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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Jun 20. 2024

그는 너무 잘생겼어!

    이번 학기를 견뎌내게 해 줄 만한 걸 발견했다. 중국신화수업을 같이 듣는 한 남자아이가 참 잘생겼다는 것이다! 얼굴만 잘 생긴 것이 아니고 마음도 참 슈아이(帥, 멋지다)하다.   

 

    상대와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아도 잠시 눈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파장이 느껴지잖아? 누군가는 나를 처음 보는데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 나를 보는 눈빛에 깔보는 빛이 느껴지고, 누군가는 나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두꺼운 장벽이 느껴지고, 누군가는 침묵의 시간을 채우려고 별 감동도 없이 내게 말을 붙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잖아? 

    그런데 내가 지금 말하려는 이 친구는 영혼에 잡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지. 그 남자아이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대하는 영혼에 잡티가 없다. 


    대만대 중국어학과 졸업논문 발표회에 참석했더니, 그도 와 있다. 중간 휴식 시간에 그와 처음으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왜 중국어 배울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야기를 하자면 좀 슬픈데, 7년 전에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어. 그전까지 난 죽음이란 게 뭔지도 몰랐어. 처음으로 접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아주 큰 충격이었어. 하고 싶은 일은 미루는 게 아니구나를 알게 된 거지. 아버지는 평생 일만 하시다가, 이제 말년을 쉬시며 안락을 누릴 참인데, 그러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어.”

    “그래, 아시아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은 '나중에 때가 되면'이라며 좀 미루더라고. 뭘 할 준비가 되는 때란 것은 없는데 말이지. 그럼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중국어를 가르칠 거야?”

    “아니. 박사공부를 마치면 다른 나라로 가려고. 늙어 못 움직일 지경이지만 않으면 돌아가지 않으려고. 난 5개 국어를 하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거든.”


    “지금 너의 그 중국어 발음은 어디서 배운 거야? 어디 식이지?”

    “뭐, 한국식이라고 할 수 있지? 발음이 좀체 교정이 안되네.”

  나는 대만에서 중국어를 배웠지만, 중국 드라마에 빠져 살아 습관적으로 듣는 것은 중국식 발음이기 때문에, 내 중국어 발음은 딱히 대만식이 아니다. 어정쩡한 중국식 발음에 도대체 사라지지 않는 한국인 특유의 억양이 붙어있다. 나는 서울 표준말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경상도 억양을 가진지라, 한국 억양을 지우겠다는 욕심 따위 안 가진 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내 발음을 듣고 '한국분이시죠?'하고 알아챌 때는 퍽 실망이 된다.

    “뭐 고칠 필요 있니? 한국식 중국어 발음 그대로 좋은 걸.”

    “어머, 정말? 내가 이 한국식 중국어 발음으로 발표할 때마다 반 친구들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몰라. 다들 못 알아들을까 봐. 내가 이 발음으로 발표해도 넌 알아듣겠어?”

    "한국식 중국어 발음 그대로 좋아. 왜 고치려고 하는 거야?" 

    나의 한국식 중국어 발음 그대로 좋다고 말해준 사람은 이 녀석이 최초다. 아, 난 이 녀석이 좋다! 


    내가 처음으로 그에게 반한 것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서다. 나는 남자의 단단한 가슴 근육보다 섹시한 목소리에 반응되는 벽(癖)이 좀 있다, 오홍.

    중국신화수업에서 교수는 거의 원옌원(文言文)* 수준의 몇 단락을 설명해주고 나서 질문을 던졌는데, 출석부에 1번으로 이름이 올라와 있는 그가 첫 번째로 질문을 당했다. 그가 약간 반항적인 목소리로 답이 될만한 문장을 한 글자도 안 빼고 그대로 읽는 것으로 답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렇게 답함으로써 노골적으로 교수의 수업 방식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민 가서 캐나다의 교육제도 하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이(李) 교수의 수업방식은 너무도 교수 위주의 강의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캐나다에서 공부한 사람 입장에서 이(李) 교수의 보수적 수업 방식이 적응이 되니?” 내가 물었다. 

  “좀 적응이 안 되긴 하지. 중국신화 수업은 더 재미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그래서, 지난번 이(李) 교수가 질문했을 때, 간단하게 대답 안 하고 책에 적힌 그대로 쭉 낭독한 것은 반항한 거지?”

  “아, 그건 그렇지 않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 부분을 다 읽은 것뿐이야.”

  “난 좀 반항의 분위기가 느껴지던걸?”

  “절대 그렇지 않아. 오해야, 오해.”


    그는 석사는 캐나다에서 온라인 학위반으로 해서 마쳤고, 박사는 딱 한 학기만 대만으로 들어와 학위에 필요한 모든 학점을 채우고, 나머지 과정은 캐나다에서 진행한다. 

    그는 한 학기동안 졸업에 필요한 모든 학점을 채우느라 점점 초췌해져 갔는데, 처음의 슈아이(帥)했던 얼굴은 기말쯤이 되었을 때는 내가 저 얼굴에 반했나 의문이 들도록 보통스러워졌다. 하지만, 그의 섹시한 목소리는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아, 목소리에 너무 반응하는 벽()을 고쳐야 할 텐데.) 


    이제 나는 내 한국식 중국어 발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중국어 발음을 듣고 '한국분이시죠?' 할 때면 '한국식 중국어 발음 그대로 좋아. 왜 고치려고 하는 거야?' 했던 다정한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좋기까지 하다. 내 발음 그대로를 좋아할 수 있게 해 준 그에게 감사하다. 



*원옌원(文言文) : 고전 문어체 중국어. 원옌원(文言文)으로 쓰인 문장은 특별히 배우지 않았다면 모국어자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 심지어 어떤 글자는 읽어내지도 못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용비어천가'를 배우지 않았을 때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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