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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딘 Feb 09. 2024

트럼프형 인간, 오버마형 인간

[어쩌면 그럴 수도 Episode 7 ]

 살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친구로 만나고 동료로 만나고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만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즐거운 만남도 있고, 때로는 떠올리기 끔찍한 만남도 있습니다. 만남이 시작될 때부터 '이 사람은 어떻다' 단번에 알아채면 좋을 텐데, 그걸 못해 사람 때문에 애먹는 경우를 종종 겪죠.
 그래도 나이를 허투루 먹지는 않았나 봅니다. 
생의 반환점을 지나온 저는, 이것저것 주워듣고 이 사람 저 사람 겪어 본 덕에, 나름의 '구별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제 바느질을 덧대면 제법 쓸만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생의 태도를 결정짓는 두 가지 요인은 욕망과 공포다. 이 중 공포는 불확실성 때문에 생기는데, 이 불확실성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좌와 우가 나뉜다. 불행히도, 이는 타고나는 거다- 김어준'

 사람들은 누구나 불안해합니다. 한 치 앞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죠. 돈이 많다고 배움이 깊다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생(生)에 '내던져진' 인간의 불가피한 운명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해결책을 찾아 나섭니다. '어떻게 하면 불안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고요. 고민의 결과
 우리 곁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김어준의 저서 '닥치고 정치'에 따르면, 바로 '본능'에 따르는 사람들과 '이성'을 따르는 사람들이죠.


 '삶은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 거다. 그러니 힘을 길러서 살아남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불안에 '본능적'으로 반응사람들이 한 축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힘'입니다. 힘이 있으면 살아남는 거고, 힘이 없으면 도태되어야 합니다. 힘 있는 자가 소유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고, 힘없는 자가 가지려 드는 것은 부덕한 짓입니다. 전라디언, 김치녀, 좌좀 등으로 한동안 우리 사회를 당황케 했던, 일간베스트야 말로 '힘의 논리'의 전형적인 현신
이죠.


 반면, '불안의 크기를 잘게 쪼게,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크기를 줄임으로써 이에 대응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 즉 불안에 '이성적'으로 대응하려는 사람들이 다른 한 축이라고 합니다. 미래는 누구에게나 불안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개개인에게 최소한의 보호막을 제공해 줌으로써 불안에 대응하자는 논리입니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취하는 정책이 이런 관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image by Mohamed_hassan from pixbay]

 
 주목해야 할 점은 '어디서 이런 태도의 차이가 생겨나는가'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힘의 논리로 세상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걸까요. 제가 찾은 대답은 이렇습니다. 바로 '공감 능력의 차이' 때문입니다.


 대게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낮습니다.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지만, 이들에게는 특별히 자신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이 중요한 만큼 자신에게 쏟는 에너지가 많고, 에너지가 많은 만큼 성취도 월등합니다. 싸이코패스나 소시오 패스들이 그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라 보면 정확할 겁니다. 반면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만큼, 타인의 감정을 읽는 일에는 무디고 더딥니다.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자기화하지 못하니, 그들에 대한 이해나 배려는 언감생심이겠지요.


 반면 이성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뛰어납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고 나의 이익을 위해 타인이 고통받는 것을 참기 어려워하죠. '나'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만 '매우' 행복한 것보다는 우리가 '적당히'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들이죠. 시선이 밖으로 쏠린 만큼 함께 사는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존재들이지만, 고려하는 게 이것저것 많다 보니 성취에는 잼뱅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옆에서 보다 보면 세상을 어렵게 사는 저들이 답답하고 한심해 보이기까지 하지요. 일베 표현을 빌자면 '씹선비질'에 빠진 사람들이랄까요.



 어렵게 설명했지만 쉽게 말해, 전자는 '트럼프형' 인간이고 후자는 '오버마형' 인간을 말합니다.


  트럼프형 인간일수록 '접근동기'에 의해 움직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크게 보고 긍정적면에 집중, 성취를 위해 앞으로 나서는 경향이 강합니다. 시대를 매듭짓는 굵직굵직한 변화들은 대게 이런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반면 오버마형 인간들은 '회피동기'에 의해 좌우됩니다. 삶 곳곳에 숨어있는 부정적인 면에 집중, 이것을 어떻게 없앨 것이냐가 이들의 지상 과제입니다. 일반적으로 변혁의 시기에 필요한 인물상은 전자일 테고, 안정의 시기에 필요한 인물상은 후자가 될 것입니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진보 쪽 인사든 보수 쪽 인사든, 어떤 '공감능력'을 타고났느냐에 따라 세상을 향한 시각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저소득층 사람들(계급배반), 문재인을 지지하는 고소득층 인사들은(강남좌파) 모두 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생각합니다.


 물론 두부 자르듯 양자를 나눌 순 없습니다. 실제론 양 극단 사이 어딘가에 우리들은 각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 말이죠. 이분법에는 우열이 따르기 마련인데, 개개인이 자리 잡은 위치에 따라, 어떤 태도가 '우'고 어떤 태도가 '열'인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판단은 개인의 몫이겠죠.



 다소 장황하긴 했지만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자, 당신에게 다가오는 낯선 이가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힘에 따라 사는 사람인가요,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인가요? 내가 중요한 사람인가요, 우리가 중요한 사람인가요? 참고로 전 전자 쪽 사람들하고는 잘 안 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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