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거 타고 의회에 가서,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는 정치인을 기대하며
[장철민 의원 수석보좌관에서, 대전 서구 예비후보로 출마한 이지혜 후보 지면인터뷰]
■ 대학생활 동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대학생이기 때문에 하는 일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믿었다. 지식인인 대학생이 사회에 갚아야 할 빚. 그게 나에게는 학생운동이었고,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총학생회실부터 찾아갔다. 1학년 때 울산 효성공장 투쟁*이 나의 첫 현장이었다. 대량해고, 공권력 투입이 강대강 대치를 이룰 때였다. 사실 그때 그들이 뭘 원하고, 나는 가서 뭘 해야 되는지 잘 몰랐지만 굳은 결의를 가지고 3박의 여정을 울산에서 함께 했다.
그런데 가자마자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가 마주한 노동자들이 최신 핸드폰을 모두 사용하고, 가장 값나가 보이는 차들을 타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험한 표현을 써가며 김대중 정부 물러나라고도 했다. 생산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높았지만 해고는 곧 살인이고, 하루 근근이 먹고살기 빠듯한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은 시위하러 나올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드디어 되찾은 민주정부에서도 정권 퇴진을 외쳤다.
무엇보다 나는 온전히 이들의 삶을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다. 나는 공부만 하면 되는 환경에서 자랐고, 투쟁가를 부르고 나서는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가지고 술을 마시러 갔다. 사회의 진보를 위해 한 점을 보탠다는 뿌듯함은 없어지고, 서서히 집회 대오에 머릿수 하나 더하기에 불과한 행동들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차올랐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와 연대한다’는 개념을 매번 수정하다 보니, 시위 현장에서 위선 떠는 일은 그만하고 직접 정책을 바꾸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믿음이 점점 굳어졌다. 그래서 국회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 대학 이후, 사회진출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국회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보니 나는 나이가 많았고, 국회경험이 없었고,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는, 여성이었다. 인턴부터 4급 보좌관까지 과장을 약간 보태서 이력서를 100장 정도를 써냈다. 간혹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이 있어서 가면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허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가장 궁금해했고, 뛰어넘기에 한계가 컸다. 결국 보좌관이 되지 못했다.
사기업에 몇 년 다녔는데, 그 일도 꽤나 재미있었다. 독립해서 내 회사를 차리고 키워보고 싶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마지막으로 국회진입을 다시 시도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여러 의원실에 다시 지원했고,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좋아하는 분들에 발탁되어 여기까지 오게 됐다.
■ 20대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흐름을 요약하면 어떻다고 생각하나요. 나빠졌나요 좋아졌나요.
23세에 캐나다에 어학연수를 다녀왔었고, 38세에 영국에서 유학을 했다. 23세와 38세 사이의 15년 동안, 국외에서 인식하는 한국의 위상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캐나다에 갔을 때 from Korea라고 하면 North인지 South인지를 묻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한국을 아예 모르고 내가 일본사람인지 묻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15년 후 영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정관장, 라면, 배우 이름 등 한국의 일상이 구체적으로 궁금해했고, 와이파이 속도가 진짜 그렇게 빠른지 부러워했다. developing country에서 developed country로 완전히 전환됐다.
정치는 확실히 New Normal**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는 여러 이해관계의 집합이다. 당연히 어디에나 갈등이 존재한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준비해서 설득하고 조율하고 합의하는 과정 속에 이전보다 한 발자국 진일보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양 극단의 적을 두고 모두 얻거나 모두 잃는 싸움만 하고 있다. 이것을 정치의 범주에 넣어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이것이 우리 사회가 원하는 새로운 정치의 개념이라고 했을 때는 혼란하다. 괜히 꺼내봐야 해결도 안 되고 시끄럽기만 한 고질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연금, 교육, 지방소멸 등의 논의는 접힌 지 오래고, 당장 자극적인 대통령 여사문제, 땅문제, 돈문제를 가지고 물어뜯고 뜯기는 정쟁만 난무하다. 뉴노멀의 정치는 어느 방향을 향해 있는지, 미래인지 과거인지, 그렇다고 뉴노멀 이전의 정치는 더 나은 것이었는지 사실 판단이 안 선다.
■ "40대"에게 부여되는 과도한 짐이 있다면 뭘까요
여지餘地가 없다. 수입에 비해 지출이 늘어나는 시기이다. 사회적 위치가 높아지면서 관계도 복잡해진다. 품위유지, 관계유지를 위해 현금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 잦고 액수도 올라간다. 아이가 크면서 교육비도 많이 들고, 집도 차도 커져야 한다. 집문제, 돌봄 문제, 교육비문제, 노동문제 사실 다 돈문제다.
이는 사실 정치가 해결해야 할 영역이기도 하다.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육아와 돌봄의 대책을 마련하고, 공교육을 탄탄히 하고, 금리와 환율을 관리해서 생활소비지수를 낮춰야 한다. 국민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고 변화를 쉽게 체감할 수 있는 이 일들을 개인과 특정 세대에 짐으로 남길 것이 아니라 정치가 본연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 총선에 출마했다 본선진출에 석패했다. 이지혜 "의원"이 되면 펼칠 정치가 궁금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순간이 가장 감동적이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고 지역에 내려와 보니 정말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나를 알거나 같이 일해온 사람들이 나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짧든 길든 세월을 함께 보내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역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새로 만나게 된 분들도 감사하다. 이렇게 만나게 된 인연이기 때문에, 이지혜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처음 봤지만 일 잘하게 생겼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를 말씀하시며 마음을 모아주신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알지 못하는 분들도 이지혜에, 이지혜가 만들어갈 더 나은 정치, 내일이 더 기대되는 정치를 응원하고 함께 꿈꾸고 있음을 발견할 때 힘이 난다.
영국에 유학 갔을 때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영국의 공립 초등학교 저학년 수업이 3시 정도 끝나는데, 학교 정문 앞에서 아이를 맞이하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아빠들이었다. 우리 아이 친구의 아빠들 중에는 변호사도 있었고,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꽤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를 데리러 아빠들이 나왔다. 모두가 아이를 함께 키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한민국도 그렇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년 전 일이지만 캐나다에서 살았을 때도 비슷한 인상적인 경험이 있다.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가게는 한인타운, 차이나타운이었고, 대부분은 저녁시간에 맞춰 문을 닫고 귀가한다. 국가 경쟁력을 갖추면서도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확보될 수 있는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법과 제도를 차근차근 만들어내고 싶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정치-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것이 지속가능하려면, 가족이 함께,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하고 평화적인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정치의 핵심이다.
■ 이지혜 후보는 이번 총선에서 예비후보로 활동하였으나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실패 이후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존 질서와는 다른 미래의 어젠다로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고 나선 젊은이들이 이번 총선 과정에서 우수수 떨어져 나왔다. 뉴노멀의 정치가 견고하게 쌓아 올린 장벽을 넘기가 다들 참 어려웠다. 원내에서 하지 않는, 그렇지만 꼭 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들을 풀어나가는 방법을 함께 생각하고 실천해보려고 한다." 새로운 40대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위해, 결집할 이유다.
*2001년 효성 울산공장의 직원 전환배치를 둘러싸고 시작된 대규모 노동분쟁.
**뉴 노멀(New Normal)이란 ‘새로운 표준’이라는 의미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펼쳐진 저성장, 저금리, 고규제 경제 환경을 대변하는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