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에서 신작로로 접어드니 길 곳곳에 어둠이 웅덩이처럼 깔려 있었습니다. 신작로엔 가로등이 많지 않았죠. 두 번째 웅덩이에 들어설 때쯤, 놈들이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야! 야! 너, 가방!'. 멈춰서 돌아서니, 웬 남자 셋이 저를 마주 보고 서더군요. 조금 전, 대로에서 스쳤던 놈들이었습니다. 어디서 훔쳐 입었는지 셋 다 롱코트를 입고 있더군요.
'너, 몇 살이냐?'
가운데 선 놈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습니다. 희미했지만 앳된 얼굴들이었죠. 많아봐야 고딩정도 됐을까요. 피식,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놈들이 따라 웃더군요. 순간,놈의 이마를 머리로 들이받았습니다.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 잡고 좋은 배우자 만나 화목한 가정 이루는 거, 소시민들의 꿈이죠. 기왕이면 한 번도 좌절하지 않고 직선도로를 내달리듯 승승장구하면서요.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저는 첫 단추부터 잘 못 끼운 셈입니다. 애초에 대학 같은 건 생각조차 안 했거든요.
인생 관점에서 저지른 뻘짓이 있다면, '공고 진학'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공돌이'가 된 거죠. 사실 중학교 때 성적은 실업계에 가야 할 만큼 나쁘지 않았습니다. 운 좋게 공부머리가 트여 성적으로는 제 앞에 몇 아이 없었거든요. 서울 강북 외각의 조그만 중학교라 잘해봐야 얼마나 잘했습니까만, 적어도 인문계 갈 정도는 됐습니다. 허나, 선생님이 외고와 인문계를 언급하시며 조심스럽게 진로를 물으셨을 때, 전 공고를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대학 등록금 대줄 사람 아무도 없다는 거, 뻔히 알고 있었거든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할머니의 말마따나, 얼른 기술 배워 돈이나 벌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시험 보고 들어가는 공고를 선택해, '하향 지원'의 아쉬움을 달랬었죠.
공고 현장 실습으로 나간 직장에서 2년 정도 근무 후 다시 대학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으니, 동년배들에 비해 꽤나 돌아온 셈입니다. 그나마도 공고생 특례전형이 있던 대학에 간신히 들어간 거라, 학벌 같은 건 기대조차 할 수 없었죠. 아니 오히려 받아 준 것에 감지덕지해야 했죠. 공고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문사철의 지식들은, 대학 시절 내내 은근한 열등감으로 작용했고요. 그래 결과만 놓고 보자면 공고 진학은 분명 효율적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소시민의 꿈'을 두고 셈 했을 때, 쓸데없이 버린 시간이 너무 많았달까요.
하지만 '모든 선택은 어떻게는 내가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고에서 보낸 3년의 시간 또한 예외는 아니었죠. 그래,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공고 생활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식 고등학교가 버스로 30분만 넘어도 멀다, 힘들다 난리가 날 테지만, 전 등교를 위해 1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하염없이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꺾어져 내려와, 또 하염없이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죠. 내려서도 학교까지 제법 걸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졸며 보냈으니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고등학생이 등하교로만 근 3시간을 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참 어리석었던 게, 좀 걸어가서 다른 버스를 탔으면 40분이면 됐던 길을, 입시 안내장에 적힌 버스대로 탄다고 굳이 뺑 돌아갔었죠. 그걸 입학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죠. 그 정도로 융통성이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인간관계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흔히 공고하면 날라니나 되바라진 아이들이 많을 거라는 편견이 있죠.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제 눈에는 평범하고 순박한 아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애들끼리 왕따 시키고 돈 뺐고 괴롭히는 건, 중학교 때가 오히려 많았죠. 어쩌면 다들 내색하진 않았지만 인생에서 첫 번째 '공식적인 좌절'을 맛본 아이들이 모였기에, 서로에게 조금 더 관대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뒷자리에 앉았던 한 애는 겉모습은 완전히 날라리였습니다. 공부를 접은 건 말할 것도 없고 담배는 기본이요, 애들이랑 모이면 늘 여자이야기로 바빴죠. 이 놈이 제 뒤에 앉게 됐을 때, 예전에 괴롭힘 당했던 일이 생각나 솔직히 긴장했었습니다. 또 시작인가 싶었죠. 그러던 어느 날, 같이 교실 청소를 하게 됩니다. 다들 하는 둥 마는 둥 보이는 쓰레기만 치우고 말았는데, 이 녀석이 빗자루로 여기저기 꼼꼼히 쓸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 땀까지 뻘뻘 흘려가면서요. 감시하는 사람도 따로 없어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말입니다. 녀석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더군요. 사람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거 아니구나 싶더군요. 나중에 더 자세히 알게 됐지만, 공부에 취미를 잃어 그렇지 은근 성실한 아이였습니다. 자기는 지저분한 게 싫다더군요. '너 날라리치곤 쫌 멋있다'로 시작해, 녀석과 꽤나 가깝게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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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놈은 별명이 '흑곰'이었는데, 얘는 수업시간이면 늘 잠만 잤습니다. 성적은 당연히 좋지 않았죠. 하루는 친구들과 떠들다 이름을 빨간색으로 쓸 일이 있었는데, 친구 하나가 이름을 빨간색으로 쓰면 안 된다고 짜증을 부리더군요. 재수 없다면서요. 저도 아차 싶어서 지우고 다시 쓰려는데, 엎어져 자는가 싶던 흑곰이 고개를 들며 말하더군요. 빨간색으로 써도 된다고요. 예전에 중국 왕실에서 이름을 빨간색으로 썼는데, 혁명 후 왕족을 척살할 때 빨간 이름으로 그들을 구분했던 게, 우리나라에 와전된 거라나요. 뜨억. 처음 알았습니다. 또 한 번 충격이었죠. 흑곰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더군요. 나중에 알았지만 녀석은 '역사 덕후'였습니다. 성적이란 틀에 맞춰 억지로 한 줄로 세워 그렇지, 아이들은 나름의 방향으로 각자 성장하고 있더군요. 이 녀석 지금은 뭐 하고 사나 궁금하네요.
'옥상으로 올라와!'
공고시절 가장 겁나던 멘트가 있었다면, 기능반 선배가 내뱉던 저 말이었습니다. 공고는 중학교 때처럼 교과 수업을 받는 교실동과, 직접 장비를 만지는 실습동에서 수업을 병행했습니다. 실습동에는 기능반 선배들이 상주하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기능대회 수상을 통해 공대 진학을 꿈꾸던 학생들이었죠. 선생님을 도와 실습을 보조하는 한편, 실습동의 실질적 군기 반장 역할도 했습니다.
첫 번째 실습동 수업이 끝나자마자, '옥상으로 올라와' 명령이 떨어졌죠. 수업에 집중 안 하고 떠들었다나요. 넓디넓은 옥상 한쪽에서 쭈뼛거리며 기다리는데, 기능반 선배 둘이 올라오더군요. 느릿느릿 걸어오던 그들은 옥상 한편에 쌓여있던 PEC 전선관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곤 한 명씩 엎드리게 해 때리더군요. 부웅, 부웅, 바람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맞았습니다. 안이 비어있는 관이라 소리도 잘났죠. PEC관은 연해서 그런지 그 많은 애들을 때렸는데 부러지지도 않더군요. 첫날이라 몇 대 맞진 않았지만 군기는 확 잡혔죠.
물론 선생님들도 저희가 맞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관했죠. 아니 용인했습니다. 전기는 자칫하면 인명사고를 일으킬 수 있거든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애들을 데리고 전기를 만지려면, 군기 반장이 꼭 필요했을 겁니다. 당시는 좀 억울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습니다. 아무튼, 그때부터 우리는 수시로 옥상으로 불려 가 맞았습니다. 실습 중에 시끄럽다고 맞고, 실습장이 지저분하다고 맞고, 실습 도구들 정리 안 했다고 맞았습니다. 화기애애하게 실습을 하다가도 기능반 선배가 등장하면 분위기가 '싸~'해졌죠. 개미 걸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습니다. 하다 하다 나중에는 금속 파이프로도 맞았습니다. 그건 선을 넘었다 싶었는지, 누군가 일러 제지당하긴 했지만요. 그 와중에도 약삭빠른 놈들은, 뼈가 아리다며 한 두대 말고 말더군요. 그런 재치(?)가 있을 리 없던 저는, 결국 몸으로 다 받아냈죠. 그렇게 얻어맞으며 우리는 조금씩 공고생의 형태를 갖춰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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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동 하면 재미있는 기억이 여럿 있습니다. 초창기 테스터의 사용법을 잘 몰라, 엉뚱한 탭을 선택하고 전기 콘센트에 테스터 팁을 찔러 넣었는데요, 순간 '빠지직'하며 불꽃이 튀더군요. 깜짝 놀라 테스터를 던져버리고 물러나서 봤더니, 쇠로 된 팁이 반이나 녹아 뭉쳐있었습니다. 콘센트는 까맣게 탔고요. 그때 '전기는 무서운 거'라는 걸 제대로 배웠죠. 호기심에 샤프심을 콘센트에 찔러 넣는 짓, 못하게 하십시오. 손가락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한 번은 실습동 시멘트 복도를 물청소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한 친구가 장난을 치다가 양동이에 퍼온 물을 그만 벽에 끼얹었습니다. 다른 친구를 맞추려고 했는데 이놈이 피한 거죠. 하필 넓디넓은 벽 가운데 콘센트가 있던 자리에 물이 뿌려졌고, '퍼벅' 터지는 소리와 함께 실습동 전체의 등이 일제히 꺼졌습니다. 기능반 선배를 비롯해 선생님들까지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다 튀어나왔죠. 하얀 연기가 천정을 매웠고, 콘센트는 검게 그을린 채 녹아 있었습니다. 양동이를 손에 든 채 반쯤 넋이 나간 놈을 보며 우리는 조용히 킥킥댔는데, 그랬다고 또 옥상으로 끌려가 맞았습니다.
'선생님' 하니 에피소드가 하나 떠오르네요. 공고 시절 내내 '감전된 사람을 보면 절대 만지지 말고 발로 차라'고 배웠습니다. 2차 감전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거죠. 어느 날 옥내(실내) 전기공사 실습을 하는데, 제자리 건너편에서 '어~~'하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이어 '쿠다당' 뭔가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죠. 뭔 일인가 싶어 가봤더니, 모인 아이들이 제각기 킥킥거리고 있는 겁니다. '뭔데?'하고 물어보니, 어떤 친구가 기구를 잘못 건드려 감전이 됐는데, 그걸 지켜보던 선생님이 '왜 그래?' 하며 어깨를 잡으셨답니다. 절대 하지 마라던 짓을 본인이 하신 거죠. 즉시 선생님도 감전됐고, 감전된 선생님이 '어~~'하고 신음소리를 내신 겁니다. 놀란 기능반 형이 옆에 있다가 발로 차서 풀려났죠. 바닥에서 일어난 선생님은 겸연쩍어하며 내빼셨다나요. 뭐, 아는 것과 직접 하는 건 다른 법이니까요.
말하다 보니 너무 추억에 젖었었네요. 아무튼 우리는 공고 시절 내내 '모양을 만들기 전 쇳덩이(주괴)'처럼 얻어맞으며 단련되었습니다. 교련 수업받다가 틀린다고 기합 받고, 반 대항 씨름 응원하다 성의 없다고 얻어맞고, 과대항 체육대회 응원하다가 개판이라고 옥상으로 끌려가며, 정신적으로 단단해졌습니다. 그 무섭던 기능반의 옥상 집합도, 새파랗던 하늘과 웃자란 나무들이 눈에 들어올 만큼 나중엔 익숙해졌죠.
처음엔 그렇게 순진해 보이던 녀석들도, 2학년 중반쯤 됐을 땐 '태'가 달라졌습니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누구 하나 절대 기죽는 법이 없었죠. 압도적으로 강한 애 앞에서야 아니었지만, 애초에 그런 애들은 싸움에 휘말리지도 않았습니다, 땅딸보가 백곰 같은 애랑 싸워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덩치에서 밀린다 싶으면 바로 걸상부터 뽑아 들었죠. 저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 체구에 두 배 되는 애랑 붙었을 때도 전혀 밀리지 않았습니다. 교실에선 걸상을, 실습동에선 반자동 드라이버나 쇠파이프를 뽑아 들었죠. 중학교 시절, 마른 '풍선 인형' 같던 겁쟁이는 어느덧 제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물론 대부분 실제로 싸우지는 않고 서로 으르렁대다 말았지만, 교과 수업과 별개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지 배우게 된 겁니다. 야생에 내던져진 '어린 늑대'처럼 말입니다.
공고 졸업 후 잠깐의 직장생활을 거쳐 대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사이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여기선 일단 패스하고, 대학교 2학년 때쯤인가, 어느 날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겨울 파카를 입고 있었으니 아마 12월이었을 겁니다. 차가 다니는 대로변을 걷고 있는데 웬 남자 셋이 저를 스쳐 지나가더군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둘 인가요.
대로에서 신작로로 접어드니 길 곳곳에 어둠이 웅덩이처럼 깔려 있었습니다. 신작로엔 가로등이 많지 않았죠. 두 번째 웅덩이에 들어설 때쯤, 누군가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야! 야! 너, 가방!'. 멈춰서 돌아서니, 남자 셋이 저를 마주 보고 서더군요. 조금 전, 대로에서 스쳤던 놈들이었습니다. 어디서 훔쳐 입었는지 셋 다 롱코트를 입고 있더군요. 아마 어두운 곳에 들어갈 때까지 참고 따라왔던 모양이었습니다.
'너, 몇 살이냐?'
가운데 선 놈이 얼굴을 들이밀며 묻더군요. 희미했지만 앳된 얼굴들이었습니다. 많아봐야 고딩정도 됐을까요. 피식,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놈들이 따라 웃더군요. 순간 놈의 이마를 머리로 들이받았습니다.헤딩이었죠. 그러자 옆에 있던 키 큰 놈이 제게 주먹을 날렸고, 귀를 맞은 저는 놈의 옆구리에 스트레이트를 먹였습니다. 주먹에 맞은 녀석은 뒤로 대여섯 걸음 물러서서 저를 쳐다 보더군요. 휙 돌아보니 나머지 둘 중, 한 놈은 이마를 붙들고 있었고 다른 놈은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나올지 전혀 예상 못했던 거죠. 순간, 아주 짧은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내, '이리 안 와!' 고함을 지르며 제가 달려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달아나더군요. 영화 배트맨의 날개처럼 코트자락을 휘날리면서요. 가로등 밑, 환한 불빛에 다다라서는 더 이상 좇지 않았습니다. 저도 제정신이 돌아왔거든요.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현명한 대응은 아니었습니다. 칼이라도 숨기고 있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죠. 지금이라면 조금 더 안전한 방법을 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땐 설사 칼을 뽑았다 해도 싸웠을 겁니다. 가방이라도 던지고 안 되면 하다못해 돌멩이라도 집어 들었겠죠. 싸움은 실력이 아니라 '기세'로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공고 시절에 단련된 '늑대의 심장'이 제 안에서 피를 뿜어대고 있었으니까요.
"고립된 개체로서 성격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객관적 맥락 속에 선행하는 주관적 관점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 심리학자 김정운'
흔히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고 말하죠. 성격은 그만큼 잘 안 바뀌니까요. 허나 심리학자들은 강조합니다. 성격은 안 바뀌지만 상황을 처리하는 '대응 방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요. 동일한 문제 상황일지라도 어떻게 단련했는지에 따라 분노로 대응할 수도, 미소로 대응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제게 공고 3년의 시간은, 세상에 대처하는 '대응 방식'이 바뀐 시기입니다.제 성격의 대부분이 그 시절에 완성되었죠. 함께 일하는 동료들로부터 그런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심장이 단단하다고', '외유내강'이라고. 평소엔 몰라도 싸울 땐 무섭게 싸우거든요. 사람들 시선 따위 신경도 안 쓰죠. '면 대 면'으로든 '글 대 글'로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뭐 일하다 청와대 경호관 하고도 붙었으니 말 다했죠. 물론 그게 늘 옳았던 건 아닙니다. 싸우고 괜한 짓 했다, 후회한 적도 많습니다.
허나 만약 좋은 부모 만나 정석대로 인문계에 진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더 빨리, 더 알찬 지식을 품고,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었겠죠. 지금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버스하나 제대로 못 타 1시간씩 에둘러 다녔던 '꽉 막힌 샌님'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사람을 겉모습과 데이터로만 판단하는, 좁디좁은 스펙트럼 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틀림없이 아닐 겁니다. 제 성격은 제가 잘 알죠.
그래, 공고 진학은 '소시민의 꿈' 차원에선 틀림없는 뻘짓이었지만, 인생 전체를 두고 보면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인문고를 갔다면 지금의 저는 결코 없었을 겁니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공고의 시간'도 모자이크처럼 제 일부가 된 겁니다. 전기공사 기능사, 전기기기 기능사를 따며 들였던 시간들은 진학하는 데는 하등 쓸모가 없었지만, 인생 전체에서 보면 수영이나 자전거를 배운 것처럼 다 몸에 남아 있습니다. 덕분에 선풍기도, 헤어 드라이기도, 전등도 납땜질해가며 제가 다 고치는걸요. 그러니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치 않는 방향을 걷고 있다 해도, 실망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좌충우돌하며 굳은살을 키워 가는 게, 인생의 옳은 방향이라 믿습니다. 그 시간도 언젠가는 당신의 일부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