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 슛이 림에 맞고 튕겨나오자, 상대편이 공을 잡았습니다. 바로 패스를 했는데, 순간적으로 미스매치가 나서 10cm나 작은 제가 상대를 막아야 했죠. 그는 우리편 코트로 빠르게 드리블해왔고, 3점 라인을 지나자마자 수비하던 저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대로 슛을 쐈습니다. 두어걸음 물러서 있던 저는 수직으로 솟아 올랐고, 힘껏 공을 내리쳤습니다. '팡!' 경쾌한 소리가 연수원 체육관에 울려 퍼졌습니다.
'매서운 바람과 소용돌이 치는 물결(疾風怒濤)'의 시기 답게, 중고교 시절 많은 뻘짓들을 저질렀습니다. 중1 체육시간 땐 짜증을 풀겠다고 운동장을 굴러다니는 배구공을 냅다 찼는데, 이게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어떤 선배의 머리를 맞췄습니다. 재수없게도 그는 소문난 날라리였죠. 수업 시간이라 어쩌지 못했던 그는, 종례 시간이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저를 화장실로 끌고갔습니다. 대걸레를 발로 밟아 목을 뿌러뜨리는 거, 전 그때 처음 봤습니다. 죽었구나 싶었던 그때, 두둥, 초록색 완장을 찬 선도부 형이 구세주처럼 등장했습니다. 그는 이 날라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죠. '1학년, 얼른 니네 반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쭈뼜거리며 나왔습니다. 교실에 가자마자 가방을 들고 부리나케 튀어서,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중 2땐 집에 있던 유일한 군것질 꺼리 '멸치 조림'을 먹고 키가 쑥쑥 커서, 애들 믿고 까부는 같은 반 날라리를 겁없이 건든 적도 있습니다. 우리동네 오락실에 왔길래 한판만 시켜달라고 귀찮게 굴었었죠. 그랬다가 이 놈과 함께왔던 패거리가 우르르 몰려와 하마터면 몰매를 맞을 뻔 했습니다. 인근 공사장으로 끌려갔었는데, 때마침 공사장 관계자가 등장한 덕에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죠. '1000m 달리기' 체력장 시험을 볼 땐, 잘 뛰는 친구 따라 뛰기로 사전에 다 약속해놓고, 무슨 '근자감'인지 혼자 오버페이스를 하다 시험을 망칠뻔하기도 했습니다. 죄다 추월당하고 끝에서 두번째인가 세번째로 간신히 통과했답니다. 옆구리가 아파서 마지막엔 거의 걸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중에서도 특별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이겁니다. '제자리 높이 뛰기'. 우리끼리는 '서전트 점프'라 불렀는데, 구체적으로는 '누가 더 높은 곳에 손자국을 찍나'였습니다.
중3 저희 반은 갑작스럽게 늘어난 정원을 감당하려 임시로 만들어진 반이었습니다. 미술실로 쓰던 공간을 교실로 개조한 거라 좌우 폭도 넓었고 앞 뒤 길이도 상대적으로 길었죠. 애초에 미술실이 두개의 교실을 합친 뒤 1.3배의 공간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천정을 보면 두개의 교실을 구분짓는 '보'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죠. 공간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천정을 가로로 질러 잇는 기둥'이 있었다는 겁니다.
보가 있거나 말거나, 어차피 천정에 붙어있는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다들 게의치 않았는데, 어느날 뒤쪽에 앉는 키 큰 친구 하나가, 제자리 높이 뛰기로 '문제의 보'에 손이 닿은 겁니다. 정확히는 손가락이죠. 보의 높이는 바닥에서 부터 대략 2.5m 정도 됐던 것 같습니다. 애들끼리 '닿을 수 있네, 없네'하며 내기를 벌이다 실행에 옮긴 것이었죠. '와, 저기 손이 닿네, 점프력 좋다'하고 말면 그만인데, 여기에 남자애들 특유의'경쟁 심리'가 작동합니다. 지루했던 교실에 놀이감이 등장한 거죠. 키가 좀 된다 싶었던 애들은 수시로 점프를 해댔습니다. 정석대로 서전트 점프를 하기도 하고, 어떤 애들은 도움닿기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애들은 교실 밖에서부터 달려와 뛰어 오르기도 했었죠. 간신히 닿았던 애들은 환호를 질렀고, 애매한 애들은 닿았네, 말았네 하며 핏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멸치 조림덕에 키가 반에서 중간은 넘었던 저도, 당연히 도전했습니다. 뛰어올라 손을 쭉 뻗었는데 1, 2cm정도 모자라더군요. '어라, 조금만 하면 나도 닿겠는데' 싶었던 저는, 그때부터 틈만나면 뛰어 올랐습니다. 자꾸 뛰면 애들이 먼지난다고 뭐라하니, 일찍 등교해서 애들없을 때 한 두번, 점심시간에 한두 번, 끝나고 청소할 때 한두번, 그렇게 짬짬이 뛰었습니다. 그렇게 한달쯤 지났나, 점프하는 근육도 근육이라고 자꾸 사용했더니 진짜로 늘더군요. 드디어 보의 모서리 부분에 손 끝이 닿은 겁니다. '에이, 니가?'라며 안 믿는 애들이 있어, 바닥에 손을 문질러 먼지를 뭍힌 뒤 다시 뛰어 올랐습니다. 그랬더니 손가락 자국이 보의 모서리에 살짝 찍히더군요. 아, 그때의 그 짜릿함이란.
안타깝게도,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최초에 손닿기를 시작했던 친구가, 콧방귀를 뀌며 제 손자국 보다 2cm나 높은 곳에 새로운 자국을 찍은 겁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양 어깨를 들어보이면서요. 얘도 계속 뛰었었는지 전보다 더 높이 뛰었습니다. 제가 170cm 초반이었고, 이 친구는 180cm에 가까웠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였죠. 그런데도 오기가 생기더군요. 원래 남자들이 가끔씩 이상한 것에 꼳히잖아요. '이미 2cm 늘렸는데, 3cm는 왜 못 늘리겠어'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경쟁은 시작됐습니다. 대게는 이 놈이 높은 곳에 손가락 자국을 찍으면, 제가 죽어라 뛰어올라 그 높이에 맞추는 식이었죠. 다른 애들도 덤벼들었지만, 마지막까지 뛴 건 결국 녀석과 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 최종 결과는 어떻게 됐나고요? 아쉽게도 승부를 가리진 못했습니다. 봄에 시작했던 우리의 점프는 학년이 다해 중학교를 떠날때까지도 이어지는데요, 점점 보의 정점을 향해 이어지던 손자국은 결국 보를 벗어나 천정까지 닿게 되죠. 녀석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요. 보가 대략 30cm 정도 높이였으니 1년동안 무려 30cm가량 손자국이 높아진 겁니다. 둘 다 천정에 닿았으니 더는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죠.
사실 여기에는 약간의 비밀이 있습니다. 물론 1년 사이 지금 키의 95%까지 커진 것도 한 몫 했지만, 선천적으로 제가 팔이 길고 손이 큰 체형이거든요. '차렸 자세'로 손가락을 펴면 무릎 위 15cm까지 닿습니다. 거의 오랑우탄 수준이죠. 애들은 천정에 찍히는 손자국만 보니 제가 엄청나게 뛰어올랐다 생각하겠지만, 실은 팔이 길고 손이 큰 게 더 영향이 컸었죠. 이 종목에 한해선 뭐, 이것도 타고난 재능이라면 재능이겠네요.
공고로 진학한 이후에도 이 뻘짓은 한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남자애들 경쟁 심리야 어디서든 비슷하니까요. 거기서는 190cm 가까이 되는 애랑 경쟁했습니다. 점프력은 점점 좋아져, 나중에는 교실 천정에 손바닥이 닿을 정도까지 뛰었습니다. 3m 가까이 되는 농구 림도 손으로 잡았으니, 실제로 점프력이 좋아지긴 좋아졌던 거 같습니다. 고2가 되며 겉멋이 들기도 하고, 경쟁자도 흥미를 잃어 손자국 찍기는 자연스럽게 시들해졌습니다. 이후 가끔씩 뛰긴 했지만 그때만큼 높이 뛰지는 못하더군요. 햇수로 치자면 근 3년 가까이 참 열심히도 뛰어댔습니다.
과거의 어느 한 점과 미래의 또다른 한 점이 반드시 연결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 스티브 잡스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제자리 높이 뛰기는, 엉뚱한데서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예상하셨겠지만 바로 농구였죠. 공고로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농구에 빠져들었습니다. 키가 월등히 큰 것도, 드리블이 좋은 것도, 슛이나 패스가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잘하는 애들이 늘 거부감없이 끼워줬습니다. 왜냐고요? 리바운드를 잘해서? 아닙니다. 점프는 잘했지만 살점이 없어 '종이 인형'마냥 휘날리기(?) 일수였는 걸요. 바로 '블럭킹' 때문이었죠. 경기당 네 다섯개의 블럭은 꼭 했으니 일종의 '수비 스페셜 리스트'였던 셈이죠. 슛이 좋은 상대를 견제하려 저를 받아준 겁니다.
블럭이 뭔가요. 수비하다 상대가 슛을 쏘면 그대로 뛰어올라 공을 쳐내는 거잖아요. 죽어라 뛰어올랐던 어린시절의 뻘짓이 이렇게 연결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멋도 모르고 제 앞에서 슛을 쏴대던 애들은 '파리채 블러킹'의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두번 블럭킹을 당한 애들은 제 앞에서 함부로 슛을 쏘지 못하고 쭈뼛거렸죠. 그러다 어이없이 공을 스틸 당하기도 하고요. 그런 모습들이 하나둘 쌓여가자 저절로 자신감이 붙더군요. 몸으로 경쟁해도 이길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더군요. 심리적으로, 또 체력적으로 '가난한 약골'이란 껍질을 이때부터 조금씩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후 경기 숫자가 급격히 많아지며 슛도, 패스도, 리바운드도 점점 나아졌습니다. 그래, 어느시점 부터는 코트에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쉽사리 밀리지 않았죠.
이후 우여곡절에 곡절을 좌로 우로 돌고 돈 끝에, 대학을 무사히 마치고 꽤나 이름 난 회사에 취직하게 됩니다. 운좋게 입사시험을 통과한 거죠. 처음 연수원에 입소해 신입사원 연수를 받는데, 동기들의 스펙이 정말 장난이 아니더군요. 말로만 듣던 SKY가 발에 채일 정도였죠.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졸업 성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공고 출신에 이름없는 대학 졸업이란 사실에 내색은 안해도 심적으로 많이 위축 됐었죠. 내향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이도 제일 어렸고, 덩치도 좋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티가 좔좔 흐르는 형들이 많아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동기들과 농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체육관에서 진행되는 행사가 많다보니, 여유 시간에 자연스럽게 이뤄진 거죠. 농구를 꽤나 잘했던 같은 조 형이 제안해 저도 함께했죠. 조별로 편을 나눴는데 상대편엔 190cm가 넘는 형만 두명이나 있었습니다. 키를 맞췄는데도 우리 편이 불리했죠. 그러거나 말거나 경기는 시작됐고, 코트 감을 채 익히기도 전에 바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편이 슛을 쐈는데 림에 맞고 튕겨나온 공을 상대편이 리바운드 했고, 바로 우리쪽 코트의 적에게 패스했습니다. 제 상대는 원래 작은 사람이었는데, 순간적으로 미스매치가 나서 10cm나 큰 그를 제가 막아야 했습니다. 그는 무섭게 코트를 질주해 들어왔고, 3점 라인을 넘어서자마자 저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로 슛을 쐈습니다. 미스매치니 찬스라고 본 거죠. 두어걸음 물러서 있던 저는 몸에 익힌 습관대로 잠깐 움추렸다 그대로 솟아올랐고, 있는 힘껏 공을 내려쳤습니다. '팡!' 경쾌한 블럭 소리가 체육관을 울렸죠.
'우워' 동료들의 놀라워하는 반응이 이어졌는데요, 그 소리가 짓눌려 있던 제 자존감을 흔들어 깨우더군요. '뭐, 해볼만 하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그 장신들 사이에서 몇 번의 블럭이 더 있었고, 약간의 득점과 리바운드도 해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활약을 보인 건 아니지만, 그래봐야 농구 경기에 불과했지만, 경기 후 위축됐던 저는 더는 없었습니다. 어린시절 의미없이 했던 서전트 점프 덕에, 흔들렸던 스스로를 다잡은 셈이랄까요. 꼭 농구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훨씬 스스럼없이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거침없이 제안하고, 모난 성격답게 아프게 비꼬왔죠. 누가 그러더군요, '자식, 이제야 입이 풀렸네'라고요. 그게 다 예전의 뻘짓 덕분이었다고 말했다면, 동기들은 과연 믿었을까요?
그렇게 세상 쓸모없을 것 같던 '서전트 점프'는 저를 이루는 뼈대가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저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런 거 보면, 삶은 정말 '모자이크'나 '콜라쥬' 같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옳은 선택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착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선택들도 결국엔 다 내 살점이 되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광을 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타인이 매기는 가치'가 달라지는 것일 뿐, 어떻게든 내 삶에 거름이 되더라 이 말씀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명언처럼 과거의 '뻘짓'이 언젠가는 미래의 또다른 '계단'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하되 일단 선택했으면 후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결과든 반드시 나를 이루는 한 조각이 될 테니까요. 헛 공부로 시간을 날렸든, 엄한데 투자하다가 소중한 종자돈을 날렸든 후회할 필요 없습니다. 그 시간조차 반드시 내 일부가 될테니까요. 뭐, 아닌 경우도 많다고 말하신다면, 굳이 반론하지 않겠습니다. 최소한 제 인생에서는 그랬습니다. '플라시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브런치 북를 쓰면서 계속 머리속에 맴도는 의문들이 있습니다. '이거 또 뻘짓하는 거 아니야?', '당구장 주인만 배불리는 거 아니야?' 라는. 아주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어찌됐거나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이 시간 또한 언젠가는,
내가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