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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 Jan 05. 2024

잔잔한 일상 속 진지함을 잃지 않는 삶

하루한권독후감 20240103 <계절의 기억>


호사카 가즈시, 이상술 역, <계절의 기억>, 문학동네, 2010년.


난 새것을 꺼린다. 옷도 그렇고 식당도 그렇고 길도 그렇고 내가 평소 입는 옷, 먹는 식당, 가는 길이 아니면 웬만해선 가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미 본 작품을 보고 또 볼 뿐 새로운 작품에는 손이 가질 않는다. 그나마 새것에 끌리는 것이 있다면 아마 책뿐일 거다.


새것을 꺼리는 이유는 분야별로 각양각색이지만 공통적인 까닭이 없진 않다. 바로 편하지 않다는 점이다. 새 옷은 아직 내 몸에 길이 들지 않아 불편하고 새로운 식당과 길에서는 기대보다 긴장을 더 느낀다. 영화나 드라마도 극 중 상황이나 인물, 갈등에 집중하고 몰입해 생각을 펼쳐나가다 보면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머리가 지끈거린다.


물론 새로 읽는 책에도 불편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런데 책이 주는 불편함은 내게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아마도 다른 것들과 달리 그 불편함을 내가 나름대로 조절해서 수용할 수 있는 주도성을 내가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책의 내용이 어려우면 좀 쉬거나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고 책의 내용에 대해 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면 잠시 책을 덮고 온전히 생각에만 차분하게 집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새 책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크게 개의치 않지 싶다.


그런데 이 책 <계절의 기억>은 그러한 불편함이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읽어보지 않은 새 책임에도 익숙함으로 가득했다. 수차례 반복해서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나 <태풍이 지나가도>에서 느꼈던 잔잔하고 평소와 같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번민을 다룬 소설이어서 그랬거나 주인공 나카노의 삶이 내가 평소 원하는 삶이고 사고방식 또한 나와 비슷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 나카노는 아들 구이짱과 함께 바닷가가 가까운 시골 마을에 둘이서 생활한다. 이웃인 마쓰이와 그의 누이 미사짱과는 거의 유사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로 지낸다. 30대 중후반의 나카노와 40대 초반의 마쓰이, 20대 중반의 미사짱과 다섯 살 구이짱은 모두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나카노는 편의점에서 파는 책을 편집하는 재택근무를 하며 마쓰이는 모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어린 여동생을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동네 심부름꾼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사짱은 나이 많은 오빠와 살아서 그런지 나이와 예쁘장한 외모에 걸맞지 않게 애늙은이같은 면이 크며 구이짱은 단순히 가지 않아도 되기에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별다른 교육도 받지 않은 채 나카노와 미사짱이랑 하루를 보내며 지낸다. 안정과 바쁨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들은 특별하지만 이들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 4명에게는 어떠한 갈등도 주어지지 않는다. 소설은 그저 이들의 소소하고도 차분한 일상을 나카노의 시선에서 그릴 뿐이다. 그럼에도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 소설에서 가장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묘사때문인데 그것은 나카노가 어른의 시선에서 어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아들에게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고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답변하는 부분이다.


요컨대 "종이를 계속계속 자르면, 어떻게 돼?(189쪽)"라는 아들의 질문에 나카노는 종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으로 계속 자른 뒤 "더더더 작게 못 잘라?"라는 질문에 대강 답변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우선 이렇게 얇은 종이도 두께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켜야만 한다(192쪽)"며 아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시킬지 고민한다.


허나 소설 속 이런 상황에서 대개의 경우 구이짱은 진지한 답변에 흥미가 없거나 나카노가 고민하는 도중 "개미는 개미가 있어?"라는 등의 엉뚱한 질문, 하지만 구이짱에게 있어서는 진지한 고민의 산물인,을 하고 나카노는 그 엉뚱한 질문을 아들의 시선에서 이해하고 재차 그 질문에도 "나는 망설였지만 결국 정확하게 가르쳐주기로 했다(193쪽)"며 진지하게 접근한다.


그 외에도 나카노는 아들이 글자를 알아버리자 이에 허탈해하며 조금이라도 글자를 늦게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글자를 쓸 줄 몰라도 인간은 사고할 수 있다. 지구상에는 평생 글자를 못 읽는 사람도 많지만 그건 논외로 하더라도, 어린아이라도 상당히 고도의 개념을 써서 사고할 수 있는데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 정식으로 읽기 쓰기 수업을 할 때 국어 교과서에 씌어 있는 내용이라는 게 아이들의 흥미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학교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각자의 발달된 지적 관심을 일단 0으로 되돌리고 유치한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 같은 것부터 시작하기를 강요당한다(209쪽)"


마치 이반 일리치의 <학교 없는 사회>에 나와도 손색 없을 것 같은 이런 나카노의 단상은 심심하기 그지 없는 나카노의 일상에서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나 역시도 일상에서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떠오르는 이런 생각들에 1, 20분씩 허비하는 경우가 적잖아 너무 공감하며 그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더하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천진한 구이짱의 모습과 그에 대비되는 진지한 아버지 나카노의 모습의 괴리에서 느껴지는 웃음 포인트도 있다.


돈보다는 자유로운 시간을 쓸 수 있기에 재택근무 편집자를 택한 나카노는 거의 매일 구이짱과 미사짱과 산책을 나가고 저녁에는 마쓰이까지 포함한 네 명과 식사를 하곤 집에 돌아와 아들과 아침에 먹을 수프 준비를 한다. 그러한 일상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나카노 역시 생각하지않는 건 아니지만 지속되는 동안만이라도 괜찮다고 여기며 또다시 자신의 잔잔한 일상을 만끽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앞으로 올 차의 색깔을 맞추는 놀이를 하는 구이짱과 미사짱을 보며 나카노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이런 생각으로 끝맺는다.


"나는 언젠가 몇 년이 지나 기억나는 날이 있다면 오늘 같은 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과 함께 절벽 사이를 빠져나오는 자동차를 바라보았다(331쪽)"


이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어쩐지 이 소설이 복잡다난한 현대사회에서 진지하고 조용히 자신만의 일상을 침해받지 않기 위한 한 사람의 투쟁기는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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