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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앙 Jan 15. 2024

그럼에도 내 이야기의 시작은 위대한 사랑이었다.

1988년 10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생으로부터 출발해야겠지.

배경 설정 부분이니 지루해도 조그만 참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다.  

도시가 잠든 밤. 나는 우리의 위대한 사랑은 죽었다고 술에 취해 외치고 있으나,

그럼에도 내 이야기의 시작은 위대한 사랑이었다.     




나는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다 권총에 사살당한 1988년 10월 16일 대구에서 부모님의 사랑 아래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북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지만 집안이 어려워 서울대에 가지 못했고, 어머니는 누구나 돌아볼 만한 미인에 나라에서 표창을 받을 정도로 능력 있는 소방관이셨지만 아기 치고는 너무나도 예민했던 나를 육아하느라 결국 직장과 꿈을 포기하셨다. 외할머니는 생전에 내가 엎어주지 않으면 하루 온종일 울어대서 당신의 등에 욕창이 다 났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회사일로 우리는 부산, 대구, 안동, 서울을 돌다가 국민학교 때부터는 쭉 대구에 살았다.

     

국민학교 1학년 때, 내 꿈은 고생물학자였다. 생전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이었다. 나는 극장 스크린 양쪽 끝에 달린 빨간 커튼이 걷히면, 티라노 사우루스가 튀어나와 나를 죽일 줄 알고 영화관 복도를 가로질러 도망치다 어머니한테 붙잡혀서 벌벌 떨면서 영화를 끝까지 봤다. 당연히 커튼 뒤로 티라노 사우루스는 나오지 않았다. 그 후 학교 숙제가 있으면 나는 공룡을 복제하는 과학실 그림을 그렸고, 뜻도 모르는 DNA를 '디옥시리보핵산'이라며 친구들에게 잘난 척을 했다. 하루 종일 공룡 사진만 드려다 봤고 화석을 캔다고 낫을 들고 아파트 화단을 파헤쳤다. 기어코 나뭇잎 화석을 하나 찾아냈다.

          

국민학교의 이름은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3학년 때, 대외적인 나의 꿈은 여전히 뜻도 잘 모르는 고생물학자였지만, 실은 야구에 빠져있었다. 아버지 손을 꼭 잡고 간 대구구장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저 선수가 홈런을 칠 것이다.”라고 하셨고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그 선수 이름은 이승엽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삼성라이온즈에 매료되어 동네 아이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야구를 하러 다녔다. 한 번은 내가 아버지께 야구장에 가자고 조르고 졸라서 정말로 아버지가 반차내고 오셨는데, IMF시절이라 나는 아버지가 당연히 못 오실 줄 알고 밖에서 나가 놀다 저녁 늦게 들어와 허무하게 약속을 놓쳤다. 나는 야구를 그리 잘하지는 못했고, 그래서 이 꿈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으로 죽음과 가까웠었다. 학원 가는 길에 택시가 80km로 나를 쳤다. 목격자 말로는 내가 '붕' 날아서 '툭' 떨어졌다는데. 내 기억은 7월 여름 따뜻하게 데워진 대구의 아스팔트 위에서 잘 자고 일어나 보니 주위가 온통 붉은 피로 얼룩이 진 것이 전부다.

뭐... 너무 잘 잤다 그뿐이었다. 나는 머리 몇 바늘 꼬맺을 뿐인데, 학교에서는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빌어먹을 뉴스에도 피에 젖은 내 뒷모습이 나갔거든. 퇴원 후 축하파티 때 롤러 브레이드를 타다가 사고 당시 오른쪽 다리도 부러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CT에선 안 보였나 보다. 의사가 전날 과하게 한 잔 했거나. 그 이후로 키가 잘 안 컸다.

          

중학교 때 내가 살던 동네는 교육열이 심하기로 유명한 대구 수성구였다. 학군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잘은 모르지만 동네에는 학원이나 병원밖에 없었다. 애들이 뛰어놀 곳은 PC방으로 대체되었다. 가난이 원수이지, 주변 환경 탓이었는지 어머니는 내가 사자 직업을 가지시길 원했다. 한 번은 공부를 하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는 내게 찬물을 부었고 –드라마에서나 봤던 거 아니었나- 학원 빼먹고 놀러 갔다가 풍선막대기로 뒤지게 처맞았다. 두려움과 괴로운 사랑에 나의 꿈은 사라지고, 나는 학교와 학원만을 오가며 공부했다. 뭐, 나름 공부를 잘해서 희망의 끈을 못 놓으셨나. 나는 3년간 나 없이 살았다. 나 없는 내 인생이었다.  


그리고 사춘기 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방학, 나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빌렸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고 어릴 때 주구장창 돌려보던 <쥬만지>에서 낯이 익은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하고, 화기애애해 보이는 포스터에 19세 딱지가 붙은 것이 신기했을 뿐이다.

오 캡틴 마이 캡틴. 당신도 우울증으로 자살했잖아. 이 빌어먹을 양반아.



 

그날 새벽, 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나와 엄마의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집안의 공기는 적막한 시간 속 어머니가 신문지를 넘길 때마다 나오는 ‘스윽’ 소리만큼 차가웠다. 신문을 넘길 때마다 공중에 부유하는 먼지 따분하고 오히려 무거웠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라는 답 안 나오는 대책 없는 질문을 해대던 중, 성적이 떨어진 어느 날 어머니는


"이렇게 공부해서 니 뭐 먹고 살 거고 "


로 선공을 했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생각쟁이’라는 잡지에 적힌 ‘영화감독 신상옥’이라는 글귀와 눈이 마주친 뒤


"나 영화감독 하겠다."


라고 방어했다. 단순한 저항심이었지만 그 뒤로 나는 오기로 아무 영화나 봤다. 영화가 좋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싫어하는 걸 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런데 운이 나빴는지, 영화는 내 적성에 맞았다.


 2시간에 압축된 이야기 속에 묻어 나오는 그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 여운 웃음 슬픔 애련함 애잔함 분노 열정 담담하고 또 거칠고 하지만 이 모든 게 인생이라는 것을, 주인공이 아기돼지 베이브든 라이온킹 심바든, 은행나무 침대이건 상관없이 그들은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혹시 나도 영화라는 매개체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인생의 즐거움을 찾게 해 줄 수 없을까 하는 재수 없는 자만심도 차오르기 시작했다. 쇼츠니 뭐니 해서 인내심이 줄어든 혹시 모를 신세대 독자들을 위해, 지루한 내 영화 철학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겠다. 제작사에서 영화 러닝타임을 90분으로 맞추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요즘이니까.


그렇게 필름 메이커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한 나는 부모님께 이 사실을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이 꿈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전락한 주변의 현실이 싫었고 내 인생을 '돈 따위에'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진정으로 '저 영화 할래요'라고 고백하는 그날 부모님은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일주일 뒤였나.

아버지가 물으셨다.


“니 엄마 암이랜다.  너 엄마 죽어도 영화할래?"

"네"


십 분의 일초의 망설임도 없는 나의 대답에 그 뒤로 아버지는 내 선택을 단 한 번도 꺾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본인을 사지로 몰아갈 정도로 일만 하셨다. 이제는 그때 내가 했던 그 대답이 다시 돌아와 내가 이 지랄 맞은 상황에서 아직도 싸우고 또 싸워서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쉽지 않으셨나 보다. 꿈만으로 사는 것이 사랑하는 아들의 미래에 가시밭길이 될 것이고, 한 우물만 파는 것이 아들의 무덤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분명 아셨을 거다.

가난은 꿈이 아닌 현실이고 사람은 꿈이 아닌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부모님이 차려주신 밥상만 먹어서 몰랐다.


 어머니가 공부하라고 하면 나는 자는 척을 했고, 당신을 잠들 때 나는 몰래 일어나 공부를 했다. 모의고사 점수는 일부러 200점대를 오갔고,


"경제적인 독립이 없으면 니 자유도 없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진학하면 다시는 상관하지 말라!”


 모자간의 고성에 창문이 깨지고, 내 책상에는 식칼이 꽂혔다. 수능 후 내 점수가 400점이 넘는 것을 어머니께 알리는 순간, 나는 일말의 해방감을 느꼈다. 사실 그때 나는 그것이 ‘자유’라고 착각했다.

그래, 내가 이겼다고 착각했다.



 


만 18세. 나는 어느 예대에 합격한 뒤 서울로 올라왔다. 다시는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도 엄마 돈이니까 안 먹을 거라면서.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서. 나의 자유를 위해서. 캡틴의 가르침을 몸소 실현하고자.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죽은 닐 페리를 병신이라 비아냥거리며 욕하면서.

 

 대구와는 달리 1월의 서울역은 많이 추웠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높은 빌딩의 마천루에 압도당한 나는 성공에 대한 열정과 패기로 무장한 채 찜질방 갈 돈으로 용산 CGV에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의 <바벨>을 보면서 달콤하게 잠을 잤다. 영화가 난해했나 보다.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 한 채. 슬픔에 헤엄칠 줄은 모른 채.

지금 바늘로 덕지덕지 꿰맨 팔로 이 글을 쓰고 있을 거라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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