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편 오락기에 앉은 남자가 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습니다. 싸늘하더군요. 갑자기 퍽 소리가 들렸고, 실제로 들립니다, 왼쪽 볼이 아팠습니다. 그가 '아구지'를 날린 겁니다. 볼을 붙잡은 채 남자를 곁눈질로 올려다보니, 낯익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골목 고아원에서 살던 형. 늘 말없이 신문배달만 하던 형. 혀 끝에서 피맛이 났습니다.
큰애가 학원 영어 단어를 못 외어 또 재시험 치러 갔다네요. 짜증이 났습니다. 학원비가 아깝더군요.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공부는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본인이 하고 싶을 때 해야 남는 거라고, 괜스레 집사람한테 투덜거렸습니다. 정작 '사춘기의 광(狂)전사'에겐 한마디 말도 못 하면서 말이죠. 자녀교육 책에 보면 '자기 주도 학습'이라 거창하게 표현된 이론인데, 책에서 읽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몸소 체험했거든요. 책상 위에서가 아니라, 전자 오락실 조이스틱 앞에 서라는 게 다르긴 하지만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시절 내내, 쉼 없이 해왔던 뻘짓이 있습니다. 바로 게임입니다. 사실 '게임'은 PC가 대중화되며 함께 들어온 외래어라 우리 정서는 아니죠. 어쩐지 차갑습니다. 전자 오락, 전자 오락실이라 불러야 누렇게 볕에 바래버린 사진처럼 따스한 기운이 살아납니다. 어찌 됐거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벽면을 따라 다닥다닥 배치된 수십대의 오락기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효과음들,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들의 붉은 볼이 떠오릅니다. 약간은 어둠침침한, 가끔 죽을락 말락 반짝거리던 천정 형광등도 생각나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결코 쾌적한 환경이라 부를 수 없지만,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느꼈습니다.
처음 전자 오락실을 접한 것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친구를 따라 왕복 4차선의 대로를 건너 옆동네로 넘어갔는데, 지하에 미싱 공장이 있는 건물 1층에 자리잡고 있더군요. '지능개발, 두뇌개발'이란 문구가 통으로 유리창에 붙어있었죠.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야말로 신세계가 열렸습니다. 지금이야 볼 것이 넘쳐나 문제지만, 당시는 오감을 자극할만한 건 TV나 라디오, 혹은 만화책 정도밖에 없었잖아요. 화려한 영상이 휙휙 변하고 자극적인 전자 음악과 효과음들로 가득 찬 오락실은, 말 그대로 별천지였죠. 아직도 '너클 조'나 영화 살인의 추억에도 등장했던 '하이퍼 올림픽'같은 게임들은 머릿속에 생생합니다. 워낙 어릴 때라 해봐야 금방 죽고 돈도 없어 대부분 구경만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동심을 빼앗기기엔 충분했었죠.
집에서 5분 거리 신작로 한편에 제법 큰 오락실이 생기면서부터, 저의 본격적인 '오락실 라이프'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작로(新作路)는 할머니가 쓰던 사투리로 도로보다는 작고 일반 보행로보다는 큰길을 말합니다. 대략 4, 5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부턴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방만 던져놓고 바로 오락실로 달려갔었죠. 한번 들어가면 해질 때까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월 지나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오락실은 '애들 망치는 곳'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몇 번 할머니에게 붙들려 집으로 끌려가기도 했었죠. 등짝 스매싱은 기본이고요. 공부하고는 진즉 담을 쌓은 제가, 그런다고 말을 들을 리 없었지만 말입니다.
돈이 없었기에 대부분 구경만 했습니다. 누가 오락을 하면 뒤에 서서 어떻게 왕을 깨는지, 어떻게 하면 오래 사는지를 지켜봤죠. 한 번씩 고수가 등장하면 구경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애들이 우르르 몰려 벽을 이뤘거든요. 직접 하는 애들과 지켜보는 애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렇게 오락 속 희로애락을 함께 했었죠. 그게 오락실만의 문화였습니다.
당연하게 어느 순간부터는 오락실 죽돌이가 되었습니다. 게임은 안 하고 하도 구경만 하니까, 오락실 주인아저씨가 짜증이 났는지 집에 가라고 하더군요. 당시엔 서운했지만 그럴 만도 했던 게 저 같은 죽돌이가 여러 명 있었거든요. 아저씨 입장에선 생선가게 날파리 같았겠죠. 쫓겨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슬슬 눈치가 보였습니다. 그래 습관이 하나 생기는데, 돈을 구하면 바로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일단 꼼쳐두는 거였습니다. 할머니가 버린 동전지갑을 챙겨 양말 속에 넣고 다녔죠. 내내 다른 애들이 하는 걸 구경하다가, 눈치가 보인다 싶으면 동전을 꺼내 한 판씩 했습니다. 아저씨도 돈 넣고 게임하니 더는 뭐라고 안 하더군요. 돈이 하나도 없을 땐 동네 공중전화박스나 커피 자판기 등을 훑었습니다. 잔돈을 놔두고 가거나 자판기 바닥에 떨어진 걸 굳이 줍지 않고 내버려 둔 경우가 간혹 있었거든요.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쉬울 때 한 번씩 생기는 50원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지금은 절대 느낄 수 없는 기쁨이죠.
재미있는 건 죽돌이로 보낸 시간도 경험이라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턴 나름의 '노하우'도 깨우치게 됩니다. 퀴즈 게임은 보기 중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게 정답이라던지, 테니스 게임은 전원 스위치를 빠르게 껐다가 켜면 가끔 코인이 하나씩 올라간다던지, 어떤 게임은 특정 장소에서 숨겨진 문을 열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무한히 게임을 반복할 수 있다던지 하는 걸 알게 된 거죠. 굳이 돈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오락실에서 엉덩이 뭉갤 요령들을 파악한 겁니다.
특히 하도 구경을 하다 보니까 저절로 '눈썰미'란게 생기더군요. 적이 언제 어디서 나오는지, 어디로 피해야 안 맞고 어디를 때려야 쉽게 죽이는지 자연스럽게 외워졌죠. 못하는 애들이 하면 옆에 가 조언하는 일들이 늘었고, 50원짜리 하나 넣으면 왕(王)까지 깨는 타이틀들이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시켜주기', 곧 돈은 자기가 낼 테니 함께하자는 아이들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얘들은 돈은 있는데 실력은 없어 금방 죽으니, 나를 앞장 세워 오래 하는 재미를 느끼겠다 이거였죠. 일종의 '게임 가이드'가 된 셈이랄까요. 만족스럽게 즐겼다 싶으면 사례조로 꼭 50원, 100원씩 줬습니다. 하고 싶은 거 하라면서요. 아프리카 TV의 별풍선, 유튜브의 슈퍼챗, 브런치 스토리의 응원 같은 사업모델을, 전 30년 전에 이미 경험했던 거죠. 그래, 최소한 오락실에서 만큼은 더는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동전 지갑은 늘 두둑했고 돈이 없어 눈치를 보던 시절은 추억이 돼버렸죠.
그러다 애증의 타이틀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만나게 됩니다. 동년배라면 아시겠지만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게임이 주목받은 건 이게 최초일 겁니다. 두 명의 사용자가 8명의 캐릭터 중 하나를 골라 서로 싸우는 게 전부였던 이 대전 게임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오락실 세계를 평정합니다. 같은 타이틀인데도 하려는 사람이 하도 많아 한 오락실에 대여섯 대씩 설치해 놓는 건 기본이었죠. 여기저기서 대회가 열렸고 오락실 죽돌이가 다른 오락실에 가서 그곳 죽돌이를 박살 내는, 이른바 도장 깨기도 흔했습니다. '아도겐', '워류겐', '아따따루겐', '마데굿', '요가 파이어'같은 정체불명의 효과음들이 유행어처럼 돌 정도로, 남자 애들 사이에선 하나의 신드롬이었죠.
오락실 죽돌이었던 저도 당연히 빠져 들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거의 이 게임 하나에만 몰두했었죠. 캐릭터 하나하나의 공격방식과 수비방식, 기술은 어떻게 쓰고 연타는 어떻게 치는지, 함정은 어떻게 파고 심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배우고 실습하며 몸에 익혔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때의 손동작들이 다 떠오를 정도도죠. 덕분에 어느 시점부터는 웬만해선 지지 않았습니다. 주, 부 캐릭터 가릴 거 없이, 했다 하면 대부분 이겼습니다. 한 자리에 앉아 상대만 바뀌어가며 30분씩 게임을 하는 경우도 흔했죠. 너무 이겨 지루해지면 일부러 못하는 캐릭터를 선택해 져주기도 했었죠.
과유불급이라 했던가요. 불행하게도 실력이 좋아지자 시건방도 늘더군요. 일합 주고받으면 실력을 단박에 알 수 있으니 못하는 애들은 살살 가지고 놀았죠. 좀 하는 애와 붙을 때는 '얍사비'를 써서 멘탈을 흔들었고요. 게임할 때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시나요? 졌다고 무조건 화나는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못해보고 졌을 때' 꼭지가 도는 겁니다. 제 플레이 스타일이 딱 그랬습니다. 타이밍을 빼앗아 상대가 원하는 걸 아무것도 못하게 하고 눌러버렸죠. 때리려고 하는 순간에 먼저 때리고 기술을 쓰면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 공격을 먹였습니다. 잠깐 망설이면 붙잡아 내동댕이 치고요. 당하는 사람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거죠. 키도 조막만 한 놈이 실실 웃으며 그러고 있으니 더더욱 꼴사나웠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였을까요. 승리가 쌓여가는 만큼 예기치 않은 충돌들이 생겼습니다. 만화책까지 빌려줄 정도로 친했던 한 죽돌이 형은 참다 참다 '따귀'를 날리더군요. 그 자리에선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조차도 장난인 듯 웃어넘겼지만, 이후 그 형과는 더는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한 번은 중학교 같은 반 동창이랑 붙었는데요, 싸움을 좀 하는 친구였는데 게임 실력은 형편없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잘근잘근 밟아주었는데, 게임이 끝나자마자 씩씩거리며 달려와 뒤통수를 갈기더군요. 이때를 시작으로 이 놈한테 1년 가까이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게임 속에서나 날고 기었지, 학교에선 키 순으로 앞에서 세 번째 앉았던 가난뱅이 '찐따'였으니까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모처럼 놀러 온 친척 동생에게 형이 얼마나 게임을 잘하는지 보여준다며 오락실에 데리고 갔습니다. 누군가 가지고 놀기 좋은 캐릭터로 게임을 하고 있길래, 냉큼 결투를 신청했고 제가 생각해도 불쌍할 정도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며 이겨버렸죠. 상대는 제 자리 반대편에 앉아있었는데, 바로 재결투를 신청해 오더군요. 물론 다시 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죠. 연거푸 두 판 정도 더 이기곤, 동생 앞에서 의기양양해 있는데, 반대편 오락기에 앉아있던 상대가 성큼성큼 제 옆으로 걸어왔습니다. 싸늘했습니다. 뭔가 터져도 터질 분위기였죠. 그러다 갑자기 퍽 소리가 들렸고, 실제로 들립니다, 왼쪽 볼이 아팠습니다. 그가 '아구지'를 날린 겁니다. 볼을 붙잡은 채 남자를 곁눈질로 올려다보니, 낯익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골목 고아원에서 살던 형, 늘 말없이 신문배달만 하던 형이었죠. 벌게진 얼굴로 잠시 저를 쏘아보던 형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습니다. 혀 끝에서 피맛이 나는데, 억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하고, 이래저래 마음이 안 좋더군요.
그런 일들이 하나 둘 쌓이며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뭔 뜻인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무슨 의미인지 말입니다. 실력이 있을수록 숨길줄 알아야 한다는 걸, 칼을 뽑아 들고 다니다간 사람들의 표적만 될 뿐이란 걸 깨달은 거죠. 아이들이 도덕책에서 글자로 배우는 '겸손의 미덕'을, 저는 오락실에서, 꽤 이른 나이에 배운 셈입니다.
기억하는 한 그게 오락실에서 즐겼던 마지막 게임입니다. 이후 집에서 먼 공업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고, 농구하는 재미에 눈을 뜨고, 사이비(?) 교회에 급속도로 빠져들면서 자연스럽게 시들해졌습니다. 제 청소년기의 절반을 함께 했던 오락실에서의 뻘짓은, 그렇게 이렇다 할 기념식 없이 조용히 끝나버렸죠.
'아이는 스스로가 하고픈 욕망에 무언가를 할 때 올바르게 성장한다. - EBS 다큐 칭찬의 역효과 중'
저는 시각 기억력이 대단히 좋은 편입니다. 한번 설명한 것, 한번 들은 것을 꽤나 잘 기억해 내죠. 대학시절 조교가 딱 한번 설명한 내용을 제가 거침없이 재현하는 걸 보며, 놀라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한편으론 생활력도 좋은 편입니다. 어디다 던져놔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 말하는 지인들이 많죠. 책 값은 물론 밥값도 없이 시작했던 대학생활도 누구한테 손 한번 벌린 적 없이 결국은 마무리해 냈으니까요.
두뇌개발, 지능개발 전자 오락실. 저는 이 말을 믿습니다. 시각 기억력의 8할은 오락 덕분이라 확신합니다. 오락을 하며 투자했던 시간은 분명 뻘짓이었지만, 오락을 하기 위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외우고, 공부하고, 성취했던 시간들은 소중한 경험으로 제 안에 쌓였거든요. 빰을 맞고 머리채를 잡혀가며 배운 가치는, 인간관계를 헤쳐나갈 값비싼 나침반이 돼주었고요. 비록 오락 자체는 뻘짓이었을지 몰라도, 이를 하고픈 욕망에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은, 기름진 거름이 되어 저를 자라나게 해 준 셈입니다.
그래,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락실에서 보냈던 그 숱한 시간들을 말입니다. '페이커'처럼 대단한 성과는 없었지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귀중한 가치들을 배웠으니까요. 그래, 만약 니체의 '영원 회기'가 진실이라 그 시절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저는 가방을 던져놓고 어김없이 달려갈 겁니다.
전자 음향이 비처럼 쏟아지는,
'스승의 품 속'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