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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가 한 말씀 올립니다

니들은 늙어봤냐? 난 젊어봤다 ㅋㅋㅋㅋㅋㅋㅋㅋ

by 담담댄스
나는 절대로 2:8은 안 할 거야


내가 회사에 입사할 때(201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팀장은 물론, 100%에 가까운 임원들이 (남자 기준) 하나 같이 2:8 가르마를 고수했다.(아니면 부득이한 이슈로 빡빡 밀거나)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철저한 메타인지 아래(술톤에 빻은 피부, 나이보다 10년은 더 삭아 보이게 만드는 수염자국, 팔자주름 등), 가뜩이나 노안인데 굳이 더 늙어 보이려 애쓸 필요가 있나 싶어 죽을 때까지 2:8 가르마는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수트 이외의 복장을 허용하지 않던 첫 직장에서 연말을 맞아 '캐주얼 위크(Casual Week)'라는 걸 시행한다고 했다. 츄리닝 상하의, 핫팬츠, 민소매, 슬리퍼만 아니면 일주일 간 그 어떤 복장도 허용한다는 발표였다. 와... 그때 정말 가관이었다.


쟤들은 잘생기기라고 했지... 할많하않이었다


특히 남자 팀장이나 임원 분들은 정말 영화 「건축학개론」을 떠올리면 딱 맞다. 이게 무슨 체이스컬트? 옴파로스? 감성의 티셔츠나 남방에, 바지는 또 애매한 기장과 핏의 청바지, 운동화는 우락부락한 나이키나 아디다스를 신고 사무실을 누비는 그들을 보니, 내가 지금 90학번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 온 건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 이쯤 되면 그냥 수트를 교복처럼 입는 게 낫겠다


2:8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에 첫 균열이 일었다. 패션도 센스이거늘. 지피지기 없이 뭘 함부로 시도하느니 어차피 지디가 될 수 없다면 그때그때 대충 또래들이 입는 거 따라 입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들었다.



다른 직장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회장님의 인터뷰 촬영이 있어 수행할 때가 있었는데(중소기업에서는 일개 직원이 회장님을 수행하는 게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닙니다) 촬영 콘셉트가 캐주얼한 야외 인터뷰였기에 의상도 좀 더 캐주얼한 착장으로 요청받았다. 하지만 연세가 일흔이 넘으신 회장님은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결국 정장 차림에 2:8 가르마를 하신 채로 촬영에 임했다.


촬영현장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회장님 연세 70인데...
갑자기 앞머리를 내리고 청바지에 헐렁한 프린트 티셔츠를 입고 나오면 것도 진짜 이상하겠다


내가 일흔이 되었을 때, 당시 2030의 패션을 따라 한다면 얼마나 구릴까. 그래, 2:8은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귀결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그때 되면 더 늙어 보일 것도 없을 테니.



최근에 좀 충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팀 회식은 아니었고, 프로젝트 직후 관계사 직원들과 간단히 술자리가 마련됐다. 화기애애보단 화기애매한 분위기 쪽이라 술이 계속 필요했다. 그렇게 어색한 순간, 그래도 입담 내공이 있는 내가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콰해진 얼굴들 사이로 30대 초·중반으로 짐작되는 무리들의 묘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이들의 주도 하에 대뜸 술게임이 시작됐는데... 어느새 나는 주변부로 자연스레 밀려나고 있었다.


아, 내가 신입사원 때 과장님, 차장님들이 눈치 없이 술자리에 끼어들면 진짜 기분 쉣이었는데...


막상 내가 그런 나이와 세대가 됐다고 하니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2차 노래방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를 노려 애꿎은 와이프와 아이를 핑계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 진짜 노래방 좋아하는데 ㅠㅠㅠㅠ)


아유~ 오늘 하루 늦는다고 큰일 나나요?! 같이 가요~


난 안다. 귀가를 말리는 듯한 저 표정. 내가 10년 전에 지어봤던 그 표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입술이 아무리 샐쭉대도 눈빛은 숨길 수 없다. '가라, 가라, 제발 가라고 쫌!!!'


알았다고! 니들끼리 얼마나 재밌게 노는지 두고 보자!

(두고 보긴 뭘 두고 봐ㅠ 졸라 재밌겠지 ㅠㅠ)






나는 1984년생. 한국 나이로 마흔둘이니까 정말 영포티다. 희화화를 넘어 혐오의 테제가 되고 있는 영포티 본인등판. 영포티가 본격적으로 한 말씀하기 전에, 간단한 테스트부터 받고 가자.



<당신은 영포티인가요?>

40대도 충분히 젊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지 않고 시도해 보려 한다

주 2~3회 이상 운동을 하거나 규칙적 움직임이 있다

정기 건강검진/체중관리/수면 습관을 꾸준히 신경 쓴다

패션/뷰티/헤어스타일 등 나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SNS/블로그/유튜브 등 디지털 공간에서 자기표현을 한다

독서/강의/자격증/취미활동 등 배움에 투자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트렌드를 배우는 데 거부감이 없다

여행/문화생활/힐링타임을 일상에 적극적으로 챙긴다

가정과 나 자신을 위한 소비에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이 중 8개 이상이면 빼박 영포티, 5~7개면 영포티 호소인, 4개 이하라면 전형적인 40대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영포티 호소인쯤에 있는 것 같다. 근데 이건 좀 억울하다. 솔직히 저렇게 살면 나이 불문하고 되게 열심히 사는 사람 아닌가? 아니 20대나 30대도 저렇게 살면 칭찬받지 않을까. (저 테스트 자체를 영포티가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ㅋㅋㅋㅋㅋㅋ)


영포티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위 테스트처럼 긍정적인 이미지였다고 한다. 그러다 점점 메타인지를 잃고 '여미새'(여자에 미친 새X), '껄떡충'(20대 여성들에게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를 시전하며 껄떡대는 휴먼)의 캐릭터를 입어 혐오스런 이미지로 변질돼 갔다. 거기에 2030이 더는 희망을 품을 수 없는 내집마련의 막차에 올라탄 운 좋은 세대, 지금의 2030과는 대척점에 서있는 정치적 편향성을 스테레오타입으로 덧입으면서 갈등의 양상은 격화되고 있다.


어느 시대에서도 세대 갈등은 상존했다. 어차피 지나갈 일일 텐데 아마 40대 남자들이 그동안 키보드 워리어(?) 본진으로만 활약해 봐서 그런가, 조롱의 대상이 된 경험이 적어서 유난히 발끈하는가 싶기도 하고. 근데 나는 이효리의 노랫말이 떠올랐다.


너의 말이 그냥 나는 웃긴다


살면서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혐오의 테제에 과도한 자기 합리화나 조롱의 안티테제로 맞붙을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어차피 우리는 늘 영포티일 수 없다. 조만간 올드포티가 되고 영피프티가 되겠지. 그리고 영포티를 비웃는 영써티나 올드써티 너희들이 영포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다. 네가 잃은 것이 내가 뺏은 것은 아니며, 내게 없는 것을 네가 가졌다고 부러워만 했지, 시샘한 적은 없는데.


하지만 그냥 좀 억울하면 그만이다. 나는 40이 넘어 20대, 30대 여성들에게 껄떡대 본 적도 없고(그러면 이미 철컹철컹임), 무지성으로 색깔만 보고 투표해 본 적도 없으며, 나 대신 쟤들 좀 갈궈달라는 꼰대와 저 꼰대 아재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던 Gen Z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쌍한 낀 세대일 뿐인데.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니들이 행복하면 됐다.






ㅡ 어? 그 브랜드 요즘 완전 핫하잖아요

ㅡ 에이, 저는 옷은 잘 모르고요. 그냥 와이프가 입혀주는 대로 입어요. 너무 영포티 같나요?

ㅡ 아, 아니요! 잘 어울리셔서요 :)


요즘은 하도 '영포티, 영포티' 거려서, 자조 섞인 말투로 스스로를 영포티라 지칭해 버리고 만다. 그러면 또 후배들이 와서 '아이고 슨배님, 무슨 말씀이세요~'하며 손사래 친다. 진심이든 가식이든 상관없다. 저의야 어찌 됐든 칭찬은 칭찬으로만 받아야지. 그리고 42면 영포티 맞잖아?!


어떤 스타일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센스와 경제력이 내겐 없다. 하지만 여건이 허락되는 선에서 머리가 좀 세면 염색도 하고, 입고 싶은 옷의 태가 살도록 운동도 좀 하고,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가꾸고, 내 몸에 맞게 내 맘에 맞게 감각을 별러 나간다. 여기에는 그저 영포티로 치부되지 않고 그대들과 사심 없이,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픈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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