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알 것 같아.
애틋한 마음이 뒤섞인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정말 재미있게 놀았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곳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인상을 가진 선생님이 계셨고, 정말 많은 장난감이 있었다. 보통 장난감이 아니라 흙도 있고 흙에서 놀 수 있는 멋진 자동차들 그리고 인형 놀이를 할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인형들과 집, 소품들이 아주 높은 책장 가득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에 설레고 신났던 것 같다. 나누지 않아도 되고 혼자 그 공간에서 놀고 있으면 됐으니까.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그 공간이 상담실이었다고 했다. 요즘처럼 카메라를 두고 나의 놀이 패턴을 파악했던 정도의 상담이었는지, 아니면 선생님과 엄마의 대화를 기다리기 위해 혼자 놀던 공간일 뿐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에게 엄마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이해하면 슬프고, 도저히 이해하려 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엄마의 선택들이 답답하고 숨 막히지만, 이해하려고 애쓰면 감정만 상해서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그냥 선택의 이유를 해석하지 말자.’ 결론을 내리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나는 사고를 많이 치던 고집이 센 아이였고, 울기보다 당당하기를 선택하는 아이라서 상담을 시작했다고 혼자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사고뭉치’라서. 엄마의 말을 옮기자면, 유독 엄마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한참 엄마 옆에서 재잘거려야 할 나이에 그러지 않고 있으니, 엄마도 걱정이 돼서 상담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림 치료에서 가족을 그려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2개의 집을 그리고 한 곳에는 아빠와 작은언니, 한 곳에는 엄마와 큰 언니를 그렸다고 했다. 아빠와 작은 언니는 가깝게 인지하고 있지만 엄마와 큰 언니는 그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결과를 들었다고 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었을 때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어렸을 때, 엄마의 사랑이 고팠던 건 사실이지만 공간을 분리할 만큼 멀게 느끼지는 않았는데 마치 내가 이성적으로 애써 부정하던 영역까지 침범당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의식 속에 엄마의 사랑이 멀게 느껴졌더라도 그건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을 거라며 묻어두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엄마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엔가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가신 것처럼, 엄청난 축복이 나에게 왔다고 기뻐했던 날이 있다. 엄마가 단둘이 데이트를 하자고 했던 날이었다. 언니들은 있는 빼곡한 사진첩이 나에게는 없었다. 사진이 너무 많아서 사진첩이 사진의 양을 감당하지 못해 너덜너덜해진 그 사진첩이 나는 없었다. 그 사진첩에는 어린 언니들이 엄마와 단둘이 벤치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순간과 아이스크림을 질질 흘리며 먹는 언니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엄마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배꼽이 빠지게 보던 그 사진첩이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크면서 조금씩 인지했다. 젊고 행복해 보이는 엄마와 조그맣게 웃음 짓는 언니들의 어린 시절 사진은 나의 결핍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엄마와 데이트를 안 해본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서글펐는데, 단둘이 데이트를 나가자는 엄마의 말은 나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엄마가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나와 맛있는 밥을 먹으며 나에게 어울리는 목걸이를 사준 기억이 어떤 기억보다 선명하게 남아있다. 수많은 나날 중 그 하루가 선명하다. 금도 은도 아닌 그 목걸이를 매일 같이 목에 걸고 다녔다. 씻을 때도 잘 때도 빼지 않고 항상.
그러니까 엄마.
엄마의 사랑은 매일 빼곡할 필요도 없고, 값비싼 물건일 필요도 없어.
수많은 날 중 하루, 재질보다 엄마와 목걸이를 고른 그 순간이 이렇게 내 마음 안에 남아있으니까.
성인이 되고도 사춘기를 겪던 내가 엄마한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 엄마는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부모로서 가정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고. 그때 엄마는 살면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해줬는데, 그때는 그 말이 치사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이제는 알 것 같아.
단둘이 데이트를 나갈 시간이 없었고, 맛있고 좋은 외식을 할 돈이 부족했고, 좋아하는 물건 하나 사주기 어려웠던 그 순간을.
엄마의 관심과 애정만으로 충분했던 나 말고, 사랑을 주면서도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 느꼈을 미워지는 엄마의 마음을.
이제는 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