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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앙 Jan 26. 2024

그들은 나를 웃음을 잃은 아이라고 불렀다.

2009년에서 2012, 13년 즈음

이번 편은 고백하건대, 잘 기억나진 않지만 피 터지도록 치열하게 살았던 25살 때까지의 이야기다.

다소 시공간의 모순이 있더라도 넓은 아량을 고개 숙여 부탁드린다.      






2009년 즈음.


그렇게 자기 철학을 세웠다.


'나는 자유의지로 현재의 순간 정신적 가치를 실현할 때 행복을 얻는다.'

내게 그 정신적 가치란 자유와 사랑, 영화 그리고 여행이었다.      


갑자기 살이 쫙 빠지자 건강하지 않은 복근이 드러났다. 그래도 생전 처음 보는 복근을 지키고 싶어서, 일어나자마자 반사적으로 30분 맨몸 운동을 했다. 이 습관은 나중에 강박이 되었는데, 어느 정도냐면 늑골에 금이 갔을 때도 오른손이 찢어졌을 때도 왼손으로 운동을 했다. 건강한 강박증이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운동이 끝나면 무릎을 꿇고 하늘에 계신 누군가에게 기도했다.     


"제 자기 철학을 지켜주시고, 그 순간을 놓칠 때마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되찾는 강인한 의지를 주소서.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행복하고 건강하길 기도합니다. 비록 내 얼굴을 냉담하고 둔감할 것이나, 내 심장은 항상 당신, 오직 당신만을 위해 뛰겠나이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그리고 영원히. 아멘."     


나는 내가 스스로 세운 십자가에 위배되지 않는 삶을 살거라 맹세하며 왼팔에는 사랑에 대한 타투를, 반대쪽엔 나침반을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새겼다. '나는 내 의지대로 된다 '     

매일 아침 거울을 봤을 때 스스로 부끄럽지 말자는 철없지만 후회 없는 다짐이었다.      

이후 주변 사람들은 나를 싸늘한 문신남이라고 불렀다.     

[인생론]은 작게 프린트해서 내 플래너에 끼워 넣었다.       






이제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겠지.     

홧김에 영화의 길로 들어섰지만 나는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남들보다 두세 배 아니 열 배는 노력해야 한다.


첫 번째 목표는 1년에 영화 1000편 보고 리뷰 쓰기였다. 하지만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그것밖에 없었고. 나는 서점에서 제일 비싸고 제일 두꺼운 영화사 책을 사다. 그리고 책에 거론된 거장들의 이름을 모두 노트에 받아 적은 뒤, 그들의 데뷔작부터 최신작까지 리스트업 하고는 순서대로 찾아봤다. 수능공부 할 때처럼. 밑줄 쫙쫙 그으면서.     


큐브릭. 키엘로프스키. 왕가위. 타르코프스키. 우디 알랜.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알모도바르. 페도로바르. 쿠스트리차. 데이비드 린치. 핀처. 히치콕. 빔 벤더스. 베르너 파스빈더. 다르덴. 프랑소와 오종. 조도로프스키..     

너무 많았다. 막막한 바다 앞에 돛단배를 띄우는 심정이었지만 내가 갈 길이다. 넘어가면 죽어버리지 뭐. 인터넷으로 못 찾는 영화는 한국영상자료원에 가서 자막 없이 봤다. 그렇게 습관을 들여야 한다.  

     

두 번째 목표는 1년에 1000만 원 저축하기였다. 더 이상 초콜릿 집만 만들 수 없으니까. 세상은 자유에 가격표를 붙이고 당신의 꿈에 바코드를 찍고 값어치를 판단한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하다.  당시 시급이 4000원, 많으면 4500원이었다. 공익 월급은 교통비와 식비로 쓰고, 평일과 주말에 쓰리잡을 뛰고, 담배값과 여행비 20만 원씩 조금 빼고. 그렇게 한 달에 80만 원씩 적금을 붓고 말일에 붙는 이자까지 더하면 모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서른 전에 1억은 있어야 내가 무너질 때 그 돈에 기대고 버텨 서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같이 단편영화를 만들던 크루의 형 누나들이 서른 즈음되니 무너져 영화를 포기하는 걸 봤다. 1억의 기준은 불분명하다. 그냥... 그 정도면 될 것 같았다.       


목표를 세운 뒤 거칠 것 없이 움직였다. 공익 근무를 하면서도 짬날 때마다 영화를 봤다. 저녁에는 학원 데스크에서 아르바이트를, 새벽에는 당시 유일했던 신촌의 24시간 카페에서 커피를 뽑았다. 손님이 거의 없어서 커피와 담배와 함께 영화를 봤다. 아... 그때는 노트북이 아니라 뭐라고 했었는데... 랩북이었나 넷북이었나...  주말 낮에는 한국에 처음 들어온 아이폰3 쇼케이스 매장에서, 밤에는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타코를 팔았다. 펑크가 나면 가끔 일용직을 나가고 가끔 연희장에서 설거지를 하고 가끔 강남 학원가에서 인터넷 강의 촬영 알바를 했다. 그럼에도 하루 24시간은 많이 부족했다. 시간이 안 될 때에는 러닝타임이 짧은 우디 앨런 영화를 봤고, 시간이 넉넉할 때는 타르코프스키영화를 봤다. 젊음을 깎아먹는 힘이라, 독기의 힘을 빌린 의지였지만 즐거웠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회상컨데 그때 정말 즐거웠다.    

  





2010년. 22살 당시 군대에서 휴가 나와 내 골몰을 봤던 고향 친구는 지금도 술 마시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     

"니 그때 진짜 미친놈 같았다. 그날 니랑 내랑 힘들다고 눈물 콧물 질질 짜가면서 깡소주 많이 마시고 잠들었거든. 내 새벽에 머리 아파서 물 마실라고 눈 떴는데, 니 눈 뻘게져서 영화 보고 있더라."


"맞나. 기억 안 난다."     


씁쓸하게 대꾸한다. 그때 무슨 영화를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갈수록 나는 말수가 많이 줄었다. 몇 년간 영화만 보고 일만 했다. 나중엔 공익 생활도 나름 짬이 많이 차서, 내가 후임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굳이 누군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는 웃음을 잃었고 표정이 사라졌고 굳이 할 말 아니면 입을 닫았다.

좀 웃으란 말에 볼살을 주물렀더니 굳은살이 배겼다. 원래 주욱 늘어났는데.     

그때 주변 사람들은 나를 웃음을 잃은 아이라고 불렀다.      

그해 여름 징글징글하던 공익 생활이 끝났다.           






2011년 즈음. 대학교를 자퇴했다. 어차피 안 좋은 소문도 낫고 학자금도 아끼고, 대학에서보다 간간히 나가는 영화 현장에서 배우는 게 더 많을 것 같았다. '영화란 무엇인가' 질문에 대한 거장들의 고민과 대답은 그들의 영화에 녹아있었으니까. 대학을 가기 위해 10년 넘게 돈을 쏟아부으면서 공부했는데, 막상 자퇴하러 왔다니까 "도장 찍고 가세요."라고 했다. 5분도 안 걸렸다.


공익도 끝나고 당시 간간히 신세 지던 친구에게 괜스레 미안해서, 고맙다고 이제 떠난다고 말하고는 200만 원짜리 기아에서 나온 하얀색 '리오' 중고차를 하나 샀다. 어차피 잠도 거의 안 자니 짐 보관할 용도로. 가끔 타고 다니기에도 좋고. 짐이랄 것도 없어서 작은 캐리어에 돈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만 담아 자물쇠로 잠그고 트렁크에 넣어놨다. 돈 주고 살 수 있는 물건은 미련을 두지 않았다. 옷 한 벌 해질 때까지 입고 새 옷을 사면 헌 옷은 버렸다. 자주 가던 모텔 사장님께 15만 원 정도 줄 테니 매일 씻게만 해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10만 원에 주차도 하라고 하셨다. 지금도 극도의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고 있다.          


조금 공기가 쐬고 싶을 때는 쪼개 모은 돈을 들고 무조건 해외로 나갔다. 싸고 가까운 나라부터.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와의 냉전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한국 사회의 슬픈 계산이 싫었다. 이 남자의 키, 저 여자의 몸무게, 너와 나의 재력 따위. 심지어 당신의 불행에도 등수를 매길 것이다. 나는 겉모습에 연연하여 진정한 내면을 보지 못하는 거지 같은 사회풍토가 여전히 역겨웠다. 다른 나라라도 안 그렇겠냐만은, 다른 나라는 말이 안 통해서 괜찮았나 보지.      

  

왼팔에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리라’라고 라틴어로 쓴 타투는 갈수록 이어져서 어느새 한 팔을 가득 채웠다. 당시에는 타투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시선이 많이 집중됐다. 신경 쓰지 않고 2년이 흐르고 3년이 지났다. 묵묵히 하루하루 생활했다. 영화를 보는 것과 돈 모으는 것, 가끔 해외로 피난 가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생존의 의지도 느끼지 못했다. 그 와중에 이성도 여럿 만난 것 같은데 미안하게도 그녀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시대의 보헤미안이라며 추켜세웠고, 누군가는 그들 자신과 나를 비교하며 부러워했다.       

그때 사람들은 나를 집시새끼라고 불렀다.     

제발. 당신도 알잖아.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나는 좁은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인심 좋은 모텔 사장님의 눈치를 보며 샤워를 했다. 모텔이 꽉 찬 주말에는 종각역 1번 출구에서, 비가 오는 날은 홍대 8번 출구 놀이터 정자에서 비를 피하며 잠을 잤다.    

 

기회가 된다면 슬픈 길거리 노숙자와 자유를 부르짖는 보헤미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글로 써봐야겠다. 그들의 외관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깡마른 몸매. 더러운 옷. 낡은 중고차.      


하지만 남이 안 볼 때 강남 메가스터디 커피 자판기 밑을 막대기로 긁어 누군가 흘려버린 500원짜리를 모으는 그런 삶이 부럽다고 하지 말아 달라.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기형도 시인의 말처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온전히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럼에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2011년 겨울 어느 날 새벽. 카페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내게 핸드크림을 건넨 그녀는 나랑 동갑이었고, 모델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나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었으며, 그녀의 손은 차가운 나의 손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날 눈이 왔다. 새벽 3시. 두 손을 꼭 잡고 그녀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며, 나는 잠시나마 남들이 느끼는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여전히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나는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만나지 1년이 지나고 내가 이별을 통보했는데, 그녀는 내가 일하는 카페로 찾아와 내가 극복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우리는 광화문 한 복판에서 서로를 껴안고 엉엉 울었더랬다.

      

너는 나를 사랑이라 불렀다.     






시간은 흘러 2012년. 25살이 되었다. 하고 있던 모든 알바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영화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잘 풀려서 단편영화도 꾸준히 찍었고, 제법 독립영화판에서 유명한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경험했고,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오나들며 작품 활동도 쉬지 않았다. 

1년에 적어도 3군데는 여행을 다녔다. 아시아는 거진 한 바퀴 돌았다.

내 블로그 리뷰는 5000개 즈음되었고, 통장에는 정확히 6500만 원이 있었다.

어제일이 오늘 기억나지 않을 때,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뭔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셔라. 우울증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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