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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딘 Jun 05. 2024

사람의 일을 다하고, 나머진 우연에 맡긴다.

전단지 함부로 구기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간절한 사람이었느냐.
 
- 표절 덕후 시치미
(원작 :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아내는 잘 압니다. 제가 헛똑똑이라는 걸요. 외부에선 '샤프하다, 꼼꼼하다' 분에 넘치는 칭찬도 간혹 듣지만, 사실 '허당'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죠. 학창 시절, 데이트할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내와 밥을 먹으면 꼭 뭘 엎지르거나, 어딘가에 음식을 묻혔죠. 한 번은 핫도그를 먹으며 걸었는데, 나중에 보니 아내의 옷에 허니 머스터드를 잔뜩 묻혀놨더군요. 그것도 하늘색 스웨터에 다가요. '내가 그런 거 아니다', 처음엔 시치미를 뗐지만 제 손에 선명하게 묻어있는 소스를 보며 스스로 '주둥이를 닫아'야 했습니다.


 평소에도 그러면 모르겠는데 아내와 있을 때면 유독 그런 실수들이 잦았습니다. 처음에야 들떠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걸 보면, 그게 진짜 제 모습이구나 싶습니다. 어설프고 실수가 많은 장난꾸러기 말이죠. 진정으로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 앞에서, 단단히 걸어놨던 빗장이 해제되는 거죠. '꼼꼼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길들여졌던 제가, 유일하게 아내 앞에서는 '원래의 나'로 드러났던 겁니다.


 삶은 늘 저더러 '단단하게 살아야 한다고' 채찍질했습니다. 그조차 안되면 '없이 태어난 자'가 이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냐면서요. 다그침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아픈 채찍이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것에 시달리고 있죠. 전문 용어로는 이를 '확인 강박'이라 부르더군요.


 다들 어느 정도는 강박을 가지고 있지만, 전 아주 심한 편입니다. 대문을 닫아놓고 잘 닫혔나 몇 번씩 확인하고, 나중엔 혹 건드려서 열린 건 아닌가 또 확인하죠. 'OFF, P, 밟고'를 몇 번씩 되뇌며 차를 주차해 놓고는, 내려서 차 본네트에 한참을 손을 얹고 있습니다. 엔진이 잘 꺼졌나 확인하려고요. 노트북을 가방에 넣을 땐, 노트북이 잘 꺼졌는지 몇 번씩 버튼을 눌러 확인하고, 이게 캐비닛 속에서 제 위치로 들어갔는지 또 확인합니다. 조금만 평소 루틴과 다르면 켜진 건 아닌가 싶어, 다시 노트북을 꺼내죠. 켜지면 뭐가 문제냐고요? 혹시 배터리에서 불이 날 수도 있잖아요. 듣기만 해도 미춰버리겠죠? 뭐 이 정도는 약과에 불과합니다. 숫자로 넘어가면 그야말로 열불 터지죠. 같은 숫자를 대 여섯 번씩 확인하는데도 도무지 안심이 안 되는 기분, 그 비참함, 아마 모르실 겁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확인 강박'에 시달리게 된 데는, 계기가 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대학교 졸업반 시절, 취직 준비를 하며 겪었던 일이죠. 살아오며 많은 뻘짓들을 저질렀지만, 이것 만큼 멍청한 짓은 다시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를 시작으로 확인 강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되죠.


[ image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군대 문제를 간신히 해결하고 나자, 곧 '취직 문제'가 닥쳐왔습니다. 등록금도 간신히 장학금으로 때우던 제게 5학년은 언감생심이었죠. 바로 취직할 곳을 물색해야 했는데, 워낙 불안하게 자라왔던 터라 봉급은 좀 작더라도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을 원했습니다. 자연스레 공무원이나, 공사가 주요 목표가 됐죠.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던 어느 날, 종로에 놀러 갔다가 '전단지'를 하나 받게 됐습니다. '국내 유일의 OOO 전문학원'이란 광고였는데, 'OOO'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공기업이었습니다. 공사였지만 월급도 상당한 편이었죠. '이런 학원이 다 있었어?' 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전년도 합격자 18명 중 무려 16명이 이 학원 출신이었다는 겁니다. 눈이 번쩍 하더군요. 이거다 싶었습니다. 1등은 못하더라도 16명 안에는 왜 못 들겠냐 싶더군요. 전단지를 고이고이 접어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며칠 더 고민하다, 바로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학원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모은 돈을 죄다 끌어모으니 3개월 과정은 다닐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학원생활이 시작되고, 기사 자격 소지자에게 가점이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격증반으로 넘어갔습니다. 분야가 살짝 달랐지만, 기본 베이스는 전기라 어렵지 않게 쫓아갈 수 있었죠. 간단히 1차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바로 2차 실기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실기는 주관식 문제를 풀고, 특정 결괏값을 내는 간이 전자기기를 만드는 것이었죠. 시험 며칠 전에 족보 비슷한 걸 확보할 수 있어서, 실수만 안 한다면 떨어지는 게 더 어려운 시험이었죠.


 시험 당일 일찌감치 시험장에 나가 학원에서 준 예상지를 복습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3가지 예시 중 하나가 나왔더군요. 기기를 만드는데 시간이 좀 소요되는 편이라, 시험지를 받자마자 빠르게 문제를 풀고 기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공단에서 나눠주는 부품에 간혹 불량품이 있다 들어서, 학원에서 준 부품도 야무지게 챙겨갔죠. 물론 들키지 않게 바꿔치기했고요. 예상대로 기기는 원하는 결괏값을 보여줬고, 어렵지 않게 시험을 마무리할 수 있었죠. 보나 마나 이건 합격이다, 확신이 들었습니다. 개운하게 시험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죠. 지금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한마디 하더군요.


"그런데 이름은 잘 썼지?"


 어... 라... 이름? 이름? 이이~ 름? 오 마이 갓. 이름을 쓴 기억이 없었습니다. 받자마자 문제를 풀고 답을 적은 기억은 나는데, 이름을 쓰고 수험번호를 옮긴 기억이 없는 겁니다. 에이 설마... 그간 봐온 시험이 몇 개인데, 습관적으로라도 이름을 안 썼을까. 초등학생도 안 하는 실수를 내가 했을까... 불안했지만 설마설마하며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내가 그 정도 머저리는 아니라고 설득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설마는 기어코 사람을 잡고 말았죠. 결국 시험을 떨어졌습니다. 괜히 불안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문제도 다 아는 문제였고, 기기의 결과도 확인했으니 떨어질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름을 안 썼던 거죠. 초등학생도 안 하는 뻘짓을 다 큰 성인이 저지르고 만 겁니다.


 그래서 제가 '허당'이 더 어울린다고 말하는 겁니다. 뭔가 잘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곳에서 한 번씩 실수를 저지르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몇 번씩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저는 제 자신을 잘 알죠. 아무튼 떨어지는 게 더 어려운 이 시험을 떨어지고, 이걸 다시 준비하느라 제법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본시험 준비도 시간이 없어 힘들었는데, 이걸로 다시 시간을 들이는 게 어찌나 아깝던지요. 다행히 두 번째 시험은 붙어 결국 기사 자격증은 따긴 했지만, 이걸 계기로 '확인했던 걸 또 확인'하는 이른바 '확인의 늪'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되죠. 망할 '확인 강박'의 씨앗이 제 마음에 흩뿌려진 겁니다.


[ image created by MS image Creator ]


삶은 '우연과 변수와 아이러니'의 지랄발광 - 표절 덕후 시치미


 확인 강박이 힘든 건 맞습니다. 바쁜데 시간을 잡아먹고 사소한 일에 신경을 곤두서게 하죠. 하지만 인생 참 재미있다 싶은 게, 그렇다고 그것에 압도당하진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살살 달래 가며 잘 지내고 있죠. 인생은 제게 '확인 강박'이란 숙제를 안겨줬지만, 한편으로 이를 풀어낼 답도 알려줬거든요. '삶은 우연과 변수와 아이러니의 집적물이다. 완벽에 얽매이지 마라'. 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박사의 책에서 본 문장입니다. 읽자마자 무릎을 탁 쳤습니다. 몇몇 장면들이 머리를 스치며, 그래서 그랬었구나 싶더군요.


 이름을 빠뜨리는 초유의 뻘짓을 거쳐, 기어코 OOO공사 입사시험을 보게 됐습니다. 운 좋게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죠. 열아홉 직장생활을 하며 부장님께 얻어 입었던 양복을 몇 년 만에 꺼내 입고, 면접장으로 향했습니다. 다들 그러듯 우황청심환도 챙겨 먹었죠. 긴장되더군요. 다수의 면접위원들 앞에 홀로 서있자니 입이 타들어가더군요.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지만,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면접위원이 던진 첫 질문부터 바로 엇박자가 났죠.


"본적이... 흠, 전라남도 광주라고요."

"아, 네... 그렇습니다."

"광주가 전라남도 맞나요?"

"아, 아, 아닌가요? 전라북도인가... 제가 어릴 때 서울로 올라와서 잘..."


 헐헐, 면접위원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망했다' 싶더군요. 기본도 안된 애로 보이겠구나 싶어 귓불이 뜨거워졌습니다. 이후 꽤 여러 질문에 답을 했는데,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대로 당황했던 거죠. 준비했던 답변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답을 찾아봤습니다. 전라남도도, 전라북도도 아닌, 광주광역시더군요. 에휴, 얼른 다른 공사나 준비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떨어졌냐고요? 아닙니다, 뜻밖에 붙었습니다. 그때 지원자가 1200명이었는데 그중 21명 안에 든 겁니다. 아마 꼴찌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내가 의외로 답변을 잘했나?' 조금은 의아했지만, 일단 붙었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죠. 나중에 연수원에 들어와 귀 밝은 동기로부터 속사정을 들었습니다. '썰'이긴 했지만, 나름 신빙성이 있었죠. 면접위원 중에 높으신 분이 한 분 계셨는데, 이분이 전라도 출신이셨다는 겁니다. 당시 회사에 특정 대학교 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는데,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전라도 출신 지원자를 대거 채용했다는 썰이였죠. 비록 엉터리 답변을 하긴 했지만, 시작부터 저는 전라도 출신인 걸 부각시킨 셈이었습니다. 들으며 '에이, 말도 안 돼'라고 쿠사리를 주긴 했지만, 솔깃하긴 하더군요. 그것 말고 동기들보다 제가 잘난 게 별로 없어 보였거든요.


 돌아보면 비슷한 일은 전에도 있었습니다. 공고시절, 전기기기 기능사 시험 볼 때도 그랬죠. 3개월 동안 연습해 눈감고도 하는 '모터 제작' 시험에서 거의 떨어질 뻔했죠. 연습하며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이놈의 모터가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래 심사위원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데, 기능반 친구가 오더니 모터가 움찔하는 걸 잠시 보여주고는 '됐네~'하며 심사위원을 끌고 갔습니다. 심사위원도 다른 학교 기능반이었거든요. 녀석이 그렇게 설레발 쳐준 덕에, 은근슬쩍 합격 딱지를 받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불합격이었는데도 말이죠. 안도감과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와 한동안 멍해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3개월간의 연습이 무색하게 실패했고, 제 실패와 무관하게 합격한 거죠. 세상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 image created by MS image Creator ]


  양창순 박사의 이야기를 듣기 전엔 몰랐습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했습니다. 안 하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또 실수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저를 늘 '확인 강박'으로 몰아넣었었죠. 허나, '삶은 우연과 변수와 아이러니의 직접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힘을 뺄 수 있었습니다. 완벽에 대한 집착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노력하지 않았지만 성공하고, 죽도록 노력하고도 실패했던 이야기들이 하나 둘 쌓이며, 삶의 본질이 원래 그렇다는 걸 깨달은 거죠. 물론 불안이 치솟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라앉으면 저 한 문장이 되살아나 흥분한 마음을 달래주죠.


 그런 생각이 듭니다. 취직을 준비하며 저질렀던 희대의 뻘짓이 없었다면, 제가 우연과 아이러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확인 강박에 진저리 나도록 시달리지 않았다면, 과연 그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니까요.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답니다. '사람의 일을 다하고, 나머지는 우연에 맡긴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대사 '진인사대천명'을 응용한 거죠.  그저 내 할 일을 다했으면, 나머진 우연의 몫이라 여기는 겁니다. 완벽히 준비한다고 꼭 성공하는 게 아니고, 완벽히 준비하지 못했다고 반드시 실패하는 건 아니니까요.




 글을 구상하며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글 내용에 맞게 단어만 몇 개 바꿔보니 제법 그럴듯하더군요. 표절이긴 했지만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 글의 맨 앞에 박아두고는, 나머지 글을 이어갔습니다. 잇다 보니 아무래도 글의 맥락이랑 안 어울리더군요. 그런 내용의 글이 아니었죠. 그래 몇 번이고 바꿀까 고민하다, 결국 내버려 뒀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행동자체가 글의 주제와 어울린다 싶어서요. 맥락상 안 맞으면 좀 어떻습니까. 완벽하게 어울리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글을 읽는데 도움이 되려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삶은,


'우연과 변수와 아이러니의 지랄발광' 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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