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괴롭다면 그것은 생명 현상에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욕망 때문이다. 또한 잔인하고 살벌한 생존경쟁의 실상 혹은 무조건적인,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는 단순한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 이것이 세상을 이루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출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태어나졌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이 세계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존재를 밟고 올라선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혹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단순히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세계. 이것이 내가 지금 살아 숨 쉬는 세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에 초연할 수는 없다. 나는 돈에 초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돈에 관심 없다는 사람들을 그래서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대개 그런 이들은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이거나 아니면 위선자들이다. 누구도 돈의 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진정으로 자본주의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살려면 돈의 논리, 자본의 논리를 알아야 한다. 제대로 된 인식에서 자유로움의 가능성이 싹튼다.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라는 케케묵은 언명의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돈과 자본이 지닌 막강한 힘의 의미와 한계를 알아야 한다. 맑스의 자본/자본주의 분석이 현재에도 여전히 매력을 갖는 이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무감한 척, 초연한 척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다. 현실의 힘을 알아야 현실에 맞설 수 있다. 돈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돈만 아는 것이다. 돈에 초월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돈이 아니라 다른 욕망의 대상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흔치 않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로 돈 혹은 돈이 끌어오는 권력이나 다른 사회적 힘의 지표들이 아닌 다른 욕망의 대상을 찾기 쉽지 않다. 그걸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그리고 설사 그런 욕망의 대상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역시, 자본주의에 사는 한 어느 정도의 혹은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 예컨대 우아한 예술 활동을 하는 예술가도 밥을 먹어야 하고 삶을 영위해야 한다. 누군가는 그를 위해 밥을 하고 옷을 입혀줘야 한다. 모두 돈이 필요하다. 자기의 돈이든 다른 사람의 돈이든. 그걸 모르면서 자기가 잘나서 우아한 예술 활동을 하는 척하는 이들은 보는 건 딱하기까지 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에서 작가가 주인공 스티븐에게 때로 드러내는 약한 역겨움에 나는 그래서 공감한다.
이렇게 돈에 초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에 얽매여 그것을 뿌리치지 못하고 산다. 요는 정도의 문제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돈의 힘과 의미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들의 힘이 세기에 더욱 그러하다. 더 많은 돈을 가질수록 수직적 구조의 자본주의에서 살기가 편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인 욕망의 한계는 없다. 고로 물질에 대해서도 마음의 경계 짓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물질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며, 언젠가는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 어느 순간 그 사실조차 망각하게 되며, 그렇게 ‘현재의 삶’을 즐기지 못하는 시간의 늪에 빠지게 된다. 욕망의 대상과 주체가 뒤바뀌는 것. 그것이 물신주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돈뿐만이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학교 성적과 등수, 심지어 키와 몸무게 등 숫자로 이루어진 거의 모든 것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가치 판단은 자기 철학이 확립되었을 때만이 가능한데, 그 부재가 물질의 소유나 외모의 껍데기로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 하는 후진적 사고방식으로 나타나며 이 사회의 문제로 이어진다. 내 생각에 그 문제들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에서 느끼는 삶의 비루함 중 상당 부분은 이러한 물신주의와 관련된다. 그 비루함을 외면하는 예술들, 언술들, 우아한 말들 역시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다움과 최소한의 품격을 유지할 수 있는 밥벌이와 일자리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은 경제 살리기에 내가 냉소적인 까닭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민소득, 경제 성장률 몇 프로 따위의 수치들은 모두 공허한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최소한 그런 자유가 가능한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다면, 그 이후로는 ‘거리두기’라는 욕망의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일을 하면서 얻는 것이 ‘돈’뿐일 때, 그것보다 불행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물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기에, 그런 삶은 평생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어떤 이는 자신을 남과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괴로워하고 자책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풀뿌리와 나무 열매만 먹고살 수 있는 원시인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아침부터 밤까지 상사에게 스트레스받고, 아래에게 스트레스 주며 책상 앞에 앉아 휴가 날짜나 들여다보는 삶을 싶은가. 매일 아침 출근길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옮기고 싶은가.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물질에 집착한다면 나의 인생은 행복할 수도, 현재가 즐겁지도 않을 것이다. 무한한 욕망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공허함을 끌어안고 과거에 대한 후회 속에서 살아갈 테니까. 하지만 미래는 실존하지 않고 과거는 정지해 있다. 삶은 죽도록 앞만 보고 뛰어가는 달리기가 아니다. 누가 먼저 늙어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지 겨루는 게임도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고통받지 않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대답은 ‘해탈’이나 ‘죽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해탈’의 기준은 불명확하고 ‘죽음’은 인간 본성에 위배된다. 고로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고 했다. 대부분 결국에서야 고통이 없고 평온한 현재, 견디고 살 수 있을 만한 현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생존하며’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할까. 나는 그 해답으로 ‘Carpe diem’. 해석하자면 ‘현재의 순간을 즐겨라.’라는 함축적인 한 마디로 대답하겠다. 일생(一生). 인생은 말 그대로 한 번뿐이다. 그러니 그 순간을 놓칠 때마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발견하는 강인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이라는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추구하는 욕망의 대상은 물질이나 ‘숫자화’되는 대상이 아니며, ‘숫자화’ 할 수 없는 것, 즉 자유나 사랑, 꿈 등의 정신적인 가치들이 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자유의지’를 통해서 추구해야 한다. 인간 내면적 본성에 흐르는 자유의지란 외적인 구속이나 제약에서 벗어나 내적 동기나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는 의지다. 사회와 타인이 감히 그들의 잣대를 나에게 들이대도록 허락하지 마라.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이 사회에 흡수되지도 마라. 그리고 의무와 억압이 아닌 자유의지로서, ‘숫자화’되는 대상이 아닌 ‘정신적 가치’를 실현하라. 후자를 즐기는 것은 최고의 재능이며, 결국 전자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나의 정신적인 가치에 열정을 쏟으며 그것을 즐기며 사랑하라. 자신의 신념과, 강인한 주관으로 ‘나는 내 의지대로 된다.’라고 스스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길을 걸어라. 때가 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