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럴 수도 Episode 8 ]
종일 복잡한 이해관계에게 치여 퍼렇게 멍든 가슴으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조촐한 '의식' 하나에 간신이 굳은 얼굴을 풀곤 합니다. 의식이래 봐야 뭐 별거 아닙니다.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간 둘째 딸이 '아빠~'하고 달려들어 조막만 한 팔로 제 목을 감싸안는 거죠. 그럴 때면 질질 매달고 왔던 잡념들이 그제야 벗어던진 신발처럼 현관 구석에 처박히고 맙니다. 요즘은 저도 지가 예쁘다는 걸 아는지 갈수록 비싸게 구는 게 흠이긴 합니다만, 해줄 때마다 효과는 만점입니다.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빠 얼굴을 도장처럼 찍어놓은 딸내미인지라, 그녀의 애교로 하루의 고단함을 잊는 건 당연하겠지만, 나이가 불혹의 경계선을 훌쩍 넘자 이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아빠가 아이를 껴안는 장면에서 부모로서, 가장으로서 느끼는 만족감 외에 다른 정서도 읽힌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의미냐고요? 심리학자 김정운 박사의 이야기를 빌어 보겠습니다.
'포유류는 접촉을 통해 안정감을 얻는다.'
초원에 한가로이 널브러진 원숭이 무리를 떠올려 보시죠. 그 가운데 이런 장면이 꼭 있을 겁니다. 두세 마리가 무리 지은채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장면 말입니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털을 고르다 벼룩이라도 잡았는지 얼른 입에 넣고 오물거리기도 하지요. 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요.
사실 원숭이들이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이유는 몸에 벼룩이나 이가 많아서가 아니랍니다. 땀이 굳어 생긴 소금결정체, 피부노폐물, 먼지 등을 골라주며 서로 교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털을 골라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신체접촉이 일어나고, 이 접촉이 서로에게 안정감을 주는 거죠. 서열 다툼으로 피를 흘리며 싸우던 원숭이가 쭈뼛거리며 승자의 털을 골라주는 행동도 실은 같은 맥락입니다. '너에게 졌다, 그러니 털을 고르게 해 줘. 그래야 내 맘이 편해지니까' 이 정도 아니겠습니까.
어머니의 다리를 괴고 누워 귀지를 정리할 때, 사랑하는 아내나 여자친구를 뒤에서 가만히 안아줄 때, 내 품에 폭 안긴 채 단잠이든 아이를 안고 갈 때, 우리는 한없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특별히 대단한 뭔가를 주고받아서가 아닙니다. 서로의 살이 닿고 체온을 느끼는 과정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도록 우리가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동물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는 게 불편한 분들도 있겠지만, 최소한 과학적으로는 엄연히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어쩌면 중년 남성들의 '일탈'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몸은 삐그덕 대기 시작하고 머리는 전처럼 예리하게 돌지 않는데, 올라갈 자리는 적고 엉겨 붙는 후배들은 넘쳐납니다. 로또가 터져주지 않는 다음에야 앞 날은 빤 한데, 책임져야 할 식솔들은 밑 빠진 독 마냥 부어도 부어도 채워질 줄 모릅니다. 불안은 날이 밝을 때마다 커지고 노예라는 자각은 시나브로 마음 한편에 쌓이는데, 남자라는, 가장이라는 허울만 가득할 뿐, 누구 하나 위로해 주는 이가 없습니다. 변명 같지만 변태처럼 마사지 업소나 드나들고 쉬쉬하며 업장(?)을 헤매는 건, 혹 이런 이유 아닐까요?
나를 안아 줄 누군가를 찾는 것.
살을 부비고 체온을 느끼며, 경쟁의 불안, 생존의 암담함을 덜어내 줄 누군가를 찾는 것 말입니다. 동료에겐 허점을 보이기 싫고 가족은 불안하게 만들 수 없으니, 품에 안겨 쉴 수 있는 '가상의 어머니'를 구하는 것 아닐까요. 아버지는 도무지 안아주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모두에게 귀감이 되며 성실하게 살아온 중년 가장이 어처구니없는 불륜에 빠져 삶을 한 방에 말아먹는 사건도, 속내는 그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실은 '가상의 어머니'를 상대에게 투사한 게 아닐까 하는. 나를 매만져주고 안아 줄 대상으로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짐작이니까 진위여부는 중요치 않습니다. 맞으면 좋고 아님 말고죠. 다만 이 문장에까지 인연이 닿은 분들께는 한번 부탁드려보고 싶네요.
가만히 다가가 아빠에게 팔짱을 껴 드리라고요. 남자분이라면 무심한 듯 어깨를 주물러 드리라고요. 그 별 볼일 없는 접촉을 통해, 아버지는 숨기고 계신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내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