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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딘 May 29. 2024

전쟁은 우두머리를 베야 끝난다.

 오전 8시, 바쁘게 등교 준비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뜬금없이 현관 벨이 울리길래 '올 사람이 없는데 아침부터 누구지?' 의아한 마음으로 나갔습니다. 반지하 집을 나와 1층 현관문을 열었는데 낯익은 할아버지 한 분이 문 앞에 서계시더군요. 전에 살던 옥탑방 주인 할아버지셨습니다.


"내가 웬만하면 이런 거 안 가져다주는데. 이건 아무래도 중요한 거 같아서..."


 엉거주춤 인사를 드리고 편지봉투 3개를 받아 들었습니다. 각 봉투의 발신인에 이 직인들이 찍혀있더군요. '청와대 비서실장, 국방부장관, OO남도 병무청장'. 꿀꺽, 침을 삼켰습니다.




 귀에서 피가 나려 합니다. 퇴직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선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끊임없이 본인 이야기를 '뿜어'내시는군요. 야멸차게 말을 끊고 돌아왔습니다. 워낙 일방통행이라 계속 듣고 있다간 고막이 뚫릴 것 같아서요. 비슷한 연배의 선배들이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걸 보면, '일방적 수다'도 노화의 한 증상인가 싶습니다.


 불행히 저도 늙어가나 봅니다. 글 다이어트에 실패했거든요. 딱히 대상이 전해진 건 아니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싶으니 이성이 마비되는군요. 한 문단 한문단 잇다 보면 욕심이 우르르 자판 위로 쏟아져 나옵니다. 맥락도 안 맞고 재미도 없는 글들을 늘어놓고는, 그게 또 아까워 거둬들이지 못하죠. 제게도 '노화성 수다' 증상 본격적으로 발현되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줄여볼 테지만, 글이 또 눈치 없이 늘어지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다이어트란 게 너무 단번에 성공면 인간미가 없잖아요.


[ image created by MS Image Creator ]


"형은 늘 너무 바빠서, 같이 놀 시간이 없었어."


 모처럼 뭉친 대학 모임에서, 동창 하나가 술잔을 부딪히며 이야기하더군요. 돌아보면 저와 별로 어울린 기억이 없었다고요. 생각해 보니 그랬겠구나 싶습니다. 도 대학 시절하면 아르바이트했던 장면들부터 떠오르니까요. 동창들과 그 흔한 MT도, 미팅도 가본 적이 없었죠. 그나마 집사람과 함께 거닐던 캠퍼스의 녹음(綠陰)만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죠.


 1학년 첫여름방학을 기점으로 참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세미 레스토랑 서빙, 커피숍 서빙, 스파게티집 주방보조, 학교 식당 설거지, 중2 수학 과외, PC방 카운터, 학교 도서관 사서, 카메라 촬영 보조, 초등 보습학원 선생 등, 공부만 방해되지 않는다면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차비, 식대, 책값 등 대학 생활을 위한 제반 비용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으니까요. 나중에는 취직한답시고 거금을 들여 전문학원에도 다니는데, 이때의 학비도 다 제 손으로 해결했죠. 그러니 어찌 일개미가 베짱이들 잔치에 어슬렁거릴 수 있었겠습니까. 공부만 잘하면 '노 프라블럼'인 동창들과는 입장이 달랐죠.


 사실 아르바이트야 누구나 하는 것이니 특별할 건 없습니다. 같이 학교를 다녔던 절친에 비하면 그리 많이 한 것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굳이 그때를 다시 떠올리는 건, 아르바이트를 할 때마다 제가 어김없이 저질렀던 뻘짓 때문입니다. 횡령이나 절도 같은 범법이라면 말하는 재미는 있겠지만 애초에 그럴 깜냥은 못되고, 이성친구를 사귀거나 이루지 못할 사랑을 탐했다면 폼은 나겠지만 그럴 '재능(얼굴 OTL)'은 또 없었죠. 뭐, 사실 별 거 아닙니다. 제 글을 몇 번 읽어보신 분들은 예상하시겠지만, 바로 '싸움'입니다. 말이 좋아 싸움이지, 사실은 혼자 '발끈'하는 거였죠.


 대문자 '아이(I)'인 성격상 마음에 안 들더라도 웬만하면 참습니다. 사람들과 부딪히는 걸 즐기는 새디스트 타입이 아니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데' 싶은 상황이 반복되어, 공대 용어로 '쓰레숄드(특이점)'를 넘어버리면 만월(滿月)을 본 늑대인간 마냥 변신해 버린답니다. 잠들었던 '공고 늑대'가 불현듯 깨어나죠. '워울~' 울음소리 대신에, '열 여덟~'을 뱉어가며 달려듭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로 말입니다.


 처음 세미 레스토랑에서 새벽 알바를 할 땐, 주방 누나와 부딪혔습니다. 새벽 4시에 출근하고 나면 저는 청소하고 장사 준비하느라 바쁜데, 이 사람은 오자마자 가게 안쪽에 의자를 붙여놓고는 자버리더군요. 당당히 8시에 깨우라면서요. 멋도 모를 땐 그냥 넘어갔는데, 혼자 서빙하랴 음식 만들랴 몸이 바빠지자 슬슬 화가 쌓였습니다. 저 사람도 알바고 나도 알바인데, 왜 나만 일하냐 싶었죠. 첫 알바에다, 상대가 여자라 대놓고 덤비지는 못하고 대신 머리를 썼습니다. 손님이 오면 이런저런 이유로 잠을 깨웠죠. 재료 어디 있냐, 이건 내가 못 만든다 핑계를 대가면서요. 그녀는 억지로 일어나 '얘, 이게 어려워?'라며 신경질을 부렸지만, 가뿐히 무시해 버렸습니다. 아주 분위기가 냉랭해졌지만, 그게 차라리 덜 억울하더군요. 저 때문인지 가게 사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오래지 않아 그녀가 오전반으로 이동하면서 제 반항은 금새 끝났습니다. 통쾌하긴 했지만 그녀의 험담으로 나중에 다시 일하는데 애를 먹게 되죠.


 학교 식당일을 하면서는 주방장 형과 붙었습니다. 사실 요리는 영양사의 레시피에 따라 대부분 반장 아주머니가 했으니, 주방장이라기 보단 고참 취사병에 가까웠죠. 키도 작은 게 까칠하기는 얼마나 까칠한지 동료 아줌마들도 다 어울리길 꺼렸죠. 그래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가는데, 하루는 이 인간이 저보고 '찜통 설거지' 빨리 안 하냐고 뭐라 하는 겁니다. 밥 퍼주고 남은 쇠통 말입니다. 이게 밥을 푸고 나면 눌어붙은 밥알을 불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물에 담가놓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걸 알만한 인간이 논다고 뭐라 하는 겁니다. 실은 어디 다른 데서 뺨 맞고 와서, 저한테 'DR'한다는 느낌이 강했죠.


  바로 '발끈' 했습니다. '내가 일하고 있지 노냐'고 짜증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당장이라도 때릴 것처럼 주걱을 들고 달려와 쏘아보더군요. '어뜨카라고'라는 표정을 지어줬습니다. 식당 밖으로 불러내더군요. 나갔습니다. 뭐 대단한 거라도 할 줄 알았더니, 때리려는 시늉만 몇 번 하더니 가버리더군요. '근로 장학생 때려봐야 본인만 손해'라는 머리는 있던거죠.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겁쟁이 개가 더 시끄럽게 짖는 법이잖아요. 이후 함께 일하는 내내 서로 소 닭 보듯 하며 지냈습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저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더군요.

 

 초등학교 보습학원 알바 할 때는 원장이랑 붙었습니다. 서울대 출신 원장이었는데, 최초 면접 볼 때부터 살짝 기분이 상했습니다. 학원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은근히 저희 학교를 무시하더군요. '학교가, 아... 글쎄... 쓰읍' 이러면서요. 뭐, 당장 돈이 필요한 입장이라 크게 신경 쓰진 않았습니다. 다행히 인상을 좋게 봤는지 본격적으로 알바가 시작됐고,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을 맡았습니다.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 경험이 이때 도움이 많이 됐죠.


 나름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일찍 출근해 학원 청소도 하고 환경관리도 제가 다 했죠. 말 안 듣는 초딩들 학업상황도 일일이 체크해 가면서요. 그런데 조금 적응이 되자, 원장의 차별이 점점 아프게 다가오더군요. 중학교 영어, 과학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와 저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랐습니다. 그들은 '초빙된 강사'였고, 저는 '고용된 노비' 같았죠. 그래 무슨 대단한 내용을 가르치나 싶어 교재를 봤더니, 개뿔 별 것도 아닌 흔하디 흔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강사들 나이도 다 저보다 어렸고, 딱히 노하우 같은 게 있어 보이지도 않았죠. 이건 아닌데 싶더군요. 그렇게 슬슬 분노 게이지가 차오르던 찰나, 어느 날 교실 정리가 엉망이라며 원장이 뭐라 하더군요. 아침에 치워놓고 나면 애들이 금새 어지르는 걸, 어떻게 매번 정리합니까. '아니 내가 청소부로 고용됐나' 싶어 울컥하더군요.


 바로 쏘아붙였습니다. '내가 선생으로 채용된 거냐, 청소부로 고용된 거냐'라고요. 원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그다음 말이 더 가관이었습니다. '불쌍해서 채용해 줬더니, 어쩌고저쩌고'. 그는 애초에 선생이 아닌 청소부로 저를 고용했던 겁니다. 저만 선생이라 착각했던 거죠. '그만 두라'는 위협을 하길래,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닌데, 아쉬울 것 없었죠. 요새 애들 같으면 다음날부터 당장 발길을 끊고 고용노동부를 찾겠지만, 빌어먹을 책임감 때문에 후임을 구할 때까지 10일 정도 더 일했습니다. 물론 전혀 고마워하지 않더군요. 월급도 생각보다 적게 받았지만 굳이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많이 배웠다고, 지식이 많다고, '똥이 된장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 절감했죠.


 더러워도 참아가며 고분고분 일하면 좀 좋습니까. 커피숍 알바할때는 사장하고 싸우고, 스파게티 집에서는 주방장 형이랑 붙고, PC방에서는 늘 지각하는 동료랑 다퉜습니다. 붙을 때마다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죠. 그런 거북스러운 상황이 저도 싫긴 한데, 그냥은 또 못 넘어가겠는 겁니다. 스스로도 '너도 참 애지간하다' 싶을 때가 많았죠. 적당히 맞춰주면 되지 그걸 꼭 걸고넘어져, 사서 고생을 하냐 싶더라고요.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에 대한 분노가 응어리져 있다가 '억울한 상황'을 만나면 한 번씩 쏟아져 나왔던 것 아니었을까요. 공고시절 길러둔 '늑대의 심장'이 임계치를 낮춰놓은 면도 있었고요. 그나마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안정된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습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분노의 씨앗을, 제 아이들에게 넘기진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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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참 아이러니하죠. 억울하면 붙고 보는 이 '발끈 정신'은, 대게는 득 보다 실이 많을 것 같은 이 태도는, 엉뚱한 데서 딱 한번 '대박'을 치게 됩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생 교훈'도 이 싸움을 통해 배우게 되죠.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 대학교 2학년 2학기 무렵 입영통지서를 받게 됩니다. 여든을 코앞에 둔 할머니를 홀로 두고, 군대에 들어가야할 상황이었죠. 이런 경우 '생계곤란 사유'로 군면제를 받을 수 있다기에, 구청으로 서둘러 찾아갔습니다. 담당 직원은 이런저런 서류를 요구했고, 며칠에 걸쳐 충실히 작성해 제출했습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담당 직원은 호적상 '아비'가 살아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하더군요. 네, 저와 멱살을 맞잡고 주먹다짐까지 했던 '그 아비' 말입니다. 폭력, 사기범에 온 가족을 풍비박산 냈던 그 아비때문에 말입니다. 같이 안 산다, 소식 끊긴 지 오래됐다 아무리 설명해도, 서류상 그렇고 규정상 어긋나기에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더군요. 서류를 보충해 몇 차례 더 방문했지만, 담당 직원은 이미 결론을 내린 듯 더는 귀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엔 벽에대고 이야기하는 기분마저 들더군요.


 그래 차선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를 가더라도 최대한 휴가를 자주 나오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그래 먼저 카투사를 지원했습니다. 어차피 토익 700만 넘으면 뺑뺑이 돌려 뽑았기에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허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같이 지원했던 형은 붙고 저는 떨어졌습니다. 형이야 경험차원이고 저는 간절했는데도 말입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차차선책을 모색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휴가를 나온다는 공군에 지원했습니다. 필기시험은 간단히 통과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신체검사였습니다. 공군이 되려면 교정시력이 양안 0.8 이상이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심각한 부정시(짝눈)인 저는 오른쪽 눈이 안경을 쓰고도 0.2를 넘지 못했습니다. 억지로 맞추면 어지럽고 토가 쏠려서 도저히 바꿀 수가 없었죠. 어쩔 수 없이 신체검사는 시도조차 못한 채, 공군마저 포기해야 했습니다.


 심한 평발이었던 저는 '마지막 보루'로 공익근무를 떠올렸습니다. 신체검사에서 4급만 받으면 가능했죠. 눈도 심한 짝눈이고 평발도 있으니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재검까지 받았지만 두 번 모두 3급이 나왔습니다. 군인 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더군요. 좌절스러웠습니다. '안 되는 건 죽었다 깨나도 안되나 보다' 싶더군요. 병무청에서 신검 결과지를 받자마자, 바로 육군 입대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최대한 빨리 갔다 오자'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싶었죠. 그런데 설상가상, 가장 빨리 입대를 해도 무려 8개월이나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해에 군 지원자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이렇게 세상이 나를 안 도와주나', 원망스러운 마음만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2학년 2학기 겨울 방학이었는데, 6개월을 그냥 허비할 순 없었습니다. 학교 전산실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3학년 1학기 수강등록을 하고 나오려는데, 예의 '발끈 정신'이 도지는 겁니다. 무책임한 가장 때문에 할머니도, 제 인생도 이렇게 꼬이는 건가 싶더군요. 화가 났습니다. 어디에라도 이 울분을 쏟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때가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던 때라 청와대도 '신문고'라는 게시판을 두었었는데, 그게 문득 생각났습니다. 신문고를 찾아들어가 그간의 자초지종을 쭉 썼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못난 애비 때문에 할머니가 홀로 남게 됐다. 군대를 가면서도 할머니를 부양하는 방법을 최대한 찾아봤지만, 결국 없더라. 억울하다'. 그렇게 속에 있는 걸 주르륵 토해내고 나왔습니다. 시원하긴 했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이걸 누가 보랴 싶었죠.

 

 그렇게 2개월쯤 지났을까요. 오전 8시, 바쁘게 등교 준비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뜬금없이 현관 벨이 울리길래 '올 사람이 없는데 아침부터 누구지?' 의아한 마음으로 나갔습니다. 반지하 집을 나와 1층 현관문을 열었는데 낯익은 할아버지 한 분이 문 앞에 서계시더군요. 전에 살던 옥탑방 주인 할아버지셨습니다.


"내가 웬만하면 이런 거 안 가져다주는데. 이건 아무래도 중요한 거 같아서..."


 엉거주춤 인사를 드리고 편지봉투 3개를 받아 들었습니다. 각 봉투의 발신인에 이 직인들이 찍혀있더군요. '청와대 비서실장, 국방부장관, OO남도 병무청장'. 꿀꺽, 침을 삼켰습니다. 그 사이 옥탑방에서 반지하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고맙게도 주인 할아버지가 물어물어 찾아오신 겁니다. 편지를 전해주시려고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하나씩 열었습니다. 청와대는 국방부로, 국방부는 OO남도 병무청으로 민원을 이관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OO남도 병무청 봉투를 열었더니 두 페이지 짜리 서류가 들어있더군요. 내용을 읽어보니 '당신 아버지의 주민등록이 올 몇 월로 말소가 되는데, 주민등록이 말소되면 의무 부양가족에서 제외된다. 당신의 입대 2개월 전에 말소가 완료되므로, 당신은 생계곤란사유 군면제 대상이 된다. 담당 구청에 이런이런 자료를 추가로 제출하라'라고 알려주더군요. 혼자서 그렇게 찾으려고 애썼던 방법을 아주 친절히, 그것도 주무부서가 '알아서' 안내해 준 겁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 빛이 보였습니다. OO남도 병무청 편지와 함께 추가서류를 작성해, 구청 병무과에 제출했습니다. 예의 담당 직원이 떫떠름한 표정으로 받아 들더군요. 본인은 '절대 안 된다고' 단언했는데, 제가 어디선가 방법을 찾아온 게 못 마땅했을 겁니다. 이후 입대는 자동 연기되었고, 크리스마스이브날 선물처럼 또 다른 봉투를 받게 됩니다. '당신은 생계곤란 사유로 군면제 처분 되었다'는 내용이었죠. 그렇게 저는 별 생각없이 저지른 '발끈'덕에, 뭇 장병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는다는 '신의 아들'에 오릅니다. 한 번의 '뻘짓'이 이번엔 뜻밖의 대박을 친 거였죠.


 감사한 마음과 별개로, 그 경험에서 전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습니다. 문제를 두고 밑에 사람들끼리 아무리 지지고 볶고 난리를 쳐봐야,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요. 일을 풀려면 '위에서부터 내리꽂아야 한다'는 사실을요. 그러면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든다'는 사실을요. '전쟁은 우두머리를 베어야 끝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전 '신의 아들'이 되며 비로소 깨우친 겁니다.


[ image made by ogimenezs from pixabay ]




 카페 알바하면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일하던 동네에 'XX파'라는 조직 폭력배들이 있었는데, 이 'XX파'의 조직원들이 새벽에 배가 고프면 가게로 찾아왔습니다. 깍두기 머리에 한 덩치씩 하는 사람들이라 대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죠. 이들은 항상 가게에 오면 반말을 찍찍해가며 함부로 굴었습니다.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서너 명씩 몰려다니는 이들에게 까불 만큼 제가 천둥벌거숭이는 아니었죠. 뭐 자주 오지도 않아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들이 여느 때처럼 가게 한쪽 구석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조금 이따가 검은 정장 차림의 말끔한 남자가 입구로 들어왔습니다. '수고하십니다'라고 먼저 인사까지 건네면서 말이죠. 키도 크지 않아서, 다른 가게 사장님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XX파 조직원들에게 다가가자, 이 덩치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90도로 인사를 하는 거 아닙니까. 영화처럼 '오셨습니까, 형님!' 그러면서요. 와, 진짜 '개'멋있더군요. 진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순간 그의 '매너'가 그의 '실력'으로 단박에 연결되더군요.


 진짜는 그런 거죠. 말하지 않아도, 굳이 인상쓰며 가시를 곧추세우지 않아도, 분위기 만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죠. 그런 거 보면 저는 하수 중에 하수였던 거 같습니다. 사소한 일도 굳이 걸고 넘어져, 싸움을 만들었으니까요. 한 번의 의도치 않은 행운은 있었지만, 싸움은 대부분은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죠. 싸울수록 전 까칠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뿐이었고요. 그러니 스스로도 이를 뻘짓으로 기억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실력을 키우는 편이 더 멋있는 거 같습니다. 그러다 운 좋게 고수에 반열에 오르면, 우리도 그런 소리 듣는 날이 올 수도 있잖아요.


'와, 선배, 개 멋있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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