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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필 Sep 14. 2024

프랑스의 비공식적 새해, "라 항트레"

프랑스의 9월 첫째 주, 모두가 일상으로 귀환하는 날의 풍경

9월 첫째 주 월요일, 프랑스의 비공식적 또는 두 번째 새해라 할 수 있는 "라 항트레"가 시작되었다.

라 항트레 (la rentreé)는 영어로 하면 "더 리턴 (the return)", 곧 "귀환"을 의미한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이니 특히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라면 중요한 날이기는 하지만, '왕좌'같은 단어라도 붙어야 할 듯한 "귀환"이라니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다들 어디로 갔다가 귀환한다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면, 답은 바로 프랑스만의 그랑드 바캉스(grandes vacances)이다.

길고 무더운 프랑스의 8월은 한 달 동안 모두들 생업을 떠나 피서를 떠나는 "대휴일"의 전통을 만들어냈다.

요즘은 프랑스도 바뀌어서 예전만큼은 아니라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여름 바캉스는 여전히 불가침의 신성한 영역이다.

남들보다 조금 이른 여름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8월 중순의 파리는 차도 인적도 드물어 참으로 고요했다.

동네 빵집, 정육점, 치즈가게, 야채과일가게는 문을 닫아 헛걸음하기 일쑤였고, 아이들은 공원에 가도 친구들이 없으니 실망했다.

화창했던 8월 어느 날, 동네 공원에서 


그러다 8월 마지막 주가 되자 사람이며 차들이 도시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이건 그냥 귀환도 아니다, "대귀환"이 시작된 것이다.

뜨거웠던 태양의 흔적을 살결에 가득 새긴 동네 아이들은 한 뼘씩 키가 자라 나타났다.

쉼과 육아 그 중간 어딘가였던 아이들과의 바캉스가 끝난 부모들의 얼굴엔 아쉬움과 해방감이 동시에 묻어난다.

각종 매체에서는 항트레 블루스 (blues de la rentrée)를 극복하는 법을 소개한다.

직장과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우울감, 무력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을과 겨울이 온다는 건 핫초콜릿과 라클렛 파티의 시즌이 온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소소한 행복은 여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라든가, '야외활동이나 주말 호캉스를 계획해 보라'는 등의 조언을 건넨다.


개학 첫날, 제법 선선해진 바람 사이로 모처럼 아침부터 동네길이 북적인다.

학교 가는 길, 두 달 만에 만난 아이들과 부모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바캉스는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속보 전하듯 교환한다.

이렇게 항트레 시즌에 여러 사람들과 안부인사를 주고받다 보면 길었던 나의 바캉스는 진액만 남아 한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가을과 겨울, 봄을 지나 다시 여름이 올 때까지, 그 진액은 각자에게 보약이 되어 지칠 때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다시 오늘 하루 즐겁게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항트레가 시작되고 만 2주가 되어가는 지금, 여전히 우리 모두는 익숙한 듯 새로운 일상에 적응 중이다.

아이들에게는 역시나 학교가 우선이다.

학교 안팎의 방과 후 활동들도 아이들이 새로운 학교 생활에 편안해지는 9월 마지막주쯤 되어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때까지는 학교 숙제도 없다시피 하고, 아이들은 학교-공원-집을 차례로 돌며 서서히 방학모드에서 학교모드로 전환한다. 

아직 새로운 누누(베이비시터)를 구하지 못한 부모들은 번갈아가며 일찍 퇴근해 아이들을 데리러 가고, 운이 좋은 가족들은 지방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항트레 기간 동안 파리에 올라와 육아를 도와주시기도 한다.


9월의 첫 월요일, 동네길이 꽉 막히게 북적이던 학교 끝나는 시간 


어른들의 세계에는 다양한 항트레가 존재한다. 

최소한의 인력으로 여름 나기를 마친 정부부처와 공공기관들은 다시 업무를 시작하고 (la rentrée du gouvernement), 정치인들 또한 "항트레 폴리티크" (la rentrée politique)를 맞아 새로운 정책을 내놓고 설전을 재개한다. 

방송국들은 항트레를 맞아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편성하고 (programmes de la  rentrée), 패션 잡지들은 "항트레 트렌드 (tendances de la rentrée)"를 소개한다. 

출판사에서는 "항트레 신작"을 발표하고 (la rentrée littéraire), 극장과 미술관에서는 새로운 연극과 전시가 시작된다. 


올해도 어느덧 끝이 가까워져 온다는 조급함과 허무함이 밀려오는 요즘.

문득 '항트레가 있어 나의 일상을 재정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의 항트레는 보통의 날들을 다시 돌아보고 의미를 찾는 집단 의식(ritual)에 가까운 듯하다.

이는 평범함 안에 있는 기쁨을 찾는 프랑스인 특유의 "라 조아 드 비브르(la joie de vivre: 삶의 기쁨)"  문화와도 상통한다.

 

여름휴가에 대한 미련도 연말에 대한 걱정도 당장은 접어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 다짐하며, 오늘도 집 앞에서 만난 이웃과 짧은 근황토크 후 서로의 새해를 축복하는 인사를 건넨다.

"본 항트레 (Bonne rentr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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