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앨리의 정원 Nov 11. 2024

소년이 온다 / 창비(2024)

저자 - 한강



1장 어린 새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키 순서로 자리가 배정되는 교실에서 너는 언제나 맨 앞에 앉는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된 3월부터 변성기가 시작되며 목소리가 약간 낮아지고 키도 꽤 자라줬지만,

아직은 제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 온화한 성품만큼이나 외할머니의 임종은 조용한 것이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그 다른 세상이 계속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장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엄마는 네 교련복 소매를 움켜잡았다.

사람들이 여그서 널 봤다고 그래서 얼마나 놀랬는지 아냐.

시상에, 시체가 저렇게 많은데 무섭지도 않냐.겁도 많은 자석이.

반쯤 웃으며 너는 말했다.

군인들이 무섭지, 죽은 사람들이 뭐가 무섭다고요.


문 닫으면 나도 들어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그녀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달아났을 거다, 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어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아무 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2장 검은 숨

어디선가 누나의 혼도 어른거리고 있을 텐데, 그곳이 어딜까.

이제 우리한텐 몸이 없으니 만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을텐데.

하지만 몸 없이 누나를 어떻게 만날까.

몸 없는 누나를 어떻게 알아볼까.


나를 죽인 사람과 누나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직 죽지 않았다 해도 그들에게도 혼이 있을 테니, 생각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엄마를 모신 절에 당일치기로 다녀오려고 누나와 함께 강진에 내려갔지.

누나, 온 세상이 어항이야.

모를 내기 직전의 맑은 논물에 하늘이 끝없이 비쳐 있었지.

설탕같이 부스러지는 수박을 먹었지, 새까만 보석같은 씨앗들까지 꼭꼭 씹어 먹었지.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3장 일곱개의 뺨

그녀는 일곱대의 뺨을 맞았다.

수요일 오후 네시경이었다.


일곱대의 뺨을 그녀는 이제부터 잊을 것이다.

하루에 한 대씩, 일주일 만에 잊을 것이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다만 너를 기억했다.

너를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4장 쇠와 피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5장 밤의 눈동자

당신의 배를 밟고 옆구리를 찼던 사복형사의 얼굴을 당신은 잊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구사대들을 직접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 폭력의 정점에 군인 대통령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겠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가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쪽이었다.

경찰의 발에 아랫배를 밟혔을 때 노조를 떠났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6장 꽃 핀 쪽으로

네가 나한테 한번 와준 것인디,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한번 보여 줄라고 온 것인디,

늙은 내가 너를 놓쳐버렸어야.

시장통 좌판 사이로, 골목골목으로 한시간을 뒤지고 댕겨도 없어야.

무릎 속이 쑤시고 어찔어찔 골이 흔들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이.


알 수 없다이, 그날은 왜 내가 이름 한자리 못 불러봤는지.

입술이 달라붙은 사람맨이로, 쌕쌕 숨만 몰아쉼스로 뒤를 밟았는지.

이번에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얼른 돌아봐라이.

대답 한자리 안해도 좋은게, 가만히 돌아봐라이.


인자 나는 암것도 알 수 없어야.

겁이 나서 얼굴이 파랗게 굳어 있던 시민군들, 어리디어리던 그 자석들도 죽었으까이.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왜 끝까장 나를 안 들여보내줬으까이.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면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있는 데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한 강은 1970년 겨울에 태어났다. 1993년 문학과 사회에 시 4편을 발표하고, 이듬 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등이 있다. 한국 작가 최초로 인터내셔널 부커상, 말라파르테 문학상, 산클레멘테 문학상, 메디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2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 남긴 증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