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던 선배로부터 들은 조언 중 지금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있다.
웬만하면 해줘
그 선배 말고는 누구도 저런 조언을 건넨 사람이 없다. 보통 동료, 다른 부서 사람들이 업무협조나 부탁을 해올 때면 들어줄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첫 번째 이유는 그 일을 하느라 내 일을 못하거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내선 안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한 번 받아주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요청해 온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나는 내 일의 완성도와 납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협조요청은 웬만하면 모두 들어주려고 한다. 상황이 정 어려울 경우에만 정중하고도 단호히 거절한다. 사실 만남도, 일도 돌고 돈다. 다시는 안 볼 줄 알고 매정하게 대했던 사람이 동료나 상사가 되기도 하고, 나는 절대로 부탁할 일이 없을 줄만 알았는데 부탁과 협조를 구하지 않고는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수두룩하다. 웬만하면 해주는 것은 선의라기보다는 보험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부탁은 정말 싫어한다. 일과 관련 없는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면서
내가 다음에 술 한 잔 살게, 좀 해줘
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몹시 불편해졌다. 우선 업무적인 부탁이고, 그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나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절차상 윗선끼리의 협의가 있으면 좋지만, 급할 땐 우선 일부터 하고 나든 부탁한 사람이든 윗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된다. 어쨌든 업무 관점에서 '하는' 것이 우선이지, '누가' 하는 것이 우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서는 큰일 난다.)
다만 업무와 관련이 없는 부탁은 난처하다. 아예 사적인 부탁이면 들어주느냐, 거절하느냐 오히려 심플하다. 공과 사의 애매한 영역에 걸친 일들을 부탁해 오는 경우가 난처한 것이다. 이럴 경우 내 원칙은 한결같다. 나의 직속상사로부터 하명을 받아서 내가 공식적으로 처리하도록 다시 요청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책임소재도 명확해질뿐더러, 일을 하면서도 찝찝함 없이 처리할 수 있다. 더러는 윗선에서 거절하는 행운도 있다. 그리고 웬만하면 사적인 부탁은 가급적 하지도 들어주지도 말자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술 한 잔'이다. 업무상 도움을 받았으면 당연히 나도 커피든, 밥이든, 술이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물어는 봐야지. 나는 술자리를 별로 안 좋아한다. 저 표현에는 오로지 본인만 있다. 본인이 술 마시는 걸 좋아하니 나도 당연히 좋아할 거라는 착각과, 나를 핑계 삼아 술을 마시고 싶은 노골적인 마음이 들어있다. 그 일을 대가 없이 해줄 수도 있지만, 저렇게 자기중심적인 부탁을 하면 해주고 싶다가도 그 마음이 쏙 들어가게 만든다.
이런 경우도 있다. 중요도가 높고, 납기가 밭은 일을 잘 처리했을 때, 한 임원이 내게 호기롭게 말을 꺼냈다.
어유, 고생 많이 했어. 안 되겠다, 내가 소고기 한 번 사줘야겠다
'제발 넣어두세요. 소고기 말고 평가로 주세요. 그리고 저는 소고기보다 떡볶이가 좋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 차오른다. 물론 좋은 마음으로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도 알고, 실제로 내 돈 주고 사 먹기 부담스럽기 때문에 그저 비싼 걸 사주신다는 이유만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나 같은 먹보는 마음 편하게, 먹고 싶은 걸 먹는 게 훨씬 좋다. 늘 후배들을 만나면 하는 얘기가 있다. 남이 사준 소고기보다 내가 집에서 끓여 먹는 라면이 훨씬 맛있다고. 여담이지만, 결국 저 임원 분은 소고기는커녕 구내식당 식권 한 장 챙겨 주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회식과 접대자리를 피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런 자리에서 너무 싫은 티를 내거나 목석같이 구는 것도 나로 인해 갑분싸될까봐 저어한다. 다만, 꼭 필요한 회식자리가 아닌 업무 외 만남이라면 취향과 의사는 확인했으면 좋겠다.
상대방이 시간이 있는지
시간이 있대도 낼 의향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것이 특별히 없다면 몇 가지 옵션을 제안한다든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누군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거나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면 꼭 위의 네 가지는 확인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말 고마운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고,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