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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댄스 Jul 10. 2024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탁구에서 배운 것

내가 탁구를 처음 접한 것은 어렸을 적 같이 살던 외삼촌 덕분이었다. 외삼촌은 1970년대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할 게 없으면 친구들과 탁구를 쳤다고 한다. 저 옛날 PC방이 있었다면 스타크래프트가 취미였겠지만. 청소년기 별다르게 놀 것이 없었던 1960~1970년대생 남자들은 그래서 탁구를 잘 치는 편이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외삼촌과 탁구를 치면서, 또래보다 아주 조금 나은 실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외삼촌과는 시합하는 것이 훨씬 재밌었지만, 외삼촌은 웬일인지 계속 핑-퐁만 해댔다. 정확히 말하면 포핸드 스트로크로 서로 주고받는 것인데, 탁구선수들이 시합 전에 몸을 풀 때 많이 보던 장면일 것이다. (아래 동영상 참조)




30분 이상 포핸드 스트로크를 한 후에야 외삼촌과 시합을 할 수 있었다. 아마 그의 의도는 실력차이가 워낙 크니, 어느 정도 트레이닝을 시킨 후에라야 그나마 재밌게 시합할 수 있겠다는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시합에 들어가자 나는 기껏 연습한 포핸드 스트로크를 써먹을 수 없었다. 왼손잡이였던 외삼촌은 내 백핸드 부분만 집요하게 공략했다.


요즘 선수들 중엔 거의 없지만, 유남규와 김택수, 유승민으로 이어지는 한국 탁구의 전설들 모두 강력한 드라이브를 선보이는 펜홀더 그립을 쥐었다. 그들을 보고 자란 나 역시 당연히 펜홀더 그립으로 시작했다.


펜홀더는 엄지와 검지로 라켓 앞면을 감싸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뒤로 보내는 그립이고, 셰이크핸드는 손잡이를 주먹으로 움켜쥔 후 엄지는 앞으로, 검지는 뒤로 보내는 그립이다



지금이야 라켓 뒷면에도 러버(고무)를 붙이지만, 당시에는 앞면에만 러버를 붙여서 펜홀더 선수가 볼을 백핸드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팔과 손목을 비틀어야 하는 불편한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백핸드 스트로크의 원리



내가 백핸드로 점수를 잃을 때마다 외삼촌은 얘기했다.


담담댄스야, 탁구는 손으로 치는 게 아니라 발로 치는 거다


엥? 이게 발탁구라는 건가... 사실 손으로 하는 웬만한 운동에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풋워크(발놀림)다. 백핸드를 받아낼 수 없으면 오른손잡이인 나는 한 발짝 더 왼쪽으로 움직여 포핸드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허를 찔렀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의 허를 역으로 찌를 수 있는 것이다. 간혹 요행으로 팔만 움직여 백핸드로 받아넘길 수도 있겠지만 아마추어인 나로서는 기껏해야 한두 점에 불과하다. 실력이 모자랄 때는 상대보다 더욱 먼저, 빠르게 움직여야만 한다. (물론 그 이후로 백핸드를 과하게 의식한 나는 공이 오기도 전에 왼쪽으로 움직여 버린 나머지, 포핸드 볼을 처리하지 못했다. 그냥 하수였던 거다)






시간이 지나, 대학교에 가서도 친한 친구들과 탁구장을 종종 찾았다. 대체로 이기는 시합을 했지만, 유독 한 명에게 맥을 추지 못했다. 모든 스포츠는 폼이 중요하다는 나의 지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상한 폼으로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괴상한 스핀서브를 구사해서 서브 포인트로만 경기를 압도하는 놈이었다.


나란 사람은 원체 승부욕이 크지 않았지만 잘한다 생각했던 탁구에서만큼은 패배의 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때마침 여름방학이 찾아왔고, 계절학기 수업으로 탁구를 신청했다. 수업은 체계적이었다. 외삼촌과 익혔던 포핸드 스트로크부터 공이 튀어오르자마자 툭 갖다 대면서 받아내는 쇼트, 공의 윗방향으로 회전을 거는 드라이브와 아랫방향으로 회전을 거는 커트까지 체계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다시 만난 그 친구와의 일전. 신기하게도 그 친구가 보내는 서브의 구질이 한눈에 들어왔다. 탁구에서 이길 수는 없어도 지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상대방과 같은 구질로 보내라는 것이다. 상대가 공의 밑동을 깎아서 커트로 볼을 넘기면 나 역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커트로 받아내면 되고, 드라이브를 걸면 라켓을 지면과 평행할 정도로 눕혀 탑스핀 걸린 공을 그대로 넘겨주면 된다.


모든 서브를 내가 받아넘기자, 기본기가 없던 친구는 몇 번의 랠리도 이어가지 못하고 내게 참패를 했다. 사파는 정파를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입증한 셈이었다. 얕은 꾀나 꼼수를 부리면 좀 더 빨리,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 뽀록나기 마련이다. 시간이 좀 걸려도 탄탄히 기반을 다진 이후에 차근차근 쌓은 실력으로 승부하는 정공법이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천하무적의 기술이다.






탁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학교 2학년 때 좋아하던 후배가 있었다. 신기하게 얘기가 잘 통했고 학교 밖에서 몇 번 따로 만나기도 하면서 썸을 타는 중이었다. 어느 날 문자가 도착했다.


오빠, 오늘 날씨도 좋은데 이따 밤에 석촌호수 한 바퀴 걷는 거 어때요?


당연히 좋지, 하지만 내 대답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답변이었다.


아, 오늘 유승민 올림픽 탁구 결승전 하는 날이라, 이거 봐야 할 것 같아.
내일 어때?


그날 이후, 유승민은 중국의 왕하오를 누르고 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금메달리스트가 됐고, 내가 그녀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아직도 친구는 나를 놀린다. 네가 그때 데이트 안 하고 응원해서 유승민이 금메달 딴 거라고.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연애를 못해본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더 중요한 일이 있는 법이다.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언제나 후회할 것이다. 나는 탁구에서 그런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신유빈-임종훈 조가 탁구 혼합복식 결승에 오른다면, 이번에도 만사를 제쳐두고 생중계로 시청할 예정이다. (이번엔 아마 새벽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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