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을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스테이크와 함께 와인 한 잔 마시는 경우 보통 프리미엄 대리 기사 서비스를 이용한다. 일반 대리서비스와 금액차이는 크지 않은데 운전의 퀄리티는 확실히 좋다. 난폭운전 절대 안 하고 고객에게 바쁘다고 재촉하지도 않는 프리미엄 서비스. 의상도 다르다. 기사님을 처음 만날 때 정장을 입고 오시길래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다가오는 줄 알았다. 일반 대리서비스는 만나자마자차 어딨 냐고 재촉하는 경우도 많은데, 대리회사에서 15분 동안 기사님을 대기시켜도 된다는 문자가 온다. 단 한국말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 15분 지나면 10분당 3,000원 과금된다. 마지막 인사말로 "프리미엄 기사님과 품격 있는 서비스를 누려보세요"라는데 아직까진 대만족이다.
멀리서 작은 키에 안경을 쓰신 기사님이 걸어온다. 장마철 습도 때문인지 검정 뿔테의 안경 렌즈에는 김이 가득해 처음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였다. 그렇게 한 차에 탑승했다. 30분 동안 얼마나 친해지게 될지도 모른 채. 그와 친해진 이야기를 3단계로 소개한다.
친해지기 1단계: 자동차 이야기
시동을 걸고 출발하며 기사님이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말을 건다.
"어머! 이 차에 전기차 모델도 있네요? EV(전기차를 뜻하는 용어) 모델은 처음 타봅니다."
"네~ 흔치 않죠?"라고 내가 짧게 대답한다.
"저도 컨트리맨이라고 박스카를 타는데 높아서 편리하고 짐도 많이 실려서 너무 만족합니다."
대리기사님의 자동차
"박스카타입이 편한 부분도 있죠. 원래는 훨씬 괜찮은 차 타고 다녔는데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라 이자비용도 아낄 겸 이 차로 바꿨습니다. 근데 후회하는 부분도 있어요. 체급차이가 크다 보니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하네요"
"저도 투자에 관심 많아요 근데 차는 얼마에 샀어요?"라는 기사님의 질문에
"네 이거 800만 원에 샀어요. 15만 킬로 넘었는데 전기차 배터리 한 번 교체한 차라 짱짱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아주 잘 선택하신 겁니다. 용기 있는 결정 하셨네요"라고 칭찬을 해주셨는데, 키 작고 왜소한 그의 어조에는 골목대장 같은 은근한 담력이 느껴졌다.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슈퍼울트라 T이지만, 검사만 하면 INFJ로 나오는 나의 F가 입술을 지배했다. 주변에서 다들 내가 F라고 하면, 검사 잘 못됐다고 사기라고 한다. 이날만큼은 흥분한 입술의 주인장이 왜 F성향인지 확실히 인지시켰다. 역시 내 F는 사기가 아니다.
친해지기 2단계: 추파춥스 전략과 투자 이야기
자동차 이야기는 금방 마무리되고 기사님은 나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조금 전 투자라고 하셨는데 주로 무슨 투자하세요?" 명탐정 코난처럼 동그란 안경을 착용한 그가 나에게 탐정의 돋보기를 들이댔다. 사실 나도 느꼈다. 조금 전 그는 자동차와 관련한 여러 대화 중에도 유독 '투자'라는 단어에 눈이 커졌다. 작은 눈이 만화주인공처럼 커진 걸 생각해 보면 '투자'라는 단어는 이 기사님의 마음의 문을 여는 '마스터키'가 분명해 보였다.
본인도 투자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무슨 투자하세요?"라고 나에게 물어보길래 부동산, 주식 다한다고 했다. 보통 "투자를 좋아한다"는 말은 "여행을 좋아한다"는 정도로 들린다. 대개는 주식과 코인을 조금씩 사고파는 경우가 태반이다. 부동산의 경우는 사고 싶은 아파트의 시세만 관찰하고 매수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투자에 관심 있다고 해도 찐 투자자들은 드물다.
출발지인 삼성동에서 자택까지 30분이 거리인데 이미 절반이 지났다. 우리는 급진적으로 친해졌다. 역시 사람과 친해질 땐 여러 '추파'를 던져보고 반응이 오는 대화를 '추파춥스'처럼 달콤하게 입에 넣어드려야 한다. 그는 나와의 대화가 달콤해 보였다. 이 자리를 빌려 보험영업 출신 어머니와 길에서 잡화를 팔았던 아버지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세일즈 집안의 아들답게 몸은 뻣뻣해도 혀가 유연해서 달콤한 '추파춥스'를 선물할 줄 안다.
남은 시간 동안 기사님의 충격적인 정체가 공개된다.
친해지기 3단계: 공감 전략! 대리기사님의 자발적 '신상 털기'
성동구 토박이인 그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화장품 유통업을 하며 돈을 모아갔다고 한다. 고향 성동구의 재개발을 통해 자산을 불려 나갔고 현재는 우리나라 재개발 중 가장 비싼 한남 뉴타운 보유자라고 했다. 내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나라 재개발 중 1등인 한남뉴타운 이라고요?"
궁금한 건 못 참는 나답게 혹시나 한남뉴타운을 팔아버린 건 아닌지 질문했다. 여전히 보유하고 있으며 한강뷰에 미래의 강남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고 깨알자랑했다. 알아봐 주니 그래도 기분이 좋으신지 한남뉴타운 중에서도 대장급 입지인 5 구역을 갖고 계신다는 TMI를 선물해 주셨다. 실제로 집에 와서 찾아보니 우와 한강뷰 가 멋있다 못해 바라보다 심장이 놀라서 멎을 것 같은 뛰어난 입지다.
처음 만난 대리 기사님이 나에게 전 재산과 인생을 오픈하는 취중진담과도 같은 상황. 사람은 감정이입이 되고 '공감'을 느끼는 순간 TMI가 된다. TMI가 됐다는 것은 숨기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뜻. 결국 기사님은 자발적으로 신상 털기를 했다. 역시 '공감능력'이야말로 개인주의의 시대에 상대방의 완전군장을 해제시킨다. '공감능력'의 마취효과가 시작되면 안 물어봐도 모든 것을 말해주는 투머치토커가 된다. 진통효과가 뛰어나서 본인이 1분당 몇 단어씩이나 내뱉는지 모를 정도로 속사포처럼 자기 자신을 오픈한다. 세일즈를 오래 한 내가 사람의 감정을 잘 어루만진다는 자뻑을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낮에는 주로 어떤 일 하세요?"라고 질문하니 머쓱해하시면서 하신 말씀.
"제가 사실 그... 그... 건물을 하나 갖고 있어서 그거 관리합니다."라고 했는데 딱 봐도 진지하고 필요 없는 이야기는 안 하는 스타일. 그런 그가 나의 추파춥스 전략과 공감 능력으로 그는 TMI가 됐다. 낮에는 건물주라 그거 관리하고 틈틈이 대리 운전하며 게을러지지 않도록 자기 관리한다고 했다. 대박 한남뉴타운에도 모질라 건물주였다.
찬또배기 가수 이찬원의 노래가 라디오로 흐르는 가운데 투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진또배기. 처음에는 기사님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가짜 가난과 가짜 부자의 사이에서
사장님은 남들 시선신경 쓰지 말라고 조언을 해주며 호텔에 경차 타고 가서 '궁핍코스프레' 하시는 사모님 이야기를 해줬다. 경차를 타고 호텔 발렛을 맡기시며 당당하게 차에서 내리시는 사모님. 이때 호텔직원들이 우습게 보면 "지금 나 무시하는 겁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요?"라고 혼쭐 내주는 부자 사모님이 있다는 거였다. 사모님께는 실례지만, 다소 변태 같은 취미 같다.궁핍코스프레 사모님은 가난을 위장한 '가짜 가난'이다.
한남동 건물주와의 고별타임이 왔다.
"사장님 오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했더니 나보고 인생 너무 잘 살고 있는 거라며 연신 칭찬을 해줬다. 본인도 50대인데 나보고 앞길이 창창하다며 교회에서 새 신자에게 해주는 축복송처럼 손을 뻗어 날 축복해주고 있었다. 물론 "차키 여기 있습니다"란 멘트와 함께 손위에는 차키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축복하며 다가오는 따뜻한 손길로 느껴졌다.
기사님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니 게슴츠레해 보였던 눈망울이 선명하고 총명하게 다시 보였다. 땀 흘리며 소탈하게 사는 멋진 부자여서 달리 보였을까? 아니면 습도가 내려가 안경 렌즈가 건조해져서일까?"사장님~ 많이 배웠습니다"하고 다시금 허리 숙여 인사했다.
헤어지기 아쉬우셨는지 축복멘트에 이어 고별 멘트까지 하셨다. 본인이 VIP 대리기사만 하기에 보통 부자들이나 사업하는 사람들을 종종 모신다고 한다. 근데 반드시 좋은 차를 타고 다니지는 않는다고 한다. 꼭 필요한 지출에는 아낌이 없지만, 남 눈치 보며 소비하는 면은 별로 없다 했다.
축복받은 새 신자에게 성경 말씀과도 같은 사장님의 클라이맥스 멘트가 흘러나왔다.
가짜 부자나 자랑하는 거예요. 진짜 부자들은 자랑 안 해요.
풍족하면 자랑할 필요가 없지만, 결핍이 있으면 자랑을 해서라도 존재 가치를 높이고 싶어 진다. 하지만, 스스로 가치를 높이는 행위는 하면 할수록 오히려 가치가 낮아지는 역설이 존재한다. 마치 갯벌에서 걷는 것처럼 점점 낮아진다.부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진짜 부자가 아니라 가짜 부자다.
차가 문제가 아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고급차를 타도 다른 컴플렉스가 나를 위축시킬 테니...
에라 모르겠다! 이제부터 자신감 있게 가자! 동창회에 갈 때도 고객을 만날 때도 당당하게 똥차 타고 간다. 지하주차장은 NONO! 야외 주차장에 파랑새를 주차해야겠다. 한남동 건물주인 대리가사님이 똥차 파랑새를 운전해 준 그날밤의 기억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