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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의 정원 Nov 17. 2024

세상에서 사라지기

아들의 아스퍼거 진단 - 3

아이가 아스퍼거 진단을 받은 이후로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결심했다.

아이를 데리고 센터를 옮겨 다니며 치료를 받고, 치료사선생님과 의사소통하며,

집에서 아이를 교육하기 위해서 내가 직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이의 상태를 알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이를 기르는데 전념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세상과 단절했다.


그 당시 입주 육아도우미 액수는 조선족이 180만원, 한국인이 230만원 정도였다.

그때 내 월급은 250만원 정도였기 때문에 남편과 상의 하에 일을 포기했다.

친정엄마는 엄마로서 딸인 내 선택을 애닮파 하셨지만, 외할머니로서 손주의 미래를 생각하니 말리지 못하셨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을 겪은 후 세상의 즐거움을 다 등지고,

아픈 아빠를 돌보는 엄마에게 아픈 손주까지 떠넘기는 건 인간으로서 염치없는 일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말고, 우리 부부는 우리 아이를 책임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했다.


오은영 선생님께서 여러가지 치료를 해보자고 말씀하시며,

짠한 표정으로 나를 보시더니 이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다섯 쌍둥이를 기르는 것보다

더 힘들고 고달플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아이는 소리에 극도로 민감해서

지하철 화장실의 핸드드라이어 소리를 들으면

비명을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어댔다.

처음 그런 반응을 봤을 때 주변 사람들도 수군거렸지만

나도 생각지 못한 아이의 모습에 당황스러웠고, 힐끔거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고, 평생 아이가 이럴까 봐 불쌍했다.


어떤 야채를 갈아서 이유식을 만들어줘도 잘 먹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편식이 심해져서

두부, 계란, 국수, 푸딩만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다른 야채나 거친 식감의 재료를 주면 아이는 게워냈다.

외식은 불가능했고, 부드러운 조기구이를 겨우 먹게 됐다.

나중에 아이가 커가면서 두부, 무우를 넣은 청국장을 먹게 되었는데

청국장 속 야채를 먹는 게 너무 고마워서 거의 날마다 청국장만 끓여댔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이의 눈은 생기가 없는 검은 바둑돌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어도

내 존재를 통과해서 너머의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멍한 시선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관심있는 자동차 이야기만 반복했다.

마음과 생각을 주고받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센터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어쩌다 소란을 피우는 성인 장애인을 만나면

지하철 안 사람들이 힐끗힐끗 바라보고 귀속말하는 그 광경이

우리 아이의 미래인 것 같아서 아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땅만 보며 걸었다.


아스퍼거 아이들은 감각수용이 예민하기 때문에 쏟아지는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을 차단한다.

예를 들어 일반아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주의를 기울어야 할 엄마의 목소리, tv 소리만 부각돼서 들리고 나머지 소음들은 뒤로 사라진다.

그러나 귀가 예민한 아스퍼거 아이들은 엄마의 소리, 공기청정기 소리, 엘리베이터 움직이는 소리, 옆 사람 말소리, 뒷사람 숨소리 등이 똑같은 강도로 들리기 때문에 감각이 과수용되므로 과도한 에너지를 쓰게 된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감당못할 정도로 쏟아지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자극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현실에서 정신을 차단시킨 채 멍한 눈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고, 호명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만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청각, 미각이 초예민했고, 시각, 후각은 적당히 조절할 수 있었고, 촉각은 편안했다.


아이는 8세 때 자신의 머리 속에 작은 방이 있다고 말했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너무 떠들 때 청각이 초예민했던 우리 아이는 머릿 속 작은 방에 들어간다고 했다.

내가 그 방에 뭐가 있는지 물으니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들이 많이 있고, 신나게 놀 수 있다고 했다.

아이는 그 방에서 놀면 바깥 소리때문에 괴롭지 않다고 했고, 그 방 안쪽에 또 더 작은 방이 있어서 거기로 들어가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의 능력에 놀랍기도 했고, 그 방의 존재가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그 방에 자꾸 들어가면 나중엔 엄마, 아빠의 존재도 잊고 그 방에만 있게 될 거라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훗날 아이가 커서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을 글로 풀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의 설명에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아픈 아이를 기르는 것은 비극으로 예견된 하루하루를 사는 것 같았지만

아이가 주는 작은 행복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때는 눈 앞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힘겨워서 아이가 얼마나 예쁜지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한번도 보채지 않고 12시간 이상 순하게 푹 자던 모습,

쌀 뻥튀기를 쟁반에 담아주면 눈처럼 흩뿌리면서 웃던 모습,

사과 한 개를 방바닥에 공처럼 굴리고 웃으며 쫓아가던 모습 등이 떠오른다.


절망과 행복이 공존하던 시간들이었고 그 시간들이 점처럼 모여 여기까지 오는 선으로 연결된 셈이다.

행복이란 도달해야 하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 옆에서 찾아야 하는 것임을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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