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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갑

by 이지원 Mar 09. 2025


  ー아마도 그건 내가 깨지 못한 꿈의 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런 말을 몇 번인가 내뱉었다. 낯설지 않은 말이다. 이십 년을 넘도록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얼굴을 맞대고 숨을 나누었다. 거칠하게 마른 피부를 짓이기는 손길에도 사랑이란 것이 있으리라 믿었다. 두 어깨를 새파랗게 뒤덮은 키 작은 꽃의 이름은 아마 사랑일 것이라 생각했다. 목울대를 떨며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그 소리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갖고 태어났을 때에도. 그리하여 바로 뜬 두 눈이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에도.  


 같은 곳에서 살고, 같은 피부의 결을 갖고, 같은 눈을 갖고, 같은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무서웠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그곳에도 가뭄이 찾아왔었다. 새카만 그림자로 이루어진 괴물이 집을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괴물이 찾아왔다. 온통 새까만 방이었다. 손톱만큼 열린 문틈으로 거실의 조명이 한 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실을 어지럽히던 괴물은 사람의 가죽을 훔쳐 쓴 채로 울부짖었고 그 사이로 다른 사람이 짓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밝은 빛이 흘러나오는 곳이 사실은 가장 어두운 곳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사람의 말일까, 아니, 사람의 말도 아닌 것. 무엇 때문에 뱉어진 분노인지도 모르는 것. 커다란 괴물은 온 집안을 헤집고 사람의 마음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네 개의 긴 손톱으로,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그 틈으로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힘을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잡아먹히면 그다음은 내 차례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강렬하게 번쩍이는 빛이 얼굴 반쪽을 뒤덮은 건 그다음이었다.  빨간색, 파란색. 뜨겁고 차가운 색. 가슴 안쪽이 서늘해지는 걸 느껴서, 그냥 숨을 참고 둥글게 부푼 이불에 몸을 숨겼다.


 모르겠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지? 형광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전등 스위치를 눌러 어둠을 사르고, 새빨갛게 충혈된 어린아이의 두 눈을 마주하고서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던 젊은 남자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직접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남자는 반쯤 이불에 싸인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아이를 보고는, 따가운 눈물이 할퀸 얼굴로 시선을 옮겼고,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몸을 숙였다. 그 직후에는 팔과 다리에 시선을 던지며 파란 꽃을 찾았다. 등 뒤에 안타까움을 업은 채로, 이를 잡듯 날카로운 시선을 하얀 살갗 위에 던지다 완전히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물러갔다.


 괜찮아, 어서 자. 푹 자. 사람의 온기를 품은 목소리가 빛없는 방 안에 풀어졌다. 부모가 아닌 사람에게 듣는 말이, 적이 낯설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괴물은 집안을 자주 드나들었다. 제집처럼 드나들며 태풍을 몰고 왔다. 어지러운 소용돌이를 그리는 바람이, 몇 차례나 사람들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었다. 괴물의 긴 손톱은 아직 뜨거운 가슴을 세로로 가르고 마음을 빼앗았다. 어떤 맛인지도 모를 '마음'을 괴물은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알던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똑같이 괴물이 되어갔다. 성을 내는 이유도 가지각색. 성적이 좋지 않아서, 깜박하고 인사를 하지 않아서, 그냥 오늘 스트레스를 받아서,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아서.


 조금 큰 괴물이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는 몸을 바짝 웅크린 채로 긴장해야 했다. 잘못한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손이 나갔으니, 그가 처음 택한 생존의 방식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나는 방어를 택했다. 어떻게든 집안의 화마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방법을 찾았다. 몸이 약해 그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별로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남의 가슴을 세로로 갈라내듯이, 나도 나의 몸 중 한 부분을 갈라내면 될까. 그러나 이미 마음의 빈자리를 장악한 괴물들이 겨우 그 정도로 물러갈 리 없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다. 소리를 멈추고,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지독하게 몰두할 수 있는 수단을. 그리고 최종적으로 택한 도피처는 그림과 글. 몹시 정적이지만 폭발하는 불안을 숨길 수 있는 벽이었다.


 반면, 조금 큰 괴물은 정적인 활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참고 삼키는 나와 달리 무엇이든 내보내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어떤 충격을 마주했을 때도 그것을 내부로 소화시키기보다는 외부로 방출해야 했다. 사람이었을 적에는 잘 조절되었던 것이, 마음을 빼앗기고 난 뒤에는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운동이나 친목으로 건전히 풀던 스트레스가 집안의 가장 약한 사람에게 향한 것은 그때쯤이었다.


 등허리를 자주 걷어차였다. 어쩌다 물건을 제자리에 놓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시끄럽게 굴면 곧바로 욕설이 날아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순간 몸에는 파란 꽃이 피어났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옷장에 부딪혀 불룩하게 혹이 난 뒤통수가, 이리저리 할퀴어진 몸이 싫었다.


 괜찮아, 내일이 되면 우리는 다 돌아올 거야. 지독한 꿈속을 걷고 있는 거야. 온통 검게 변한 당신들의 눈도, 잔뜩 일그러진 얼굴도, 비어버린 가슴에 내려앉은 밤이 물러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겠지.


 나도 정신줄을 놓고 싶다. 그런데 왜, 왜 나는 당신들처럼 될 수 없는 걸까. 당신들은 왜 악몽의 건너편에 사람의 정신을 놓고 왔을까. 내 가슴은 왜 갈라지지 않고, 형체 없는 괴물은 왜 나의 마음을 긁어내지 않는 걸까.

어쩌면, 나도 이미 괴물이 되어버렸을지도 몰라.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야.



 악몽 위로 몇 년의 시간이 쌓였다. 모든 것이 괜찮았다. 가끔 괴물이 머리를 디밀고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먹긴 했지만 예전만큼 힘을 쓰지는 못했다. 몇 번의 욕지거리를 피하고 나면 잠이 들었고, 낮이 찾아오면 햇볕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나 고전적인 클리셰에 안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멀쩡했다. 보통의 집과 다를 것이 없었다. 모두가 행복했고, 모두가 괜찮았다. 나는 그들이 되찾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받아먹으며 자랐다. 어쩌다 괜찮아진 건지, 어떻게 괴물을 물러가게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나 지독하게 생생한 꿈이었을까,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조금 큰 괴물로부터 등허리를 걷어차이지 않았다. 성적이 좋지 않아도 아주 큰 괴물에게 욕을 듣지 않았다. 울렁거리던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잠잠해졌다. 아무리 그 중간 과정을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마음 안에 남아있는 두려움은 아직도 작게 똬리를 튼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사람으로 돌아온 이들은 사과했다. 내가 힘들여 짚지 않아도 조목조목 짚어 내어 사과를 건넸다. 내가 받아내어야만 끝이 날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고심하던 나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었다.


 이제 남은 것은, 스스로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것뿐이다.


 아픔 따위는 물려주지 않도록, 건강하게 보살피는 것.

 나는 괴물이 물러간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스스로의 마음을 돌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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