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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딘 May 08. 2024

'블루오션'을 탐하다.

 외부 현장을 돌아보며 후배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 업체 담당자와 주고 받을 신호 리스트를 확정한 뒤, 실내로 들어왔습니다. 오후 작업 내용에 맞게 시스템을 변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더군요. 야외 작업을 할때 가끔 마주치던 타부서 분이었습니다. 오며가며 안면은 있었지만, 제 업무와는 관련이 없는지라 특별히 인사하며 지내지는 않았죠. 워낙에 제가 붙임성있는 성격은 아니기도 하고요. 그래 모른척 제 일이나 하려는데, 이 분이 제 얼굴을 보자마자 웃으며 악수를 청하시는 겁니다. 다른 손으론 저를 향해 엄지를 치켜 세우시면서요.


"올린 글 잘 봤어요. 햐, 참."


 '어... 아, 아닙니다.' 엉겹결에 손을 맞잡고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귓 볼이 달아 오르더군요.




 글 하나당 50건의 조회도 못받는 '브린이' 입장에서 매번 한 건의 조회가 아쉽지만, 혹 기독교 신자시라면 이 글은 거르시길 권해드립니다. 돌아가지 않은 탕자, 앞으로도 영원이 돌아가지 않을 탕자, 아니, 애초에 '돌아갈 곳이란 없다'는 걸 깨달은 탕자의 넋두리거든요. 좋은 마음으로 읽으셨다, 괜히 마음 상하는 수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 의도로 쓰는 글은 아니지만, 굳이 시간내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 있겠습니까.


 고등학교, 직장생활 그리고 대학교 중반까지, 꽤 긴 시간동안 사로잡혔던 '테마'가 있습니다. 뻘짓을 말할 때, 이것을 빼놓으면 섭하죠. 신앙 생활, 곧 교회를 다닌 겁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당시 1년 365일 중 360일은 교회에 나갔던 것 같습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장년회, 청년회는 물론 한창 간절했을땐 평일 새벽기도도 나갔습니다. 그리곤 졸린 눈을 부비며 출근했었죠. 성경은 3번 가까이 완독했고, 복음 전달을 위해 개인용 메뉴얼(?)같은 것도 만들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야 기본이고, 전단지 배포, 전도, 가정탐방은 물론 매년 여름 겨울이면 5일씩 수양회에도 참석했었죠. 그만큼 열성적이었고,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불가지론(不可知論) 같이 애매한 입장이 아니라 확고한 무신론자죠. 무신론을 뒷받침할 나름 탄탄한 논리도 갖고 있습니다. 다만 말하면 싸움이 되니 굳이 언급하진 않죠. 그나마 믿는 것이 있다면, '과학과 철학과 불교의 교집합' 정도라 할까요. 어찌됐거나, 기독교에 들인 공이 엉뚱하게 불교로 이어져 버렸으니, 똥볼을 차도 제대로 찬 것이겠죠.


[image created by MS image createror ]


 대부분 그렇겠지만, 시작은 전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중3 겨울 방학중, 길을 가다 우연찮게 중학교 사회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미모는 보통이셨지만 거친 경상도 말투에 비해 가끔씩 귀여운 행동들을 하셔서 남자 애들이 다 좋아했었죠. 학교에서나 뵙던 분을 동네에서 만났으니 오죽 반가웠겠습니까. 선생님은 수양회 일정이 담긴 전단지를 내미시며 함께 가자고 제안하셨죠. 저는 가서 성경 이야기도 듣고, 레크레이션도 하고, 맛난 것도 먹는 일반적인 수련회를 기대하며 승락했습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거든요. 이후 이 결정을 땅을 치며 후회해야 했지만요.


 저희 교회는 일반 교회와 달랐습니다. 오직 성경만 파고드는 교회였죠. 제도권에 속해있지 않아, 소위 '이단'이라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수양회 4박5일 동안, 주야장천 성경 이야기만 듣게 될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반복하며, 한숨만 천번은 넘게 내쉬었던것 같습니다. 이 지옥(?)에 끌어들인 선생님을 원망하면서요.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워낙 시간이 길다보니 그래도 남는 것은 있더군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내 죄를 다 씼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4박 5일의 마라톤 같던 성경 공부가 '대속(代贖)이 어떤 배경하에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논리적으로 믿게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부분은 명확하게 이해되었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뭔가 고마웠고 영화처럼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랬더니 그걸 '구원'이라고, 저더러 하나님이 자식이 되었다고 그러더군요.


 감동은 분명 있었지만 그렇다고 삶을 바꿀만큼 강력하진 않았습니다. 납치범과 사랑에 빠지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잠시 미혹됐달까요. 감동은 쉬 달아났고, 곧 현실의 저로 되돌아왔죠. 수양회 이후에도 교회에 나가긴 했지만, 다분히 형식적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늘 지루했고, 예배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으며, 하나님은 여전히 남의 아버지 같았죠. 선생님과 교회 사람들의 종용에 못이겨, 한동안, 억지로, 띄엄띄엄 교회를 다녔었죠.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처럼 억지로 나간 예배에서 성경 말씀을 듣는데, 이 한마디가 마음에 박히더군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장 13, 14절)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습니다. 길고 긴 터널 끝에서 빛 한점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폭력적인 가장 덕에 가정은 풍비박산 났지만, 그런 제게도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부자들, 아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제가 이길 수 있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수가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걸으면 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블루오션' 아니겠습니까.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며, 처음 스스로 기도했습니다. 길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좁은 길을 함께 걷겠다고요. 이쯤되면, 이거 뭐,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하는 건가 싶으시겠지만, 오해 마십시요. 경험담을 말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겁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전 무신론자입니다. 아니, 모든 종교가 '만들어진 허구'라 믿는 사람입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교회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내 아버지로 느껴지고, 성경 이야기도 스폰지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죠. 예배가 끝나면 도망치기 무섭던 예전과 달리, 교회에 남아 학생부 아이들과 농구도 하고 탁구도 하며 어울렸습니다. 함께 교회에 다니는 형제, 자매님들이 하나같이 인간적으로 선하신 분들이라 더 빠르게 젖어들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의 몇 안되는 절친 중 하나가, 이때 만났던 친구이기도 하죠. 물론 이 친구도 더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변화를 눈치챘는지, 하나 둘 일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점심 배식, 교회 뒷정리, 주일 학교 선생님, 설교 테이프 정리 등,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이 떨어졌지만 기쁜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하나님은 종을 통해 일하시므로, 종을 섬기는 것,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뜻을 받드는 것'이라 믿으면서요. 당시 폭력범으로 투옥되었던 '육신의 아버지'가 석방돼 본격적으로 할머니와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에라도 더 몰입하게 됐었죠.


 대(大)목사님의 서울 강연회가 있을 땐 동네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돌렸고,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을 땐 성경책을 펴놓고 두 시간 넘게 논리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절정은 직장을 다닐 땐, 여름, 겨울 휴가 시즌마다 연차휴가를 내고 교회 수양회로 달려간 거죠. 피같은 휴가를 집중 성경공부를 하는데 쏟아부은 겁니다. 나중엔 수양회에 가서도 설거지 봉사, 테이프 복사 봉사등을 하느라, 일할 때보다 더 피곤하게 지냈었죠. 헌금으로 낼 돈은 많지 않으니, 몸으로라도 떼우자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다하다 나중엔 회사를 때려치우고 교회 신문을 만드는 출판사에 들어갈까도 고민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확실히 미치긴 미쳤었던 것 같습니다.


[ image created by MS image creator ]


 그렇게 미친듯이 교회를 다닌지 4년 정도 흘렀을까요. 모든 게 익숙해지며 구원의 감사도, 말씀의 감동도 슬슬 무뎌져 가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저녁 예배를 하러 가던 중, 교회 앞에 도열해 있던 양복 무리들을 보게 됐습니다. 어떤 분이 대형 승용차에 올라타자, 양쪽에 도열해 있던 양복쟁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꺽어가며 인사 하더군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대목사님과 서울, 경기 인근에 목사님, 전도사님들이었습니다. 대목사님이 우리교회를 방문하셨는데, 그를 보기위해 다들 모이셨던 거죠. 뭐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럴 수는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여기서 열과 성의를 다해 잘 풀리면, 결국 저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겠지. 그런데, 고작 그거라면, 좀 별로지 않나.'

 

 미친듯이 노력해봐야 기껏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그들 중 하나라는 게 마음에 안들더군요. 교회 생활을 할만큼 했으니, 목사님, 전도사님들의 삶이 어떤지는 대충 알고 있었으니까요. 고작 저 목표에 닿으려고 이렇게 뛰어다니는 건가 싶더군요. 애초에 '블루 오션'이라 생각했던 이 길이, 결코 기대했던 블루오션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겁니다. 목사님이 되도, 전도사님이 되도, 부자들을 이길 순 없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저는 하나님을 믿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현실 너머의 영적 세계를 소망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이용해서 현실의 가난을 극복하고 '부자와 평범한 이들'을 발 아래 두려 했었던 거죠. 한마디로 '엉뚱한 블루오션'을 탐했던 겁니다.


 그맘때엔 전도에 대한 압박 또한 심하게 느꼈습니다. 어느정도 성장한 신도는 전도를 통해 불쌍한 영혼들은 구제해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거든요. 나는 그저 하나님만 믿고 싶은데, 좋은 말씀만 듣고 싶은데, 전도하지 않으면 무슨 죄를 짓는 것같은 분위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나중엔 이게 '다단계와 다를 게 뭐냐'라는 한심한 원망도 하게 됐죠. 그런 마음들이 한겹 한겹 쌓이자, 교회를 드나드는 시간은 차츰 줄어들었고, 결국에는 스스로 발길을 끊게 되었습니다.


 후 '시험에 들었다'며 설득하러 오는 분들에 저항하고자, 공부하기 시작습니다. 예수의 생일에 왜 3명의 동방박사가 따랐어야 했는지, 왜 그의 생일이 12월 25일이어야 했고 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하필 3일만에 부활하셨는지, 오병이어의 기적은 왜 2마리의 물고기였고 구약에서 왜 그토록 많은 소와 양을 죽여댔는지를 학문적 입장에서 공부하고 익혔습니다. 신약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토록 믿고 따랐던 성경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비판적으로 성찰했습니다. 당신들이 틀리니 제발 나 좀 내버려 두라 말하려고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 태도가 워낙 단호해 한 두번 찾아온 후 더는 오지 않더군요. 앞서 밝혔듯이, 이 시기엔 공고에서 익힌 늑대의 심장도 함께 날뛰고 있었으니까요.


[ 그림출처 : http://www.sonaki.pe.kr/earth/db/e409.htm ]

 

 그 시절은 그렇게 헛발질로 끝나고 말았을까요? 그랬다면 이 재미없는 이야기, 쓰지도 않았습니다. 이 시기는 제게 어떤 뜻밖에 선물을 안겨주는데, 그게 무엇이냐, 바로 '관념적 사고를 다루는 능력'이었죠.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과 예수님은 오감으로 감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도, 대속도, 은혜도, 성령도, 하나님의 사랑도, 철저히 현실에는 '없는 것'들 입니다. 그들의 역사를 다룬 성경의 이야기 또한 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죠. 그저 글을 통해, 구전을 통해 보고들을 걸, 머리속에서 떠올리고 기존의 관념과 엮어가며 새로운 결론을 도출해 내죠. '하나님은 성경의 이 구절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고 싶었다'라는 식으로요.


 그런 이야기를 늘상 보고 듣고, 또 내 입으로 전달했으니 '관념'을 다루는 능력이 왜 안 커졌겠습니까. 그 시절이 뇌의 '추상적 사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이었으니, 게다가 자발적으로 그 과정에 몰입까지 했으니, 관념적 사고능력이 성장 안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죠. 그 결과, 대학시절은 물론, 지금까지도 이 능력은 제게 아주 요긴한 무기가 됩니다. 엔지니어에게 관념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건, '글(文)에 능숙한 무(武)관'과 같은 느낌이니까요.


 한번은 직장 생활 중에 인트라넷에 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대외 환경 변화로 회사의 미래가 급격히 암울해지는 상황이었죠. 공대 출신의 엔지니어는 배정된 일 잘 처리하고 장비 관리에만 신경쓰면 됐습니다. 그게 엔지니어에게 기대하는 바였죠. 그런데 보이는 게 있더군요. 이 변화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지, 어떤 문제가 그 변화를 몰고 온 건지, 이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어떤 스탠스를 가져가야 하는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더군요. 그래,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거대 담론에 대한 이탈 심리'를 주제로 에세이를 썼습니다. 딱히 배운적은 없지만 관념을 다루는 데는 익숙했으니까요.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왔으니 다른 방식으로도 생각해보자는 의도였습니다.


  두 달 정도 걸려 글을 완성했고, 오전에 인트라넷에 올려놓고는 외부로 일을 나갔습니다. 현장을 돌아보며 후배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 업체 담당자와 주고 받을 신호 리스트를 정리한 후, 내부로 들어왔습니다. 오후 작업 내용에 맞게 시스템을 변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더군요. 야외 작업을 할때 가끔 마주치던 타부서 분이었습니다. 오며가며 안면은 있었지만, 제 업무와는 관련이 없는지라 특별히 인사하며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제가 붙임성있는 성격은 아니기도 하고요. 그래 모른척 제 일이나 하려는데, 이 분이 제 얼굴을 보자마자 웃으며 악수를 청하시는 겁니다. 다른 손으론 저를 향해 엄지를 치켜 세우시면서요.


"올린 글 잘 봤어요. 햐, 참."


 '어... 아, 아닙니다.' 엉겹결에 손을 맞잡고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귓 볼이 달아 오르더군요. '본인도 비슷한 생각은 했는데 콕찝어 말은 못했었다'라고 하시더군요. 게시판에 들어가 봤더니 찬성에 숫자가 엄청 올라가 있었습니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도 여러 건 날아왔죠. 고맙다고, 잘 읽었다고, 이런 분석 글 종종 올려달라고 하면서요. 비행기 타듯 기분이 붕 들떴지만, 한편으론 부담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잘 알거든요. 제가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요. 다 어린시절 교회를 다니며 익힌 '관념을 다루는 법' 덕에, 우연히 얻어 걸린 결과라는 걸 말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는 철학입니다. 분야도 다양하고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눈이 돌아가지만, 한번씩 철학자들이 구축한 개념을 이해할때면 그 쾌감에 전율하곤 하죠. 그 개념들을 일상의 모습과 엮어보는 게 제가 늘 생각하는 과제입니다. 출간에 실패하고 곳간에 묵히는 중이지만, 책도 한권 썼습니다. 이 또한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관념론입니다. 이래저래 머리속으로 공상하고 현실로 풀어놓는 걸 즐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왜일까요? 때문이겠습니까? 누구도, 단 한번도, 저더러 철학을 배우라, 인문학을 공부하라 강요한적 없었는데 말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제 생각의 뼈대를 말하라면, 저는 '불교 철학'을 언급합니다. 종교로서가 아니라, 철학으로서 불교 사상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차이를 설명하라면 또 한참 떠들어야 하니 각설하고, 그런 의미로 보자면 교회에 투자했던 시간들은 참 쓸데 없었습니다. 지금은 불교에 의지할 뿐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니까요. 그렇다고 그 시간이 아무 의미없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 또한 한 조각 '빛나는 모자이크'가 되어 저를 이뤘으니까요. 결과로써는 틀림없는 뻘짓이지만, 과정으로서는 더할 나위없는 훈련의 시간이었으니까요.


 어디 평범한 제 인생만 그럴까요. 왜 여러분의 인생은 안 그렇겠습니까. 삶을 자꾸 점으로 생각하고 섯불리 결론 지으려 하니, 실패가 나오고 좌절이 나오는 겁니다. 삶은 선이고, 면입니다. 다 완성되고 나야 비로소 결과를 알 수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스스로가 그렇다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퇴근 길, 지하철역 입구에서 전도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쪽지를 주시며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말하시는군요. 할 말은 많지만 굳이 전단지를 받아들고 대꾸는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됐거나 저는 천국 대신,


 따로 '받은 게'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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