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딘 May 22. 2024

싱어송 라이터병(病)

 분위기가 무거워졌습니다. 몇몇은 한숨을 쉬었죠. 다들 '이제 뭘로 먹고살아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한 표정이었습니다. 후배는 공무원을, 부장님은 전기공사 업체를 플랜 B로 생각하더군요. 직속 후배가 제게 물었습니다. 팀장님은 어쩌실 거냐고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노래 커버 유튜버' 할 거라고요. 푸핫,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후배는 고개를 돌린 채 애써 입꼬리를 붙잡았죠. 부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더군요.


"제가 또 한 번 부르기 시작하면 갱년기인 국장님, 부장님은 눈물 쏙 빠진다니까요. 아, 이거 어떻게 들려드릴 수도 없고."


 국장님이 소주잔을 쭉 내미셨습니다. 헛소리 말고 건배나 하라시는군요.

 



  '식탐'이 아니라 '글탐'이 심해졌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글이 점점 비대해지고 있습니다. 쓰는 저는 고통스럽고, 몇 분 안 되는 독자에게도 고역일 겁니다. '김분주'님 글처럼 재미도 없는데. '조매영'님 글처럼 아름답지도 않은데. 진지하게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싶습니다. 말이 나와 말인데 김분주님의 글, 너무 재미있습니다. 조매영님의 글은 눈을 정화시키죠. 그런 글을 쓰고 싶은데, 능력도 시간도 부족하네요. 이런이런, 또 길어지네요, 정신 차려야겠습니다. 다이어트는 바로 시작입니다.


 힘들게 살아왔다는 이야기, 말하는 저도 슬슬 식상하네요. 세상살이 안 힘든 사람도 있나요. 과거를 거짓 없이 드러내려다 보니 자꾸 펜이 거기서부터 시작하는군요. 어찌 됐거나 그게 제 진실이고 제 삶이 그 위에 쌓아 올려졌으니, '가난 팔이'를 피해 가기가 쉽지 않네요. 유쾌한 글은 아무래도 '못 먹을 감'인가 봅니다.


 회사생활을 마치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은 출발부터 난관이었습니다. 퇴직금으로 입학금을 가름하고 났더니 만 원짜리 몇 장 안 남더군요. 당장 필요한 교과서 몇 권 샀더니 차비만 간신히 남았습니다. 돈이 없어 점심으로 3백 원짜리 짜장 범벅을 사 먹어야 했죠. 부모 잘 만난 애들이 '캠퍼스의 낭만'에 들떠 희희낙락거리는 학생회관에서, 전 이 난관을 어떻게 뚫을까 머리를 싸매야 했습니다. 그나마 함께 고통받던 친구가 있어, 멘탈이 박살나진 않았습니다. 같은 교회를 다녔던, 지금까지도 절친이라는 그 친구입니다. 그도 괘도를 이탈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저와 같은 위치로 복귀했죠.


 차비는 자전거를 구해 해결했고 책은 일단 복사로 때웠습니다. 이때 만든 허벅지로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죠. 하지만 여전히 돈이 궁했습니다. 배우 뺨치는 미남에 성격까지 좋았던 친구는, 입학 첫 주부터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더군요. 새벽 주점 알바였는데, 당시에는 새벽 장사가 불법이었던 터라 알바도 꽤 짭짤했었죠. 전 '장학금을 받겠다' 목표했던 터라, 공부에만 전념했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아르바이트 구하는지도 몰랐고요. 나중에 직접 커피숍 알바를 구하러 다니며 알게 됐습니다. 제가 객관적으로 볼 때 '못생겼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OTL


 첫 학기 내내 점심은 거의 녀석에게 얻어먹었습니다. 책도 녀석의 돈으로 제본해서 봤죠. 대신 새벽일을 마치고 녀석이 쪽잠에 들면, 깨워 학교로 데려가는 일은 제 몫이었습니다. 대부분 같은 수업을 들었기에 과제를 챙기고 족보를 확보하는 일도 제 몫이었죠. 쉽지 않은 시작이었지만 어느 정도 갈피가 잡히자, 캠퍼스의 낭만이 우리의 마른 가슴에도 스며들더군요. 녀석은 그 바쁜 와중에도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고, 저도 과동기들과 가까워졌습니다. 동년배들과 어울리며 낭비하는 그 시간이 꽤나 평화롭더군요. 모처럼 맞은 제 인생의 망중한(忙中閑)이랄까요. 간절했던 만큼 장학금을 따겠다는 계획은 이뤄졌고, 첫 여름방학부터는 저도 알바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때도 잘생긴 녀석의 읍소로 물고를 텄죠. 아, 얼굴만 보고 평가하는 더러운 세상.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요. 이맘때쯤 제 인생의 '메인 빌런'이 돌아옵니다. 폭력범 아비였죠. 출소를 한 건지, 또 어떤 사람들을 '후리다' 실패하고 온 건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집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시달렸으면서도 할머니는 '큰 아들'이란 명분을 떨쳐내지 못했죠. 어린 시절 당했던 폭행을 도화선처럼 품고 살던 저였지만, 일단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때는 교회를 다니던 시절이었고, 제게 별다르게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거든요. 한편으론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작두 위에 선 것 같던 위태로운 상황은, 어느 날 결국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이 인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며 저를 탓하더군요. 그래, 제가 인상을 쓰며 한마디 했더니, 구둣발로 뛰어 들어와 뺨을 때리더군요. 그의 마음속엔 무기력하게 얻어맞던 어린 시절 제가 그대로 남아있었나 봅니다. 그래도 되겠거니 생각했나 봅니다. 허나, 이미 말씀드렸듯 공고에서 '늑대로 길러졌다'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참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그는 제 마음속에 아비가 아니었거든요. 바로 멱살을 잡고 밀어붙였습니다. 유도 유단자였던 그가 제 멱살을 움켜쥐길래, 헤드락을 걸어 바닥에 넘어뜨렸습니다. 그리곤 주먹을 날렸습니다. 일방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중간에 할머니가 끼어들어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놈이 항상 품고 다니던 목검이라도 꺼내 들었다면, 틀림없이 사건사고 뉴스에 제 이름이 올랐을 겁니다.


 저도 반쯤 정신이 나갔던 상태라 솔직히 소소한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아무튼 그 일로 할머니와 저는 인근 고모네 집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열아홉 이른 직장생활로 간신히 마련한 전셋집을, 그렇게 날강도 같은 놈에게 빼앗겼죠. 이후 우여곡절 끝에 집주인의 도움을 얻어 놈을 가까스로 몰아내게 되는데요, 짐을 빼다 보니 방 장판 밑에서 계약서가 하나 나오더군요. 위조 계약서였습니다. 계약금을 훨씬 낮게 후려친. 칠순 노모의 전부였던 전셋집을 그렇게라도 홀랑 먹어버리고 싶었을까요. 괜히 인간쓰레기가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사람은 바꿔 쓰는 게 아닌가 봅니다. 


[ image made by bing image creator ]


 2학기부턴 주머니 사정이 좀 나아졌습니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단 안면을 터두니, 주말마다 손이 부족할 때 알바를 뛸 수 있었습니다. 몇 푼 받진 못했지만 중학생 과외 알바도 했고요. 2학년때부턴 학교 식당에서 근로 장학생도 하게 됩니다. 수업을 피해 하루 2시간씩만 일하면 됐었는데, 이게 참 꿀알바였던 게 알바비는 알바비대로 받으면서 식사까지 공짜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아줌마들이 맛있는 반찬을 듬뿍 올려주는 건 이 알바의 백미였죠. 수백 명의 음식을 준비하고 치우는 일이 고됐던 건 사실이지만, 한방에 돈도 벌고 밥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저는 너무 좋기만 하더군요. 


 그렇게 조금씩 주머니가 차고 어찌 됐거나 '인생 빌런'도 털어내 생활이 안정되자, 슬슬 '뻘짓 본능'이 살아났습니다. 원래도 음악 듣고 노래 부르기를 즐겼는데, 당시 교회 청년부의 한 친구가 'Note Worthy Composer'라는 작곡 프로그램을 알려준 겁니다. 가상 악보에 음표를 찍으면 알아서 연주를 해줬는데, 이게 또 신세계더군요. 피아노를 못 쳐도 곡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당시 이 친구로부터 통기타도 배웠는데, 코드 진행만 알면 곡을 만드는 일도 어렵지 않더군요. 이른바 머니코드도 이때 배웠죠. 


 전자음악의 맛을 알게 되자, 욕심이 생겼습니다. 끝물이긴 했지만 당시에도 대학가요제가 있었는데요, 이것만 잘 활용하면 혼자서도 대학가요제에 나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조금 더 찾아보니 '케이크 워크'라고 전문적인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이걸로는 완성된 곡까지도 만들 수 있었죠. 시간만 쏟으면 혼자서 드럼 비트부터 기타 리프까지 다 만들 수 있었습니다. 결국 프로그램은 어둠의 경로에서 구하고, 알바로 모은 돈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사운드 카드와 마스터 키보드를 샀습니다. 컴퓨터는 고모네가 쓰다 버린 걸 얻었죠. 어렵게 모은 돈을 여기에 죄다 쏟아부었으니, 나름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아님 뭐가 씌었거나요.


 그렇게 구색이 갖춰지자 컴퓨터에 매달렸습니다. 당시 R&B음악에 흠뻑 빠졌었는데, 보이즈 투맨의 노래를 레퍼런스 삼아 첫곡을 만들었습니다. 장비가 부족해 음성은 넣지 못하고 오로지 악기로만 구성된 음악이었죠. 문제의 교회 친구에게 들려줬더니 '이 정도면 표절'이라고 뭐라 하더군요. 그래도 기분은 좋았습니다. 첫곡이니까 계속 만들다 보면 쓸만한 거 하나 못 건지겠냐 싶었죠.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며 실력을 키웠습니다. 여러 곡을 분석했고 두 곡 정도 더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결과적으로 대학가요제에 나갔느냐'하면 안타깝게도 시도조차 못했습니다. 당시 R&B 음악은 '투 코드 진행'이 대세였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그 '그르부(groove)'을 못 내겠는 겁니다. 공개된 작법서들을 찾아봤지만 재즈 화성학은 많아도 R&B 만드는 법은 없더군요. 당시 막 활성화되던 인터넷 커뮤니티를 뒤져봤지만 역시나 정보를 얻을 순 없었습니다. 동아리에 의지해볼까도 싶었지만 학교엔 메탈 동아리밖에 없었죠. 하고 싶은 음악은 따로 있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고 만 겁니다. 그렇게 좌절하고 있는 와중, 갑작스레 입영통지서를 받게 됐습니다. 칠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를 혼자 두고 입대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습니다. 대학가요제는 둘째치고 이것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결국 입대문제를 해결하느라 1년 정도 씨름하고 났더니, 이번에 취업문제가 눈앞에 놓이더군요. 짧았던 '공상의 시간'에서 벗어나 현실을 마주할 시간이 된 거죠. 어차피 딱히 해결책도 없던 터라, 아쉽지만 대학가요제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 image made by Md Tofayel Ahmed from pixabay ]


 음악을 만들겠다고 설쳐대던 그 시절은, 그대로 뻘짓으로 남고 말았을까요? 아닙니다. 그 실패의 경험은 10년 후 다른 싹을 틔우게 되죠. '지랄 맞을' 사내 규정 때문에 여기서 명쾌히 밝히진 못하지만, 저는 음향 관련 일을 합니다. 소위 음향 엔지니어죠. 연차가 쌓여 관리일도 하고 있지만, 음향쪽 일 만 10년 넘게 했습니다. 그중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콘텐츠도 2년 넘게 제작했습니다. 대가들에 비하면 아직도 부족합니다만, 담당했던 영역에 한해선 '이것이 음향의 알파이자 오메가다'라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배웠고 경험했습니다.


 물론 대학 때 익혀뒀던 '작곡의 기본기'가 음향업무에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죠. 특히 수십 개의 음원들을 하나의 음악으로 섞어야 하는 '믹스다운'을 할 땐, 톡톡히 그 효과를 봤습니다. 리듬악기부터 쌓아 올려 다양한 악기들을 가상의 공간 속에 펼쳐놓는 이 작업은, 작곡의 기본 개념과 완전히 동일하거든요. 사용했던 소프트웨어들도 훨씬 개선되긴 했지만 기본 원리는 같았고요. 그러니 업무를 익히고 처리하는 데 훨씬 수월하지 않았겠습니까.


 사실 한 푼이 아쉬웠던 대학시절, 주제넘게 작곡에 빠졌던 건 '가수가 되고 싶다'는 오랜 바램 때문이었습니다. 브라이언 맥나잇같이 유명한 '싱어송 라이터'가 되는 게 제 꿈이었죠. 취직 후 돌고 돌아 결국 음향 쪽 업무를 맡게 된 것도, 내면의 그런 바램이 이어진 거라 봅니다. 바램처럼 음악 하는 사람은 될 순 없지만, 이와 비슷한 음향을 함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결국 진정한 뻘짓은 '가수가 되겠다'는 꿈이었던 셈이죠.


 이제까지 그랬듯 과거의 뻘짓이 좋은 경험으로 남고 잊혀지면 깔끔할 텐데, 이 뻘짓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내일 모래 오십인데도 여전히 꿈을 포기하지 않았죠. 그런 아저씨, 아줌마들을 보면 참 철없다고 느끼면서도, 이 꿈에 관해선 이상하게 '자기 객관화'가 안됩니다. 아마 끝까지 매달리고 싶은 '동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이것도 불치병이라면 일종의 불치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는 직원들과 저녁을 먹었는데요, 회사가 심각하게 어려워져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이제 뭘로 먹고살아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한 표정이었습니다. 후배는 공무원을, 부장님은 전기공사 업체를 플랜 B로 생각하더군요. 직속 후배가 제게 물었습니다. 팀장님은 어쩌실 거냐고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노래 커버 유튜버' 할 거라고요. 푸핫,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후배는 고개를 돌린 채 애써 입꼬리를 붙잡았죠. 부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더군요.


"제가 또 한 번 부르기 시작하면 갱년기인 국장님, 부장님은 눈물 쏙 빠진다니까요. 아, 이거 어떻게 들려드릴 수도 없고."


 국장님이 소주잔을 쭉 내미시더군요. 헛소리 말고 건배나 하라시면서요. 맞습니다, 누가 들어도 헛소리입니다. 남이 그런 이야기하면 저부터도 뭐라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진지합니다. 진짜 회사 밖으로 나앉게 되면, 그것부터 할 겁니다. 그날을 대비해 여전히 연습하고 있거든요. 아직도 실력이 조금씩이나마 늘고 있는 걸요. 아, 이거 어떻게 들려드릴 수도 없고...




[image made by bing image creator ]


 새로운 플랫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웹 3.0이네, 메타버스네 부르는 이름은 다르겠지만, 제가 기대하는 건 딱 하나입니다. 노래 부를 수 있는 공간. 나이 오십 넘어 노래를 부른다고 욕먹거나 비난받지 않을 공간. 오로지 목소리와 노래만으로 제가 평가받는 공간. 그런 곳이 생긴다면 저는 아무 데서나 버스킹을 할 겁니다. 내향인이라는 한계도 그곳에선 걸리적거리지 않을 테니까요. 별풍선 받고 슈퍼챗 얻으면,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날은 분명 올 겁니다. 그러니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계속 연습할 겁니다. 꽝이 될 걸 아는 로또라도 꿈꾸는 한은,


행복하잖아요.                

이전 06화 어른들의 세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