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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Jun 20. 2024

그럼 그렇지

    룸메이트 메이스는 말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내가 거실에 나타났다 하면 말을 건다.   

    "내가 뤠이한테 그랬잖아. 난 동해랑 이야기 많이 해야 한다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너랑 이야기할 때는 내가 중국어로 말하고, 뤠이랑 말할 때는 영어를 써버리게 되니까. 중국어 향상을 위해서는 너랑 자주 대화 나눠야 한다고 했지."

    "그럼, 너, 뤠이랑도 말할 때 중국어를 써."

    뤠이는 대만 사람이다.

    "뤠이가 영어로 답하니까,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하게 되어버려."

    "뤠이가 영어로 말하던지 말던지, 넌 중국어로 말하면 되지. 안될게 뭐야?"

    

    메이쓰는 필리핀 아가씨다. 필리핀은 초등 4학년때부터 모든 과목을 영어로 교육하기 때문에, 영어도 거의 모국어라 할 수 있는데, 중국어를 배우러 와서는 늘 영어를 쓰고 있다. 나는 그녀가 중국어를 쓰나 영어를 쓰나 별 생각이 없는 줄 알았다. 그냥 어떤 언어로든 수다만 있으면 만족해하는 줄 알았다. 


    '뤠이가 자꾸 영어로만 말 시켜서 너도 불만스럽다고 느끼는구나?'


    상대가 영어로 말 건네는데 어떻게 중국어로 대화할 수 있느냐고 그녀가 착잡해한다. 

    "아냐, 그래도 아무렇지 않아."

    그리고, 내 경험담을 들려준다. 나한테 한국어를 잘하는 대만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나를 상대로 한국어로 말하고 나는 그에게 중국어로 말한다, 서로 쓰고 싶은 언어로 대화하니 서로 행복하고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등등.

    나와 이헝은 그렇게 대화하는 걸 어색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언어를 사랑해서 그 언어를 쓰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언어 연습 대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국어와 사랑에 빠졌고, 나는 중국어와 사랑에 빠져서 서로가 사랑에 빠진 언어로 대화를 나눌 뿐인 것이다.

    그의 한국어에 대한 사랑이 나의 중국어에 대한 애정보다 더 지독하다. 그는 새로운 한국어 표현 하나를 만나면, 그냥 뜻을 알고 써먹을 수 있다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고, 갈아 마실 지경으로 파고든다. 그가 가끔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면,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문제를 그렇게 까다롭게 따지고 드냐고 타박하면서도, 내심은 그의 언어적 집착에 탄복한다. 


    뤠이는 중국어로는 거의 말이 없다. 그런데, 영어로 대화를 할 기회가 되면 순간 말이 많아진다. 없는 말 있는 말 만들어내서 말을 한다. 뤠이는 해외에 나가 일할 생각이라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중인데, 중국어를 배우러 온 메이쓰를 상대로 영어로 말을 거는 모습은 '영어를 열정적으로 공부하네'가 아니라, 탐욕스럽다고 느껴진다.

    나는 메이쓰는 그걸 못 느끼는 줄 알았다. 메이쓰는 뤠이가 말을 걸어오면 고요한 이른 아침이든, 나른한 밤 시간이든 한참 대화를 나눠줬다. 또, 뤠이가 같이 놀러 가자거나 커피숖에 가자고 하면 척척 따라 나갔다. 뤠이는 지금껏 세어 하우스에 살고 있는 누구에게도 같이 놀러 가자고 한 적이 없다. 영어를 쓰는 메이쓰에게만 찰싹 달라붙어 이것도 같이 하자 저것도 같이 하자 했다. 나는 처음에는 뤠이가 메이쓰에게 이성적 관심이 있는 줄 착각했다니깐.


    역시, 사람 마음 별반 다르지 않구나!  중국어를 배우러 왔는데, 뤠이가 하루 종일 영어로만 말을 시키니, 메이쓰도 달갑지 않은 것이다. 나는 내가 치사해서, 나만 뤠이의 영어를 탐욕스럽다고 보는 줄 알았다. 

    '내가 치사한 게 아니었어! 아, 속이 다 시원해.'


    누군가를 언어연습 대상으로 생각하고 대화를 걸어올 때, 그거 기분 잡친다. 한동안 메이쓰가 내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올 때 그래서 조금 짜증이 났더랬다. 내가 한마디 던지면, 그녀는 나를 대상으로 더듬거리는 중국어로 삼십 분을 혼자 떠들어버리는데, 나는 내 시간이 아까워 졸도할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걸 얼굴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느라 또 얼마나 에너지를 썼던지. 메이쓰의 느려터진 중국어를 가만 듣고 있으면서, 내 속 마음은 이랬다. 

    '나, 너한테 에너지 먹히려고 밥 먹은 거 아니거든. 제발 그 입 좀 닥쳐줄래?' 

    나 너무 냉정한가?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난 모르겠고'다. 난 말 많은 사람 딱 질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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