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민턴에서 배운 것들
안세영이 아시안게임 우승을 하고, 이 글을 참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계정을 새로 만들면서 다시 살릴 수 없어 가장 안타까운 글이 될 뻔했다. 오늘 그녀가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땄기에 다시금 올려본다. 안 될 때 버텨서 세 번째 게임으로 가는 그녀의 전략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통했다. 부디 그녀의 무릎이 많이 상하지 않았길, 승리의 기쁨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스포츠 매니아인 내가 생중계로 챙겨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시차가 우리나라와 한 시간뿐이라, 한창 경기를 하고 있는 때가 근무시간과 겹쳤거나, 주말/퇴근 후에는 육아로 TV를 자주 켤 수 있는 상황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주요 종목들은 가급적 생방송으로 시청했는데, 수많은 명승부 안에서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분노를 자아내는 순간들도 있었다.
이번 아시안게임 최고의 명승부로 꼽을 수 있는 경기는 무엇일까. 수영? 축구? 양궁? e-Sports? 모든 노력과 결괏값을 나래비 세울 순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배드민턴 여자 단식 결승전을 뽑고 싶다. 세계랭킹 1위 대한민국 안세영 선수와 3위 중국 천위페이 선수의 경기.
이날 앞서 열린 두 번의 배드민턴 결승전에 한국 선수들이 진출했지만, 모두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정정한다. 한국 선수들이 진출해 값진 은메달을 땄다. 이날의 마지막 매치는 바로 여자 단식 결승전. 상대 선수인 천위페이 선수의 고향이 바로 아시안게임이 열린 항저우이기도 해 일방적인 응원이 예상된 바로 그 경기다.
고작 21살에 불과한 안세영 선수는 현재 세계랭킹 1위다. 그녀의 국제무대 데뷔는 2018년, 이전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해이기도 하다. 16살의 신인선수가 1차전에서 만난 선수는 이날 결승전에서 만난 천위페이. 안세영은 제대로 힘도 못써보고 1차전에서 그야말로 '광탈'을 하고 말았다. 이후 도쿄올림픽에서도 같은 선수에게 8강전에서 패배. 그리고 올해 아시안게임에서는 결승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1게임 초반, 개인전의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생각보다 접전으로 경기가 치닫는다. 어쩌면 상대선수의 컨디션이 단체전에 비해 좋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선수는 2년 전 열린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호각세의 공방전 속에서 1~2점 차의 리드를 이어가고 있던 중, 갑자기 안세영은 메디컬 타임을 요청한다. 원래도 좋지 않던 무릎이 급격한 방향 전환을 버티지 못해 탈이 나고만 것이다.
배드민턴은 단식과 복식 모두 같은 크기의 코트를 활용하지만, 커버리지는 다르다. 모든 영역을 IN 영역으로 포함하는 복식 코트에 비해, 단식 코트는 위 그림처럼 옆면의 일부(파란색 표시)를 OUT 영역으로 제외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수 1명이 쓰는 면적은 비교불가다. 따라서 복식선수들은 공을 앞뒤로 보내면서 빠른 템포로 체력을 소진시키지만 단식선수들은 앞뒤에 좌우까지 활용해 더욱 큰 폭의 체력을 소진시키며 경기에 임한다.
안세영이 세계랭킹 1위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발'이다. 앞서 탁구 콘텐츠에서도 말했듯, 손으로 하는 대부분의 스포츠는 발놀림이 훨씬 중요하다. 상대가 보낸 셔틀콕이 코트 구석구석을 찔러도 다 받아내 결국 실책을 유도하는 것이 안세영의 특기다. 하지만 무릎 부상은 방향 전환이 핵심인 수비력을 절반 이상으로 상쇄시킬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상대가 호락호락한 선수가 아니다. 경기 중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은 스포츠맨십에 어긋난 행동이지만, 불의의 부상을 활용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 어쩌면 기권하지 않았을 때 경기를 빨리 끝내주는 것이 더 큰 부상을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날 안세영의 부상은 그녀의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인 대각선 점프 스매시를 활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수세에 몰릴 것이 자명했다.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여겼던 선수의 패배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게임을 안세영 선수가 따낸 것이다.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안세영은 상대의 공격을 겨우겨우 받아내면서 끈질기게 실책을 유도했고, 게임 포인트 역시 상대선수의 실책으로 획득했다.
이어진 2게임은 참혹했다. 게임 초반, 부상의 여파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에 점수차는 5:12, 7점 차까지 벌어졌다. 여기서 나는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이 경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경기를 잡으려면 이번 게임은 빨리 포기해 체력을 아낀 후,
3게임에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하지 않을까
어? 그런데 2게임이 예상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게임을 던져버릴 줄 알았던 안세영이 최선을 다해 따라붙는 것이었다. 역시 강력한 공격은 불가했지만, 끈질긴 수비로 상대실책을 유도하는 방법이었다. 3게임도 있는데 굳이 왜 여기서 무리를 하는지 의아했다. 부상의 여파로 더욱 빨리 체력을 소진하는 것은 안세영일 거라 생각했다. 결국 2게임은 17-21, 안세영의 패배로 마무리.
그리고 시작한 3게임, 부상의 여파는 조금씩 사라지는 듯 보였고 오히려 부상이 긴장감으로 굳었던 몸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 것마냥 게임 초반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가히 놀라운 광경이었다. 3게임은 순식간에 18-8, 열 점 차로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그때, 천위페이 선수가 메디컬 타임을 요청했다. 이번엔 중국 선수의 근육이 올라온 것이다. 고향에서 맞이한 결승전, 천위페이 역시 이런 결말을 꿈꾸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3게임은 21-8, 안세영 선수의 압승으로 마무리 됐다.
경기 후, 그녀의 인터뷰를 보고 범인(凡人)의 생각을 뛰어넘은 전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2게임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나와 같았으나 그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2게임의 전략방향은 '랠리를 최대한 길게 끌어 상대선수의 체력을 소진시키고 본인의 감각을 살린다'였다. 누구나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그녀는 그 시간을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온다. 슬럼프가 온다고 내려놓지 말고, 결과에 대한 부담 없이 묵묵히 자신만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슬럼프를 이겨내는 한 방법이 되겠구나 깨달았다.
물론, 누구나 이 전략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세영 스스로 본인의 체력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릎은 어쩔 수 없지만 근력은 아직 충분하다는 자신감.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탄탄한 근육으로 감싼 무릎관절이 버텨주었기에 상대선수의 근력을 소진시킬 수 있었던 아이러니. 1게임에서 포기하지 않고 승리를 거머쥔 덕에 2게임이라는 기회를 얻어 컨디션을 충분히 회복했고, 3게임에 상대선수를 녹아웃(Knock-out)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자질이 곧 전략이었던 셈이다.
이 경기에는 더욱 큰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그녀는 매일 '새벽(훈련)'을 거르지 않았기에 체력과 멘탈리티가 충만한 상태로 올 시즌을 맞이했다. 그 계기가 바로 천위페이 선수였다.
무슨 중국 무림영화도 아니고,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라이벌을 타도하고자 하루도 쉬지 않고 무공을 연마해 결국 제압한다는 진부한 스토리가 현실이 될 때, 감동은 배가된다.
나는 나의 장점으로 언제나 빠른 포기를 꼽는다 ㅋㅋㅋㅋ 어쩌면 해봤자 안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내린 현명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고난 것 말고, 노력으로 얻은 것이 많다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아예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려고 새벽(훈련)을 했나
라고 되뇐 안세영처럼, 한 게 아까워서라도 말이다.
필요한 것은 정신력이라는 허상이 아닌, 근력이라는 실제다. 노력으로 쌓아 올린 근력이 있다면 더욱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안 될 때는 버텨서, 세 번째 게임으로! 영광의 금메달을 얻은 그녀처럼. 이것이 진정 나를 믿는 마음, 자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