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즈의 열두 번째 우승에 부쳐
2009년 10월 24일. 이 날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내 생에 가장 값비싼 생일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 생일은 10월 25일로, 보통 한국시리즈가 한창인 시기다. 성인이 되어 맞이한 기아 타이거즈의 세 번의 한국시리즈, 그리고 우승. 그중 가장 명승부라고 할 수 있었던 경기는 누가 뭐래도 2009년 SK 와이번스와의 결전이다.
팬심을 막론하고, 정말 치열하다 못해 처절했던 한국시리즈 경기를 꼽으라면 2004년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펼쳤던 무려 9차전 우중혈투. 그리고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을 꼽을 수 있다.
당시, 5회까지 1:5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던 기아는 압도적인 구위를 선보였던 SK 선발투수, 대니 글로버의 교체를 시작으로 SK 벤치에서 투마카세 전술을 선보인 덕에 한 점, 한 점 따라붙으며 마침내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12년 만에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그 끝에는 아직도 회자되는 베테랑 아나운서, 배기완 캐스터의 맥 빠지는(?) 우승콜이 있었다.
기아 우(↗)승(↘), 기아 우(↗)승(↘)
야구를 중계하는 캐스터들이 시즌 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바로 한국시리즈 마지막 순간 팬들의 열망과 환희를 고양시키는 멘트, 일명 우승콜이다. 대다수의 팬들은 우승의 순간을 경기장에서 보지 못하고, TV 중계를 통해서 봐야 하기 때문에 현장감을 대체할만한 감격적인 우승콜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한국시리즈 최종전의 끝내기 홈런은 40년 역사에서 두 번밖에 되지 않은 명장면인데, 그걸 저렇게 날리나 싶은 팬심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우승콜을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 워낙 담백한 걸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시간이 지날수록 중계사마다 부담감에 짓눌려 과해지다 못해 남발되는 오글이 문장들을 오히려 참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응원팀은 아니지만 가장 인상적인 한국시리즈 우승콜은 한명재 캐스터의 것이다.
보고 계십니까, 들리십니까
당신이 꿈꿔왔던 그 순간,
2011년 챔피언 삼성 라이온즈입니다
같은 해 9월, 삼성 라이온즈의 레전드 장효조가 세상을 떠났다. 라이온즈의 후배들은 필사적으로 SK 왕조를 무너뜨렸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결실의 순간, 하늘에서 보고 있을 장효조에게 선수들을 대신해 전한 간결하고도 감동적인 저 한 마디를 뛰어넘는 우승콜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바로 어제, 기아 타이거즈는 12번째, 그리고 연고지인 광주에서는 37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었다. 상대 팀인 삼성 라이온즈에게는 안타까운 말이지만 어제의 경기가 두 팀의 실력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경기였지 않았나 싶다.
기아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패했던 3차전보다 더 안 풀렸던 경기, 삼성의 입장에서는 팀 역량의 최대치가 모두 발휘된 경기였다. 경기를 지켜본 대다수의 팬들은 삼성이 생각보다 잘 치고, 잘 막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스코어는 시나브로 7:5, 기아의 두 점 차 리드 상황으로 9회를 맞이하게 됐다.
산왕 전에 모든 힘을 쏟고 다음 경기 거짓말처럼 패했던 북산처럼, 아니 삼성은 채치수(제1 선발)와 서태웅(구자욱), 송태섭(강민호)까지 빠진 채로 마지막까지 기아를 몰아붙였다. 그들다운 빅볼로 시즌을 마무리한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각 중계사마다 수많은 우승콜을 들었지만, 2009년의 맥 빠진 우승콜을 비틀어 오마주한 김민수 캐스터의 인상적인 멘트로 나의 이번 시즌도 마무리한다.
내 삶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2024년 프로야구는 이렇게 끝났다. 하루가 지나니 더욱 기아의 우승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게 실감난다. 그래도 일개 팬으로서 이 정도의 기쁨을 남겨두는 게 그렇게 오버는 아니겠지 싶어서 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