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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변호사 Mar 10. 2024

사회운동은 사회를 지도할수 있는가

- 정파운동의 생존자, 한의사 양명삼 원장의 사례

■ 대학시절은 어떘다고 할 수 있나?


저의 대학 시절 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뉩니다. 한의대 학생회를 통한 대중사업과 동아리를 통한 후배를 키워내는 활동이 중심이었던 시기가 첫번째 입니다. 두 번재 시기는 어느 정도 고학년이 되고 나서, 특정한 정체성이 있는 활동가조직을 관리하던 시기입니다. 당시의 학생운동은 사회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사회운동의 정파적 입장으로 학교를 정리하는 일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닌 소위 '정치적인 입장 차이'로, 바로 며칠 전까지 친하던 선후배들과 인간적으로 다시 보기 힘든 사이로 갈라지던 것이 그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자의 시기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저에게 그다지 좋았던 기억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저에게 가장 좋았던 기억은 한의대 안에서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나 교육 시설 확충, 등록금 문제들을 이야기하며 활동하던 것들입니다. 그 중 가장 성과가 있었던 것은 거의 없어질 위기였던 농활대의 부활이었습니다. 여름농활에 5명도 채 가지 못하던 한의대가 2년만에 50명이 다되는 인원이 3마을로 나뉘어 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좋은 기억으로 남는 활동들은 대중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수 있는 것들입니다. 학생운동이 다 죽어가던 98년도에 대학에 들어가 200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IMF 이후 혼란한 사회에 대한 대학생들의 요구들(등록금 동결, 교육 받을 권리들 등)이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그런 활동을 할 때는, 내가 활동가라는 자부심과 함께 마음속에 선한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교조적으로 빠져가던 학생운동판과 그걸 지도하던 사회운동세력은,  그런 활동보다 반미통일투쟁과 노선투쟁으로 분주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중들과 괴리되어 가고 고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대학 이후 사회진출은 어떻게 하셨는지?


경희대는 학교 외부 조직과의 연결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졸업하지 않고 계속 학생운동을 하는 분위기였고, 저 역시 계속 남아있어야 하나란 고민 반, 걱정 반으로 고학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활동가 조직 내부에서 한 선배의 노력으로 농민운동을 고민하는 소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소모임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마치고 어떤 식으로 농민운동에 복무할수 있을지 고민하였고 그래서 일본의 의료생활협동조합운동에 대해 알아보고 기회가 돼서 직접 일본의 의료생협 의사들과의 토론회도 가보고 안성의료생협과 같은 한국에서 추진되던 대안적 형태의 의료운동들도 알아보고 다녔습니다. 


http://asmedcoop.or.kr/


그러다 학교 활동가 조직이 사회 운동세력과  연결되기 시작했고, 저 역시 자연스럽게 활동을 함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농민과 함께하는 의료활동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함께하는 단체 사람들의 결정에 따라 졸업 후 용산구에 한의원을 개원하여 시민운동단체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 함께 하던 사회단체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용산에서 3년간의 한의원 생활 이후 정말 큰 혼란이 생겼습니다. 


첫째, 전문가적 지식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각은 사회운동에 자신감을 떨어뜨렸습니다.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미안함만 커졌습니다. 또한 내가 고민이 쌓여 간곳이 아니기에 한의원을 통해 번 돈을 시민단체에 지원해 주는 것 말고는 지역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할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둘째, 만날 대중이 없는 빈껍데기 활동가였습니다. 당시 용산 시민단체 활동가들 역시 옆에서 보면 입만 살아있는 룸펜같이 보였습니다. 경제적인 책임감도, 그렇다고 대중들 속에서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내는 의지도, 만날 대중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개원하고 아무 인연도 고민도 없던 저 역시 초반에는 그런 모습들을 비판하다 결국 똑같은 모습으로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군대 대신 공중보건의를 가게 되었고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보건의료원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양방과 치과선생님들과 3년간 같이 생활하면서 저의 전문성 부족이 더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다들 놀다 오는 공중보건의 시절 나름 최선을 다해 의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주말에 서울에 올라와 강의 듣고, 평일은 진료 마치면 관사에서 공부하며 공보의가 끝날쯤에는 어디 가도 조금은 당당한 전문가 활동가가 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전북 장수에서 생활하다 보니, 서울 단체와 연결된 전북지역의 운동가들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다수가 노동자 형들이었고 그들과 주기적으로 만나 공부도 하고 모임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의 삶의 건강함을 느꼈습니다. 모두들 자기가 출근하는 공장이 있고 그 현장에 만날 대중이 있고 주말에는 자기 대중들과 같은 취미를 나누고 여가를 즐기는 모습은 3년간 용산에서 볼수 없었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보의가 끝나갈 때 마음 먹었던 것이 서울에 올라가면 서울노동광장으로 가서 간호사선생님들과 현장에 의료지원활동을 하는 모임을 만들어야겠다란 계획입니다. 간호사와 한의사를 나의 대중으로 하여 파업이나 투쟁의 현장에 적극적으로 들어가 연대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그렸고 자세히 지난 시기 고민과 이후 나의 계획을 정리해서 함께하던 단체의 대표자들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내부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단체 대표자들은 나에게 다시 용산 지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용산에는 내가 일할 한의원도, 아니면 시민단체 자리도, 아는 사람도 아무것도 없는데.. 난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걸 위해 지난 3년간 준비했는데... 노동분과의 대표자와 전체 대표자가 반목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기가 찼습니다. 나의 정치적 생명을 책임지겠다며 배치에 무조건 따르라던 그 사람들은 결국 나의 생명보다는 자신들의 헤게모니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후 조직이 갈라지면서 더 이상 조직운동을 하고 싶지 않아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 과거의 활동과 연장 선상에서,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사회를 위해 밀알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20대의 삶이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며 저는 어느새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고, 한의원의 유지를 걱정해야 하는 생활인으로 점차 침잠해 갔습니다. 사실 과거 활동과 상당부분 단절된 삶을 너무 오래 살아와서인지 그런 열정이나 에너지는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정치적인 이슈나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보지만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후원 하는 정도 말고는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습니다. 다만 예전 민주노동당과 같이 민주당과 사회적 흐름을 좌측으로 끌어 당겨올수 있는 힘이 있는 진보정당이 나타난다면 적극 후원해 보고는 싶습니다. 


■  "40대"에게 부여되는 과도한 짐이 있다면 뭘까요. 다른 세대와 달리, 40대가 해결해야 하는 집단적인 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지금 40대는 386세대의 끝과 MZ 세대의 앞에 끼어 있는 세대입니다. 정치적으로 각성되어 있지만 각자의 삶에서는 현실적 무게(주택구매, 자녀교육, 베이비부머세대인 부모세대 부양 등)를 가장 크게 짊어지는 세대가 아닐까란 생각입니다. 


40대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집단 과제를 고민해보니 가장 절박한 것은 인구감소인 것 같습니다.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머리구조 안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실질 해답을 절대 못 찾을꺼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30대가 사회의 중심축이 되는 시점에는 너무 늦을 것 같고 최소한 10년안에 인구 감소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의 단초를 만들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걸 해야 하는, 마지막 임무를 짊어진 세대가 된 셈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FTA 추진을 엄청나게 반대했었는데.. 시간이 흘러보니 그게 큰 사람의 혜안이구나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것처럼 인구 감소 문제도 당장은 모두가 이해되기 어렵겠지만 다른 차원의 큰 결단이 필요한 문제라 생각합니다.


■ 양명삼의 고백을 들으며, 이렇게 자신을 드러낸 용기에 꽤나 감동했다. 그리고, 나 역시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던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온 운동을 지속하려는 [정파]들의 혁신의 문제다. 많은 40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대한민국은 이미 엄청나게 발전한 국가이다. 공식적인 정부기관, 청와대 조차도, 대한민국의 모든 이슈를 다 총화하고 지침을 내리지 못한다.(그걸 하겠다고 하다가 청와대 비서관들이 이빨이 다 빠져버린 일화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역이슈, 동물권, 여성과 여성노동, 환경문제 등등의 이슈에서, 이제는 정부부처의 과장급보다 전문적인 역량과 무엇보다도 열정을 가진 국민들이 도처에서 자기들끼리 움직이고 있다. 


이런 대한민국에서, 제대로된 정보취합 체계도 갖추지 못하고, 친소관계에 의지한 몇몇 간부들로 구성된 조직에 의하여 국가적 과제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따라 함께하는 동료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도록(직업, 사는 곳, 결혼 등) 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시대이다. 이에 따라 운동정파들은 실제로는 정당이나 사회운동등 외부적인 사회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자기 정파에 머물러야 하는 윤리적 정당성만을 강요하는 모습으로 퇴화하고 만 것이 현실이다. 사회운동의 몰락, 사회운동의 정치적 대표체였던 정의당의 몰락에는, 그 배경에 90년대 이래 사회주의 베이스의 다양한 변종을 자기이념으로 삼고 있던 [정파]의 몰락이라는 공통조류를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과 선하게 사회를 이루려는 의지는 계속되고,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2020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선한 의지의 계승자들은 이 시대에 필요한 과제를 수행할 역활에도 유능해야 한다. 지금의 정파구조는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정치, 사회적 의제들을 주도할 역량과 능력을 소진한지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40대들은, 90년대 이래의 마지막 정파운동에 속해있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이제 스스로의 각성으로 정파운동을 그만둔 이후, 새로운 열린 연대활동으로 '선하게 사회를 이루려는 의지'를 계승할 수 있을것인가 :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 사회운동(그 결과로서의 정치)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영수의 선거운동은 하나의 계기, 플랫폼일 뿐이다. 새로운 정치의 대표자가 될 만한 이들이 모이고 있다. 더 많은 40대의 고백을 통해, 새로운 사회운동과 정치의 과제를 밝히고, 실천해 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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