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다는 무례함
사람들이 내게 주로 건네는 칭찬은 친절하다거나 다정하다는 식이다.
어렸을 땐 다정함의 도가 지나쳐 사뭇 느끼하거나 오글거리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던 것 같다. 지금은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고, 과하게 쏟은 정이 쓸데없이 역치값만 높여 금세 실망으로 처박힐까 두려운 마음이 크다. 무심한 듯 다정한, 그래! 츤데레처럼 사람들을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근데 츤데레처럼 일부러 퉁명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쩌라고?? 여러분들이 느끼는 심정과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 ㅋㅋㅋ)
친절한 마음의 기저에는 용기가 없다. 과한 친절이 경계하는 것은 비판이다. "너는 나와 달라"라는 말과 "너는 틀렸어"의 행간에는 얇디얇은 종이 한 장의 틈만 있을 뿐이다. 틀렸다는 말은 당연히 듣기 싫으니 설명이 과해지고, 다르다는 오해조차 받기 싫어 친절함을 두른다.
글에는 곧 성정이 투영된다. 내 글은 친절한 편이다. 맥락을 풀어쓰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차단한다. 누군가 중의적으로 해석할까봐 쉴 새 없이 콤마(,)를 찍어대며 '말하려는 바는 하나'라고 무언의 항변을 한다. 퇴고할 때마다 생략된 주어는 반드시 끼워 넣고,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한 문장이면 끝날 말도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한 문장을 덧붙인다.
이렇게 된 내 글, 영 파이다.
사실, 글을 쓸 때마다 늘 딜레마에 빠진다.
생략할 것인가? 기술할 것인가?
이 고민에는 좋아하는 글을 쓰는 자아와 먹고살려는 글을 쓰는 자아 사이의 갈등이 담겨있다.
먹고살기 위한 글을 쓸 때 최대한 기술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직(職)의 테두리 안에서, 정확히 쓰지 않으면 클라이언트들에게 항의를 받는다. 그래서 앞 문장에서 언급한 주어라고 하더라도 이해를 돕기 위해, 아니 오해를 피하고자 뒤에서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겪은 일이다.
언론을 대상으로 작성했던 기획기사는 실적(수치)에 중점을 두었다. 글 안에서 '올해 1분기 기준'이라는 말을 몇 번씩 반복했는지 모른다. 안 그러면 올해 기준으로 알거나 아예 기준이 없는 지표가 돼 버린다. '알아서 알아듣겠지' 기대했다간 큰코다친다. 당장은 상사에게, 그다음은 현업부서에서, 그다음은 기자들에게, 마지막은 독자들에게 오독의 여지를 일말이라도 남겨선 안된다. 비슷한 말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작년 같은 기간 대비, 전년 동기 대비, 작년 같은 시기에 비해'와 비슷한 듯 다른 말을 언급하면서 지루함을 피하고 싶었지만,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조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조사를 빼는 편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투자시장 위축 흐름이 지속되는 가운데,
라고 쓰고 싶지만,
투자시장이 위축되는 흐름이 지속되는 가운데,
라고 써야 한다.
관건은 연봉협상.
이라는 말을
이어지는 관건은 연봉협상이다.
라고 써야 한다. 직(職)으로 삼는 글쓰기는 친절하게 쓰지 않으면 배척되기 십상이다. 나의 상사는 늘 보고서 투를 경계하라고 했다.
문제는 브런치 글쓰기다. 이곳은 정말 내가 마음대로 써도 누구 하나 지적할 사람이 없다. (읽어주는 사람 역시 극극극소수다 ㅋㅋㅋ) 그런데 먹고사는 글쓰기가 좋아하는 글쓰기의 영역을 자꾸만 침범하는 것을 느낀다.
한껏 필 받아서 글을 쓴 후, 퇴고하는 과정에서
주어가 빠졌네.
어? 이 부분은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뭐야, 글투가 너무 건방지잖아.
이런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면서 최대한 자세하게 고쳐 쓰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짧은 문장을 좋아한다.(만연체가 틀리다는 게 아니다, 그렇게 쓰면 나같이 멍청한 사람들은 비문을 자주 만들어 낸다) 적절한 생략은 문장에 리듬감과 호흡을 만들어 주고, 가독성을 높인다고 맹신하고 있다. 의도적인 오기(誤記)는 문장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물론 대가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특유의 힘 있고 짧은 문장에는 명확한 의미가 들어있고, 문장 사이마다 독자들이 마음껏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도저도 아닌 나는 번뇌할 뿐이다. 생략할 것인가. 기술할 것인가.
결심했다. 친절한 글이야말로 무례한 것이라고.
내가 독자일 때를 돌이켜 보면, 섬세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글보다 다음을 기약하게 만드는 글, 여백이 많아 사이사이 직접 채색하면서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글이 훨씬 좋았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것들을 말하는, 그런 글에 매력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다짐한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최대한 불친절해보자고. 맥락과 숨은 뜻까지 일일이 설명하지 말자고. 읽는 이의 즐거움을 빼앗지 않기 위해 좀 더 덜어내 보자고.
앞으로의 글에서 과도한 친절함을 발견한다면,
어허, 이놈 무례하도다!
꾸짖는 댓글을 꼭 남겨주셨으면 좋겠다. 다정도 병인 거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