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딘 May 15. 2024

어른들의 세계

 외부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했습니다. 먼저 일이 끝난 동료들이 쉬고 있더군요. 슬그머니 제 자리로 가려는데, 한켠에서 수다를 떨던 동기가 저를 보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이구, 차장님 오셨쎄요~"


 옆에 앉은 후배들도 덩달아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저는 서둘러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습니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요. 그들 옆으로 한 선배의 뒷모습이 보이더군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고작 스물한 살'균형 이론'을 발표, 경제학의 역사를 바꾼 천재 수학자 존 내쉬(프린스턴대)를 다룬 영화죠. 성취도 성취지만 조현병을 극복한 개인사가 그의 삶을 더욱 돋보이게 만듭니다.


 글을 이어오다 보니 자꾸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존 내쉬같은 거장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제 삶을, 너무 거창하게 부풀려 떠벌이는 것 아닌가 하는. '내 인생사, 나한테만 재미있다'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대사처럼, 저나 관심 있지 누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관심이나 있을까 싶은. 따져보니 글 하나 완성하는데 작게 잡아도 8시간 이상 소요되던데, 읽는 이는 많아봐야 50명도 안 되는 이런 낭비를 과연 계속 이어가야 하는가 싶은. 한동안 회의감에 시달리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깨닫게 되더군요. 실은 '저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요. 시작은 '타인의 관심을 구걸하는 글'이었지만, 어느덧 '나에게 쓰는 편지'가 되었다는 것을요. '짜식, 잘 견뎌냈어'라는 위로가 되고, '그때도 잘 견뎠는데, 지금은 왜 못하겠어'라는 응원이 되더군요.


 그래, 침소봉대(針小棒大)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게 아무래도 불편하시겠지만,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글로 꺼내놓는 한 장면 한 장면이 제게는 분명 의미 있는 뻘짓이요, 배움의 시간이었거든요. 원래 내 손톱 밑의 가시가, 타인의 교통사고보다 더 아픈 법이기도 하잖아요.


 노파심에 시작부터 사족이 길어졌네요. 오늘은 열여덟, 처음으로 겪었던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공고 재학 중에 저를 예뻐해 주시던 중3 담임선생님과 2년 만에 재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의 학교를 방문하셨다가 제 근황을 물으셨는데, 학교에선 모처럼 '인서울 1류대 진학을 전망하고 있더라' 전하시더군요. 각 대학교마다 실업계 특별전형이 있었으니까요. 학교 동문들이 내는 기금이 있을 테니, 학비는 거기서 해결하면 될 거라는 팁도 알려주셨죠. 내나 열심히 하라는 당부셨습니다.


 허나 그즈음은 신앙이 절정을 달리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쫓아 '좁은 길'을 걷기로 결심했죠. 새벽기도를 나가 목사님과 상담을 했는데, 목사님도 조심스레 취업을 권하셨습니다. 거기에 쉬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당시 집안 사정이 말이 아니었거든요. 폭력과 사기를 일삼던 아비는 잠적해 버렸고, 조카들을 제 자식처럼 길러오던 삼촌은 '이제는 자기 인생을 살겠노라' 몇 푼 안 되는 보증금을 들고 해외로 떠나버렸죠. 집도 절도 없던 할머니를 불쌍히 여긴 어떤 장애인 분의 집에 '더부살이' 이었니, 언감생심, 어찌 대학을 꿈꾸겠습니까.


 그렇게 열여덟, 이른 나이에 직장생활이란 걸 시작하게 됩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뤄진 직장생활은 2년 조금 못되게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대학이라는 '정상 괘도'로 뒤늦게 돌아오게 됩니다. 탈선했던 기차가 다시 괘도 위로 올라온 거죠. 직장생활 자체는 진학에 하등 도움이 안 됐고, 취직으로 인해 더 좋은 기회들을 놓쳐야 했으니, 대학 진학만 두고 보자면 제대로 뻘짓한 셈이죠.


[ image by CDD20 from pixabay ]


 처음 겪는 직장생활은 출퇴근부터 '매운맛'이었습니다. 강북에서 강남 역삼역까지 4호선과 2호선을 갈아타며 출근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출근시간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콩나물시루'라는 표현이 뭘 말하는지, 몸으로 이해가 됐죠. 손잡이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 낑겨 다녔습니다. 지하철을 탈 때부터 역 밖으로 나올 때까지, 말 그대로 '인파(人波)'에 쓸려 다녔죠. 학교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맛본, '어른 세계의 매운맛'이었습니다. 한 시간 넘게 걸려 출근하고 나면, 온몸을 주먹으로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죠.


 1주일 간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관리 부서에 배치됐습니다. 회사는 서울에 본사 영업부, 경기도 안양에 생산공장을 가지고 있었죠. 업무 확정 후 두 주정도 과장님을 쫓아다녔는데, 둥글둥글한 성격의 과장님은 특별히 뭘 하라고 지시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과장님이 일하는 걸 뒤에서 지켜보며, 주구장천 쫓아다니기만 했죠. 선배들의 적나라한 '어른식 농담'에 슬슬 적응이 될 즈음, 까칠하기로 소문난 선배를 따라 일을 나섰습니다. 업무용 차를 타고 공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저는 습관처럼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그렇게 한 20분쯤 졸았나, 갑자기 선배가 버럭 짜증을 냈습니다.


 "넌, 애가 기본이 안돼있냐!"


  잠이 확 깨더군요. 선배는 딱 그 말만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워낙에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죠. 의아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싶더군요.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조는 게 얼마나 매너 없는 짓인지, 나아가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학교에선 배운적 없었죠. 나중에야 친했던 선배가 에둘러 말해주더군요. 욕먹을만했다고요.


 '쿠사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장에 도착해 제품을 인수하는데, 제가 한 걸음 물러서서 마치 남일처럼 보고 있으니 선배가 인상을 구기며 나서더군요.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쌓아뒀던 화를 터뜨렸습니다. '지금까지 뭐 하고 다닌 거야? 놀러 다닌 거야? 회사가 학교야? 장난해?'. 정확한 워딩을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뉘앙스였습니다. 억울한 마음에 일단 '과장님이 뭘 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았다'라고 둘러댄 것 같은데, 사실 저부터도 당당하진 않았습니다. '뭔가 잘못하긴 했다' 싶었죠. 공장에서 퇴근해 전철을 타고 집에 오는데 묵직한 뭔가가 가슴을 짓누르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깨달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세계에 '배려 따윈 없다'는 깨달음, 선생님처럼 친절히 알려주길 기대했다간 '욕바가지가 되기 십상'이라는 깨달음 말입니다.


삶의 불확실성에 제 힘으로 맞서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 김어준


 사실 입사 동기생이 있었습니다. 그도 공고 출신이었는데, 저보다 더 남성스럽고 또한 어른스러웠죠. 그에게 의지하며, 때론 상사들 뒷담화도 나눠가며 직장생활의 생경함을 이겨냈습니다. 그렇게 석 달 정도 지났나, 동기가 갑자기 '자기는 진학해야겠다'며, '먼저 떠나 미안하다'며 퇴사를 하더군요. 많이 서운했습니다. 또한 외로웠습니다. 그와 달리 딱히 도망칠 곳이 없던 저는, 어떻게든 홀로서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까지 심적으로 학생과 직장인 사이 애매한 영역에 머물러있던 저는, 그즈음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떻게는 회사 안에 '제가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죠.


 그때부터 할 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원래도 느긋한 성격은 못되지만, 빨빨거리며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했습니다. 사무실 책장 한켠에 방치되어 있던 OA책을 가져와 엑셀을 바닥부터 배웠고, 딱히 쓸데도 없는 영자 자판도 익혀 나중에는 '재고 관리용 워크시트'까지 직접 만들었습니다. 제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담당 부장도 본격적으로 업무를 맡기더군요. 공장에서 완제품이 나오면 건물 지하 창고에 1차적으로 입고시키고, 들어오는 오더에 맞춰 전국 각지의 대리점으로 물건을 보내는 것이 제 주된 업무였습니다. 처음에는 못 미더웠는지 선배들을 동행시켰지만, 오래지 않아 모든 과정을 저 혼자 처리해야 했죠.


 타고나길 내향형이라 낯을 많이 가리던 저는, 더 이상 뒷짐 지고만 있을 순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제게 할당된 업무를 완수해야 했죠. 선배들의 과거 행적을 더듬어가며, 공장의 낯선 사람들과 부딪혔습니다. 그나마 안면이 조금 있던 공장 여직원에게 읍소해, 물건을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배웠습니다. 그녀도 상고출신이라 저를 많이 배려해 줬죠. 저답지 않게 더 많이 인사했고 더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평소 같음 말도 안 걸었을 사람들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물건을 받으면서도 '감사하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일처리가 수월해지니까요. 그런 경험들이 한 겹 한 겹 쌓여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쓰고 산다는 '페르소나(가면)'가 되더군요. 비로소 저도 '어른들의 세계' 위에서 춤출 자격을 갖춘 거죠.


[ image by DCWilliams from pixabay ]


 제가 다뤄야 할 제품은 다양했는데, 어떤 것은 패키징이 되어있어 한 박스가 60kg 정도 나갔습니다. 그걸 빠렛트 하나에 서너 개씩 쌓았는데, 그 무거운걸 자키(유압식 수동 끌차)로 끙끙대며 끌고 다녔죠. 당연히 혼자서요. 창고에 제품들을 쌓아놓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었죠. 자체 생산뿐 아니라, 외국 공장에서 들여오던 제품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제품이 10톤 트럭에 실려 100대 넘게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1층 로딩 독에 내려놓은 제품을 지하 1층까지 하루종일 날랐던 기억도 납니다. 그날 김밥한 줄 먹고 깜깜해질 때까지 일했었죠. 물론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요. 그때는 '먹고사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 것이려니'하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 조금 무심했다 싶기도 하네요.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저절로 머리를 쓰게 됐습니다. 제품의 이동 동선을 최대한 줄이는 거죠. 공장에서 출하하자마자 바로 대리점 보낼 수 있도록 제품 수령 일정을 조정하고, 창고 안에서도 무거운 물건은 최대한 쉽게 넣다 뺄 수 있도록 장비의 배치를 바꿨습니다. 창고에서 물건을 출고할 때도 몇 번씩 오가지 않도록 절정의 '테트리스' 실력을 발휘했고, 물건을 일부로 1층 로딩 독에서 인계받아 용달차 아저씨와 함께 싣기도 했었죠. 나쁘게 말하면 잔머리, 좋게 말하면 소위 '일머리'가 생긴 겁니다.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거죠. 나중에는 하루치 일을 훌쩍 끝내버리고 퇴근 시간까지 농땡이를 부릴 정도로, 일에 능숙해졌습니다. 물건을 실은 채로 자키를 무슨 킥보드처럼 타고 다니기도 했고요. 수시로 날아오는 부장님의 호출 삐삐를 적당히 무시할 정도로, '간뎅이'도 커졌습니다.


 이제 성인 딱지를 갓 뗀 핏덩이가 혼자서 아등바등 거리는 게 안쓰러웠는지, 공장 직원들도 차츰 마음을 열고 다가와줬습니다. 생산직의 대부분이 저와 비슷한 공고나 상고 출신들이어서,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죠. 서울 직원이라면 은근히 거부감을 보이던 형들도 막내인 제가 가면 편하게 대해줬습니다. 가끔 일이 겹쳐 못 내려가면 급하게 저 대신 물건을 출고해 줄 정도로, 한 두 명과는 각별한 사이가 됐죠.


 그렇게 1년 정도 흘렀나, 눈 감고도 일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게 익숙해지자, 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 하나 둘 보이더군요. 생산직 형들이 싫어하던 계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생산직 앞에서는 목에 힘을 '빡' 주며 까칠하게 굴던 사람이었죠. 나중에는 저도 만만해 보였는지, 자기 일을 은근히 저한테 떠밀더군요. 물론 그의 부하직원이 아니었던 저는, 대놓고 틱틱거렸습니다. 특히 혐오스러웠던 건, 본사 부장이나 공장 간부들 앞에선 보기 싫을 정도로 절절 기는 그의 태도였습니다. 꼭 선도부 선생님 앞, 죄 지은 학생 같달까요. 영화에서처럼 필요하다면 혓바닥으로 상사의 구두조차 닦을 사람으로 보이더군요.


 문제는 그가 생산직 출신이었다는 겁니다. 그도 공고 졸업생이었던 거죠. 꼭 그처럼 되지는 않겠지만, 공고출신이 열심히 해서 기껏 올라간 자리가 고작 ' 위치'라는 게, 마음에 안 들더군요. 뿐만아니라 그즈음 다른 생산직 형들의 모습도 하나 둘 에 들어왔는데, 다들 뭔가 의욕이 없어 보였습니다. 월급도 작고 제가 보기엔 미래가 안 보이는데도, 별 걱정도, 계획도 없더군요. 해맑은 건 좋지만, 해맑음을 넘어 무책임한 수준이랄까요. 하루하루 '어떻게 놀까'가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로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공고생의 미래가 이렇게 암울한 건가 싶었습니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던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낯선 표식을 보게 됐습니다. 수능 시험장을 안내하는 표식이었죠. '벌써 수능 때가 됐나'하고 그날은 그냥 흘려 넘겼는데, 한동안 그 안내 표식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더군요. 이후 본격적인 대입 시즌이 시작됐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입 정보를 알아봤습니다. '오호!' 다행히 가능성 있는 곳이 몇 군데 보이더군요. 꼭 수능을 보지 않아도 실업계 특별전형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들이 말입니다.


 그간 모은 돈은 단칸방 전세를 얻는데 다 들어간 터라, 남은 돈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퇴직금으로 입학금만 간신히 해결할 수 있었죠. 솔직히 이후 어떻게 해야 될지 대책이 안보였지만, 이 상태로 머무는 것보다는 낳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때우겠노라 마음 먹었죠. 물론 차비도, 책값도, 밥값도 없어서 이후 한동안 고생하게 되지만요. 사나흘 더 고민한 후 부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하지만 진학하고 싶다고요. 제가 대입을 원할 경우 보내주기로 담임 선생님과 약속하셨다며, 부장님은 퇴사를 허락하셨습니다. 저 때문에 맘고생 많이 하셨는데, 감사하게도 끝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죠. 감사합니다, 장 부장님.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 간의 사회생활을 마치고, 저는 다시 '학생들의 세계'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출처 : https://m.newspim.com/news/view/20211115001089]


 고참이 되어 후배를 받는 입장이 되니 알겠더군요. 열여덟, 아무것도 모를 때 했던 직장생활이 제게 무엇을 남겼는지 말입니다. 그때는 쓸데없는 짓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코 쓸데없는 짓만은 아니더군요.


  한 번은 신입 후배를 데리고 외부에 작업을 나가게 됐습니다.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 사립대 출신에, 공부도 무척 잘했다는 친구였죠. 작업을 하다 드라이버가 필요해서, '가서 일자 드라이버 좀 가져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드라이버를 가져오긴 왔는데, 커다란 일자 드라이버 딱 하나만 가지고 오더군요. 제가 무슨 작업 중이었는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그저 명령대로만 수행한 겁니다. 뭐, 잘못한 건 아니죠. 시킨 데로 했으니까요. 허나, 결국 너무 커서 다시 가져와야 했습니다. 쓸데없이 일을 두 번 하게 됐죠. 신입사원 시절, 초임지에서 제가 선배로부터 비슷한 요구를 받았을 때, 전 일자 드라이버를 크기별로, 혹시 모르니 십자드라이버까지 챙겨서 '뭉텅이'로 들고 갔었습니다. 어떤 크기가 필요한지 정확히 모르고, 무엇보다 두 번 왔다 갔다 하는 게 싫어서였죠. 그런 게 소위 '일머리'죠.


 열여덟, 낯선 공장에서 고군분투하며 배운 게 바로 '일머리'였던 겁니다. 어떻게 하면 빠르게 처리할까, 뭘 바꾸면 힘이 덜 들까,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겁니다. 당시는 혼자 일하는 단점을 극복해 보려고,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일하려고, 빨리 일 끝내고 예배나 가려고 잔머리를 쓴 것이었지만, 그게 적극적으로 일하는 습관을 시나브로 몸에 배게 한 겁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한 전략이, 저도 모르게 저만의 '무기'가 된 거죠.


 입사 후 11년 만에 차장 승진을 하게 됐습니다. 타 직종을 포함하여, 서너 명이 안될 정도로 빠른 승진이었죠. 승진소식을 외부에서 일하다 축하문자를 받고 알게 됐습니다. 기분 좋게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했는데, 먼저 일이 끝난 동료들이 쉬고 있더군요. 슬그머니 제 자리로 가려는데, 한켠에서 수다를 떨던 동기가 저를 보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이구, 차장님 오셨쎄요~"


 옆에 앉은 후배들도 덩달아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저는 서둘러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습니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요. 그들 옆으로 한 선배의 뒷모습이 보이더군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보다 기수가 높은 선배들을 줄줄이 추월해서 승진했기 때문이죠. 그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누군지도, 뭘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뭐 하겠습니까. 그저 '사람들 보는 눈은 다 비슷비슷했다'는 말하려는 겁니다. 제가 강점으로 여기는 부분이, 다른 사람의 눈에도 장점으로 보였다는 겁니다. 당시 전 부서를 옮긴 지 얼마 안 된 터라, 승진의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열여덟에 익혀뒀던 일머리'가 관리자들의 눈에도 가치 있게 보였던 게 분명합니다. 후배를 평가하는 입장에 선 지금은, 더 정확히 알 것 같습니다. 왜 제게 다른 이들 보다 '더 빨리 진급의 기회가 주어졌는지' 말입니다.




 당연하게도 열여덟 그 시절, 잘한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본사 1층 주차장에 물건을 잘못 내려놔 은행 방호 새시를 망가뜨린 적도 있었고, 제품을 나르다 남의 차 본넷트에 떨어뜨려 수리비를 된통 뒤집어쓴 적도 있었습니다. 돈 아낀다고 1년 가까이 점심을 라면으로 때우다 위 내시경만 네 번이나 받아야 했고, 거친 언행의 영업부 부장에게 반항하다 이사님께 '옐로우 카드'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때론 효과적으로, 때론 엉망징창으로 부딪혔던 열여덟, 열아홉의 시간들은, '일머리'라는 세 글자 속으로 고스란히 수렴됐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어른들의 세계'를 헤쳐나가는데 요긴한 무기가 돼주었죠. 정상적인 삶의 궤적으로 볼 때는 틀림없는 허튼짓이었지만, 더 긴 그림으로 봤을 때는 결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 겁니다.


 전 인생에 '악수(惡手)란 없다'고 확신합니다. 인생은 가로세로 15칸의 '닫힌' 바둑판이 아니거든요. 지금 둔 수는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집(家)'을 이루게 될 겁니다. 그래 당장은 악수라 여겨지고 무르고 싶더라도, 길게 보고 견뎌보시는 건 어떨까요. 양창순 박사의 말마따나 '우연과 변수와 아이러니의 총합'인 인생이, 반드시 다른 결과를 보여줄 테니까요.


 그래, 할 수만 있다면 열아홉의 저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마! 잘하고 있어'라고요.


[ image created by MS image creator ]


이전 05화 '블루오션'을 탐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