꼬드겼고 평화협정은 무산됐다. 그렇게 베트남전쟁은 4년을 더 이어갔고 남베트남은 좋은 기회는커녕 패망했다. 그 4년 동안 미군 사상자는 3만 명이 넘었고 같은 기간 베트남 민간인 사상자와 난민은 미 의회에 따르면 3백만 명 이상이다.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키신저는 중립국인 캄보디아와 버마(현 미얀마)를 배후기지로 지목하고 폭격을 지시했다. 미 합참의 전략폭격전술 전문가인 시턴 대령은 키신저와 폭격 문제에 대한 깊게 협의했다고 진술했다. 국무부 직원 200여 명이 키신저의 폭격 정책에 항의하는 서한에 서명해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에게 보냈지만 키신저를 막지는 못했다. 1년 2개월 동안 미군은 캄보디아에만 3600차례가 넘는 폭격을 가했다.


이외에도 키신저는 당시 중국과의 외교 채널이 파키스탄을 통했다는 이유만으로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의 선거 과정 속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해 침묵하고 더 나아가 학살에 경고해야 한다는 국가안보협의회 내부 주장을 강력히 반대했다.


책에 따르면, 키신저는 학살의 주범인 야하 칸 장군에게 "신중하고 빈틈없이" 행동해서 고맙다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키신저의 언행에 오죽하면 당시 다카 주재 미국 총영사였던 아처 블러드조차 "미국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학살극의 공범"이라고 비난했겠는가. 이때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30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고 알려져있다.


1973년 칠레 쿠데타 지원은 "국민들이 무책임하다고 해서, 한 국가를 맑스주의 국가가 되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키신저의 발언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합법적인 정권이었던 아옌데 정권은 키신저의 비호를 입은 군인들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이후 들어선 독재자 피노체트의 강압 아래 칠레 국민은 신음했다. 키신저는 앞에서는 피노체트를 향해 인권을 침해한다고 연설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뒤로는 피노체트에게 "이번 연설은 칠레를 겨낭한 것이 아니다"라며 "각하는 전세계 모든 좌익단체의 희생자"라고 아부하기 바빴다.


또 키신저는 그리스 군사정권의 키프로스 침공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방관했고, 이로 인해 실각한 마카리오스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실각 직후 워싱턴을 방문한 그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반독재 언론인인 엘리아스 데메트라코풀로스에 대해서도 키신저의 국가안보협의회는 내부 문서에 사망 소식을 미리 기재할 정도로 납치 계획에 관여했다. 이는 닉슨 행정부가 그리스 군사정권으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소 5만 명의 민간인이 죽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 하루 전, 키신저가 수하르토 총리와 침공문제를 논의했다는 문서와 국무부 내부 대화에서 동티모르 문제에 있어 인도네시아 편을 들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포드가 회고록에서 국익을 위해 인도네시아편에 섰다고 자백하는 등 명백한 증거들이 드러났다. 하지만 키신저는 "커다란 비극임은 틀림없지만, 미국의 중요한 정책 문제가 아니었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처럼 키신저의 과거를 면밀히 따져보면 그를 마냥 '위대한 외교관'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국익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저버린 전쟁범죄자라는 시각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히친스는 국제법에 따라 키신저를 재판에 세워야 한다면서, 당시 스페인과 벨기에 등에서 제3국의 법정이 모든 국가에 구속력 있는 국제법을 집행했던 것을 예시로 들며 이것이 헛된 상상만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비록 저자의 염원과 달리 키신저는 법의 심판을 받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갔지만 국제법에 따라 전범이라면 누구든 처벌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2023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식민지기와 냉전시기 피해받은 세계 각국에게 큰 울림을 준다.


한국이 글로벌중추국가로서 국제보편에 입각한 나라로 우뚝 서야 한다는 윤 대통령 또한, 키신저에 대한 막연한 호평을 넘어서 진정한 국제보편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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