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입사로 돌고래인간은 다시 수족관으로..
돌고래 IQ인 내가 대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회사에 공채로 입사했다. 돌고래인간이 웬일? 아마도 TV에 출연한 대학생 사장 스토리가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입사와 동시에 저지능 콤플렉스를 극복한 줄 알았다. 하지만, 능력에 비해 좋은 회사에 입사한 것이 비극의 시작. 학창 시절에는 남들보다 많은 시간과 열정을 땔감으로 써서 성과를 냈는데, 모두가 야근을 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시간을 몽땅 팔아 성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회의 시간만 되면 듣기 평가의 연속. 회의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업무지시를 기억할 수도 없었다. 분명히 한국어인데 호두를 닮은 뇌 속에서 외계어가 난무했다. 내 귓속에는 달팽이관이 없고 살아있는 달팽이처럼 묵직한 무언가가 귓구멍을 막고 있었다. 왜 매번 나만 듣기 평가를 못 할까?
“이해의 변비”가 쌓이면 아주 위험하다. A 업무가 이해되지 못한 채 B 업무가 들어오고 C 회의가 열리면 ABC가 합쳐진다. 금세 DEF가 세력을 규합한다. 머릿속은 알쏭달쏭 알파벳 송의 향연. 알파벳 송이 무한 재생되는 동안 영혼은 ABC 초콜릿처럼 녹아내렸다. 결국 누적된 업무 변비로 폭발했다.
업무 변비가 쌓여서 폭발할 것 같았다. 분출이 안되니 메탄가스 폭발로 터져 죽기 일보 직전. 자신감이 발바닥 높이에 위치하니 회사를 기어다니는 기분이랄까?
"어차피 기어다닐 거면 맨날 술에 취해 기어서 출근하는 옆 팀 박 대리가 낫다"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 친구는 술 깨면 일이라도 잘하니까. 그렇게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사람으로 점점 낙인찍혀갔다.
학교 다닐 때는 호윤이처럼 나에게 설명을 해주는 학습 가이드가 있었지만, 소리 없는 전투지 회사에서 나를 살려줄 나이팅게일 같은 존재는 없었다. 물론 죽으란 법은 없다. 옆자리에는 똑소리 나는 정수 선배가 있었다. 가끔은 정수 선배에게 "선배 아까 회의 시간에 팀장이 저에게 한 업무지시 좀 설명해 주세요"라고 커피 조공과 함께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하루에 50잔의 커피를 살 돈도 없고 정수 선배가 커피 50잔을 마시면 위궤양이 올 것이 분명했다.
팀장의 다이어리를 도촬하다
"이해의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팀장은 나에게 시킨 업무에 대해 다이어리에 적는 습관이 있었는데 매일 팀장의 퇴근을 기다렸다가 다이어리로 기어가서 업무지시를 도촬 했다. 사설탐정처럼 증거를 확보한 후 다음날의 기획서를 준비했다. 그래도 결과는 실패였다.
팀장이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은 업무지시대로 준비하면 브랜드의 장기 방향성과 같은 난제에 속수무책 깨졌다.
"돌변씨! Luxury Brand라는 뜻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렇게 단편적으로 이해하시면 안 돼요"
돌고래인간은 망가진 도자기처럼 화덕으로 던져졌다. 직속상관에게 깨지는 쨍그랑 소리가 하루에도 30번은 들렸다. 팀장도 내가 답답했겠지만, 나도 내가 답답했다. 억지춘향도 할 수 없는 돌고래인간. 보통 사람들과 생각과 박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탈출하지 않으면 몸뚱이는 살더라도 영혼이 장례식을 치를 것 같았다. 저승사자가 내 영혼 데려간다고 이미 자주 찾아왔었다. 퇴사하면 무엇으로 먹고살지? 어쨌거나 돌고래인간은 회사라는 수족관을 탈출하기 위해 퇴사했다.
퇴사하고 다른 일에 도전하기로 했다. 다만, 직장에서 하도 무시를 당해서 자존감이 바닥났으니 우선은 나를 토닥토닥해줘야 했다.
흙수저 돌변! 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네가 한 노력은 정말 대단했어
이제 너에게 쉼을 줄게
퇴사 이후의 깨달음: YES라는 이름의 쓰레기통
듣기 평가와 같은 업무지시를 이해하지 못해 팀장의 다이어리를 도촬해도 실패였다. 전 직장에서 퇴사 후 여러 일을 전전했다. 최고는 아녀도 나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산다.
"어쩜 회사 다니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해내고 성과까지 냈어요?"라는 좋은 칭찬도 받았다.
저 성과에서 나름 고성과로 바뀌면서 업무능력이 부족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여러 가지 이유가 많지만, 하나만 풀기로 한다.
가장 큰 이유는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소심함.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고 눈치 보다 망했다. 유관부서의 요청을 모두 받아주다 보니 배가 산으로 갔다. 프로젝트 전체의 방향성을 날카롭게 정리하면서 수풀을 헤치는 것이 마케터의 업무인데 예수의 가르침처럼 모두를 품고 사랑하려 했다.
NO는 없고 YES만 있었다. 사실 가짜 YES였다. 소심해서 다양한 부서의 의견을 조율하지 못했다. 직장에서 흔히 벌어지는 "이 업무 네가 맡아서 해"라고 휙휙 던지는 일에 NO를 외치지 못했다. 나는 "YES라는 이름의 쓰레기통"이었다.
쓰레기통의 수용능력이 초과되면 쓰레기는 밖으로 나돈다. 당연히 제때 일을 완료하지 못했고 미해결된 업무는 쓰레기가 됐다. 일 못하는 무능력자로 후배들의 무시를 당으며 팀장에게는 조롱을 당해야 했다.
거절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꼭 말하고 싶습니다.
NO라고 빨리 말해야 합니다. 미해결된 업무는 발효된 똥처럼 메탄가스가 쌓여 폭발합니다.
할 수 있는 것만 YES라고 하세요. NO와 YES의 선택은 생존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릇에 맞게 살아야 하듯이 자신의 업무 용량에 맞게 업무를 담아야 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신이 판단해야 합니다.
거울 앞에서라도 "거절 연습"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