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앙 Jan 17. 2024

위선자는 간사하게 나를 비웃었다.

2008년 10월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은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말대꾸했다. 나는 다를 것이라고. 꿈을 위해서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고. 무너지지 않겠다고.




바로 무너졌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학교 근처에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짜리 원룸을 얻었다.

당장 먹고 자는 것 앞에서 손짓 한 번에 껴져 버리는, 뼈대 없고 줏대 없는 자유에 대한 나의 철학은

서울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얼굴을 드러내고 간사하게 나를 비웃었다.


"너는 위선자야."


이를 악물고 모른 채하며 그것이 부모님 도움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자기 위로를 했다.

하여간 재밌는 새끼.




돌이켜보면 내 위선을 반성할 나이도 시기도 아니었다. 부모님의 도움은 해방감의 도움을 받아 쉽게 잊었다.

나는 해그리드가 생일 케이크를 가지고 말포이가족을 찾아온 그날 밤의 해리 포터처럼 들떴다.

대학생활 1학년은 군더더기 없이 재미있었다. 쓸데없이 약속이 많고 무의미하게 재미있었다.

과 대표도 되었고 단편영화도 열심히 찍었고 시나리오도 나름 잘 써서 메달과 장학금도 받았다.

정말로 해리포터가 같았다. 잔소리하는 부모님이 없고, 돈은 있고, 학교에서 유명했으니까.

나쁜 새끼.

 

하지만 그리핀도르에서의 판타지는 오래 가지 않았다.

군대가 나를 호출했다. 당연히 싫었다.

하지만 학교와 수능과 잔소리와 부모님으로부터 겨우 벗어난 이 불굴의 자유독립투사는

나라의 부름을 무시할만한 범법자나 권력자는 못되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나도 다를 것 없는 그저 그런 인생이라고.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스큅(마법사 혈통이지만 마법을 전혀 할 수 없다)이라고.

멍청한 새끼.


도축장 돼지처럼 끌려간 신체검사에서 공익 판정을 받았다.

그때 주변에선 나를  ‘신의 아들’이라 불렀다.

나는 그것이 '신의 장난'이라고 말한다.






만 19세. 공익 생활이 시작됐다.

나는 본가인 대구에서 출퇴근하지 않고 기어코 서울 생활을 이어갔다.

시작도 전에 무너져 버져 비웃음 받던 자유를 지키고, 내 꿈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증명하고 싶었어였을까.

아니지, 그저 좀스러운 자존심 때문이었지.


당시 공익 월급이 많아야 20만 원쯤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먹고살고자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익근무를 했고 허가를 받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살이 50kg까지 빠졌지만 할만했다.

오히려 희열을 느꼈다. '봐봐. 내가 증명해내고 있잖아.'


신촌의 야간 편의점 손님들은 대게 취해있다. 그리고 매우 기분이 좋거나 매우 화가 나있다.

술은 흥분제가 아니다. 진정제다.

술이 '에고 ego'를 잠재우면, '이드 id'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20살의 나는 그들에게 쉬운 먹잇감이다.


만 20세 이틀 전. 일이 터졌다.

새벽 4시 20분, 서른 초반 즘 돼 보이는 남자가 '에고'를 잠재운 채,

냉동만두를 사고는 간장이 없다고 나한테 지랄을 했다.


"죄송하지만 여긴 식당이 아닙니다. 간장은 사드셔야 해요."

"이 어린놈의 새끼가."


취객은 나에게 잘 짜인 각본처럼 욕을 했다. 1분. 5분. 10분... 멈출 줄 몰랐다.

육신이 지친 나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다만 한 문장이 귓구멍을 헤집고 뇌로 돌진했다.

  

“네 부모가 얼마나 가난하면 어린놈이 이런 시간에 알바나 하고 있냐.”


내가 카운터를 뛰어넘어 날았다. 주먹이 수차례 그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만두는 날아갔고 놈은 광대가 으스러졌다.

나는 박살 난 광대를 편의점 밖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10분 뒤에 경찰이 편의점에 들어왔다.

나는 공권력 앞에서 두려움에 자지러질 뻔했다. 고등학교 때처럼 싸우면 화해하고 끝나는 줄 알았거든.

하여튼 재밌고 멍청한 새끼.


경찰차 뒷좌석은 어둡고 딱딱하다. 그 생각 밖에 안 났다.

경찰차 따라오는 구급차도, 시끄러운 술집 노랫소리도, 가로수를 붙잡고 구토하는 여자도, 그녀 등을 두드리며 택시 잡는 남자도, 무시하고 생바람만 날리는 택시도.

모두 스쳐가는 이미지였다. 영화로 치면 배경음악이 현장음을 대체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광대값은 300만 원. 재복무라는 징계를 받을 수 없었다.

죄송하다고, 머리 조아리며 그저 죄송하다며 알겠다는 말밖에 못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찰 아저씨가 나를 안쓰럽게 보고 그나마 그 정도로 중재를 해준 것 같다.

렇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겨우겨우 모은 돈 30만 원은 간장 없는 만두처럼 날아갔다.

다음날 부모님 몰래 자취방 보증금을 빼고 현금을 뽑아 들고 가서 합의서에 사인을 했다.

광대남은 그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눈을 똑바로 못 마주쳤다.






만 20세. 생일이었다.

새벽 5시, 동기 집에서 잠이 들었던 내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그걸 생일 축하 전화로 오인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그 편의점 점장, 송사장이었다.


“경찰서로 올래, 합의 볼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내가 해리포터가 아님을 알았다.

눈을 뜨자, 현실은 정색하고 달려들었다.


머리도 안 감고 한 걸음에 달려간 편의점에서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었다.

새우깡 사러 온 그 손님은 더러운 똥마냥 나를 애써 무시한 채 계산을 하고 나갔다.

송사장은 돈을 요구했다.

그녀는 내가 편의점에서 근무한 3개월 동안 편의점에서 도둑질당한 물건 값을 배상라고 했다.

아니면 구청에 일러 받치겠다고. 증거도 있다고 했다.


"200만 원."


눈이 세 바퀴쯤 돌았다. 합의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당시 재복무 징계에 가까운 경고를 받았던 오줌이 지릴 정도로 무서웠다.

"도둑질 한 증거 있냐"라고 물어볼 것을 십몇 년이 지난 나는 아직도 가끔 후회한다.

무릎을 굽히는 대신 머리를 썼더라면 인생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나는 마이 캡틴 '존 키팅'과의 약속을 멍청한 방식으로 증명했다.   


잊지 못할 생일날, 나는 구청 화장실에 숨어 눈물만 똑똑 흘렸다.

무서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엄마말이 맞았다. 세상은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인정하기 싫어서 울었다. 

누가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쪼다처럼 숨 죽여 울었다.


초콜릿폰으로 고향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대부분은 군대를 가서 연락이 안 됐다.  

학교 선배들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중 이야기지만 학교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서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눈물 값은 못 받았다.

어디 갔었냐며 선임에게 싸대기를 맞고 욕을 먹었다.

공익이 무슨 싸대기 하겠지만, 내가 있던 곳은 주차 딱지를 떼던 '교통지도과'라서 민원인들과 마찰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구청에서는 몸이 아픈 사람이 아니라 속히 말히 '생활'을 해서 공익 자격이 된 인간들을 우리 부서에 많이 배치했다. 싸대기와 구타는 그곳에 존재했다.


나는 결국 내가 고함질렀던,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못난 아들의 항복의사였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로는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암이 재발해서 수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엄마 바꿔달라고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잘 지내고 있니... 생일 축하해.”




'신의 장난'은 선을 넘었다.

그러면서도 내 안부를 물으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일곱 여덟 개로 갈려져 나왔다.

내 영혼도 일곱 여덟 깨로 갈라졌다. 볼드모트처럼.


“잘 지내고 있다.”


무뚝뚝하게 전화기를 끊고 나는 근무지를 이탈하고 한강으로 갔다.

영화에서 보던 것은 있어서, 소주한 병을 원 샷 하고 또 한 병은 손에 쥐고.

죽으려고 갔는데 막상 가니 희망인지 공포인지 슬픔인지 뭔가가 마음속에 고개를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있었지.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도 기억이 잘 안나는, 일회성 만남으로 엮어진 사람들에게 싹 다 문자로 도움을 요청했다. '십만 원만 빌려주면 두세 배로 갚겠다. 너무 급해서 죄송하다.'


달이 떨어지고, 내 손에서 소주병도 떨어지고 어느덧 주위는 조용해졌다.

지쳐서 잘 잤다.

조깅하는 건강한 사람들 기합 소리에 잠이 깼다.

문자가 많이 와있었다. 은행에 달려가 확인해 보니 통장에는 정확이 230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협박금을 충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들은 내게 돈 갚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대신에 내가 살아서, 영화를 잘 만들어서 나중에 시사회에 초대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기꺼이 돈을 보냈다. 누군가는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후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한다는 말을 왼팔에 새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현금을 뽑아서 신촌 편의점까지 달려가 돈봉투를 던졌다.

돌아서면서 편의점에 불을 싸지를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하다가 그만뒀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내 생일날을 싫어했다.




새벽은 아침이 되었고, 담배 연기가 잘 흩어지는 것이 가을이 된 그날 하늘은 아주 맑았다.  

영화를 잘 만들어야겠다. 성공해야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갚아야 한다.

열정이 나를 휘감았다.

무엇보다 위선자 소리를 듣지 않아야 했다.

그래, 자기 철학을 있어야 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내 가치판단을 도와줄 견고한 자기 철학.

 

시행착오도 많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꿈을 지키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피부로 배웠다.

낮에는 공익생활을 하고 밤에는 24시간 카페에서, 주말에는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브리또를 팔았다.

술에 관련된 알바는 안 했다.

영화는 하루에 무조건 3편씩 봤다.


서점에서 쇼펜하우어를 읽었다. 니체를 읽었다.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 했다.

일부러 어렵게 쓴 건지, 번역이 잘못된 건지, 내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지...

그때는 그랬다.


1년 뒤, 몸무게가 44kg가 됐다. 그래도 묵묵히 강박관념처럼 철학을 세웠다.



이전 03화 그럼에도 내 이야기의 시작은 위대한 사랑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