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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은 말

by 이지원 Mar 28. 2025

 점점, 사람의 말을 잊어가고 있다.

흰자가 많은 눈을 바로 보지 못한다. 사회적인 동물이니만큼 누군가와 교류하지 않으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다. 곁에 사람이 있으면 두 팔과 다리가 단단히 묶여, 무언가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낯빛이 희고 매끄러운 얼굴도 이제는 수명을 다했는지 반쯤 떨어져 나갔다.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생명체를, 아무것도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


 살이 새빨갛게 익을 정도로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딛고 있는 것이 바닥인지, 하늘인지도 모를 정도로 뿌연 김이 욕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 물속에서, 새빨갛고 뜨거운 잔상이 어지럽게 뒤엉킨 곳에서 흘러나오는 자그마한 속삭임을 들었다.


거짓말이었을지도 몰라.


 


 어린 나는 남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사람이 무섭다는 이유가 아니라, 그저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유명 가수의 노래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오뉴월의 햇살 아래에서 뛰어노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을 마다하지는 않았으나 그리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사람의 관심은 뜨거운 더위와 같았다. 옷을 끈적하게 달라붙게 하고, 온 신경을 곤두서게 하며, 두 볼과 귀를 잔뜩 달아오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목구멍과 턱이 저릿해질 정도로 밀려오는 긴장감에 전혀 내성이 없었다. 그러니 복작거리는 인파를 헤치고서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야 했다. 쿰쿰한 책 냄새가 풍기는 도서관이나,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수족관의 곁이 가장 대표적인 피난처였다. 나는 그곳에서 몇 권의 책을 빌려 읽거나, 입을 오물거리는 물속의 잉어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종이를 수놓은 검은 활자와 붉은 비늘을 빛내는 물고기만큼은 내게 피로감을 선물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나름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자라는 동안, 집안의 어른들은 속이 타들어갔다. 또래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퍼즐을 맞추고, 어제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멋진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끝자리에 앉은 딸아이는 무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책 속에 코를 박고 있거나, 종합장을 펼쳐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엄마는 아침마다 '기운이 나게 하는 마법'이라며 목 뒤에 좋은 향기가 나는 무언가를 발라주셨고,  다른 아이에게도 말을 걸고 다가가 보라며 나름의 격려를 보내주셨다. 친구를 그다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혼자 있는 것을 좋게 보는 시선은 없었기에 나는 마지못해 무리 속으로 구물구물 기어들어갔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러한 시선을 많이 접했다. 혼자 있는 것은 외로운 것.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보기 좋은 것.


 정말 외로움을 맛보고 있는 사람도 있기야 하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달랐다. 아침에 눈꺼풀을 여는 순간부터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잔뜩 물들였기에, 외로움이 찾아올 틈이 없었다. 발밑의 바닥이 얼마나 단단한지, 봄을 맞아 이제 깨어나는 꽃잎이 얼마나 찬란한지, 새로 찾아온 바람의 향기는 얼마나 달큼한지. 설탕과자처럼 바스러지는 모든 것을 눈과 코와 입술과 손에 담고, 그것을 되새기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므로 남의 말을 듣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물론 불필요한 오해와 상처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할 때는 잠시 감상에서 깨어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고 사람의 말소리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던 과거는 어쩌면 반쯤은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곁을 파고들어 함께 지내는 것이 보기 좋아 보여서, 그저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그런 가르침을 알게 모르게 받으며 살다 보니 자신마저 속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사랑을 받고, 온기가 남은 그것을 내가 알던 다른 것들로 꾸며내어 다시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또 좋은 점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내가,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만 지독하게 파고들던 내가 알던 단어와 알던 문장으로 새롭게 꾸며 줄 무언가가 있으니.


모든 걸 잊어가는 가운데에서도, 그것만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이 안에서 새 봄을 맞이할, 유일한 선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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